109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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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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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2023.08.17.
경찰서 서장실에서 다정과 특별한 면담을 나누고 돌아온 박 회장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다.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돌한 행실에 심사가 비틀렸다.
차라리 도와달라고 말했다면 지금처럼 고민이 길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 선심 한번 쓴다며 유치장 밖으로 나오도록 꺼내 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째 기분이 찜찜하다. 머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심정은 쉬이 잘라 내질 못하는 걸 보니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긴 고심 끝에 박 회장은 마음을 정했다.
“윤 비서야. 호텔에 보관 중인 물건 말이다.”
“네, 회장님. 결정하셨습니까?”
“정혁이 놈 줘야겠다.”
윤 비서가 의아함을 담아 눈썹을 위로 끌어당겼다.
보통이라면 그런 물건에겐 할 수 있는 가장 큰 처벌을 내리기 마련이었다. 그게 박 회장의 방식이니까.
한데 손자에게 쉽게 내어 주는 걸 보니, 처음과는 다른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 * *
“태준아 안녕! 정민아 안녕!”
클리닉에 도착한 시우는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제법 친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름드리나무처럼 곁에 선 정혁은 그런 아들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애가 누굴 닮아 그런지, 낯가림은커녕 환경 적응력도 만렙이었다.
안녕! 안녕! 팔랑팔랑 고사리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데, 자그마한 정수리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쯤 되자 문득 중간 점검차 확인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유시우.”
“어, 네에!”
한껏 고개를 내려 보자 시우도 꺾일 듯이 고개를 젖혔다. 천진난만한 눈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유시우. 대표 삼촌이 좋아, 내가 좋아?”
“아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시우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그에 살짝 긴장한 듯하던 정혁의 입가가 스르르 풀어졌다.
“시우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나도. 나도 유시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대답이 나오기까지 고작 0.3초. 그 짧은 찰나에도 혹시나 다른 대답이 나오면 어쩌나 피가 말랐더랬다.
물론 지금의 결과를 크게 의심한 건 아니다. 정혁도 예전과는 입지가 달랐다. 그땐 그냥 아저씨고 지금은 아빤데, 대표 삼촌 따위와 비교될 리 만무했다.
자신감도 치솟겠다 내친김에 유다정과도 한판 붙어 볼까 했지만, 거기까진 자신이 없어 관뒀다. 세상에 엄마를 이기는 아빠는 흔치 않을 테니까.
그는 무릎을 굽혀 기특한 아들을 품에 꼭 안았다. 그러자 시우도 애교스럽게 그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매달린다.
“아빠! 이따 또 만나요.”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물씬 밀려들자 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유시우도. 이따가 만나.”
* * *
클리닉을 나선 정혁은 서울 시내의 한 중견 호텔로 향했다.
윤 비서가 일러 준 객실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곧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장신에 건장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깍듯하게 허리 굽혀 맞이하는 남자의 모습에 정혁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면식이 있는 얼굴이라 그렇다.
설마 박 회장이 평소 데리고 다니는 덩치 큰 수행원 중 하나가 이 시점에 등장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신병을 확보해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남자를 딱 붙여 감시할 정도면 그냥 감금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정혁은 수행원 때문에 유독 비좁아 보이는 통로로 발을 들였다.
너른 객실로 들어서자 응접실 소파에 파묻혀 대형 TV로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남자가 보였다. 테이블 위로 뻗은 슬리퍼 발 옆으로는 구겨진 맥주캔 몇 개도 나뒹굴었다.
감금이든 뭐든, 팔자 한번 늘어지게 좋아 보인다.
TV에 붙들려 있던 영준의 눈길이 설핏 올라선다. 누군가 방문할 거라는 걸 사전에 전해 들었던지, 정혁을 보고도 그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영준의 첫마디는 다소 퉁명스러웠다.
“날 왜 만나고 싶어 한 겁니까?”
“내 팔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뭐 하는 놈인지 얼굴은 봐야지.”
정혁이 깁스한 팔을 살짝 내보이며 말하자 영준은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이제 와 소용없는 말인 건 알지만,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나도 사주를 받고 한 짓이라…….”
영준도 은근히 유약한 구석이 있어 제가 다치게 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만큼 뻔뻔하진 않았다.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 박 회장에게 붙들려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영준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강요가 아닌 회유나 설득에 가까웠다.
그것에 마음이 흔들린 건 오히려 선영 모녀에 대한 괘씸한 마음이 크게 작용한 탓일지도 모른다.
구실은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 몸을 피해 있으란 거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거짓 증언을 한 죄로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핑계로 외국물도 좀 먹고 해외여행도 실컷 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면서.
결론은 여비 몇 푼 받고 후미진 외국 어딘가에 처박혀 부를 때까지 얌전히 숨어 지내란 뜻이었다.
맘껏 이용할 땐 언제고 당하고만 있을까 봐?
고향 집엔 자나 깨나 하나뿐인 아들이 잘되기만을 기도하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영준은 그런 어머니를 두고 달아나듯 외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다.
박 회장 측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몸을 의탁한 건 그 때문이었다.
“오현아하고 나,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몰랐죠?”
정혁은 눈앞의 남자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우쭐한 태도에서 어쩐지 과시 욕구가 내비쳤다.
“그랬어?”
뭘 과시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흥미롭다는 투로 받았다.
오현아가 자신의 숨겨진 애인을 유치원에 몰래 꽂아 넣고 밀회를 즐겼다?
정말 몰랐다. 사실 몰라도 되는 일이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밋밋한 반응이 못마땅한지 영준이 한쪽 눈을 찌푸려 떴다.
“그게 다야? 당신하고 결혼 말 오가는 동안에도 계속 날 만났다니까. 그런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준의 입에서 도발성 짙은 말이 튀어 나갔다. 그에 정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렇지도 않긴. 되게 화나네. 근데 이해는 돼. 나도 다른 여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거든.”
말장난으로 심경을 대신하는 어조가 단조로우면서도 한결같이 무성의했다.
“힌트 하나 줄까? 사실 애 엄마한테 덮어씌운 사람 따로 있어.”
정혁은 픽, 조소를 흘렸다. 마치 이 게임의 열쇠를 제가 쥐고 있는 양 굴지만 틀렸다.
“알아. 아이 엄마가 누명 쓴 것도. 진짜 범인이 누군지도. 또 체육대회 때 텐트 무너뜨린 사람이 너라는 것도.”
여유롭던 영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 그건 사주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잖아!”
“그래. 그랬겠지. 너 같은 놈은 주체적이지 못해서 누구 똘마니 노릇밖에 못 할 테니까.”
그의 지적에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지만 영준은 뚜렷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영준에게 전해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사건이 있은 그날, 토끼반 담당 교사인 민서영은 원장실의 호출을 받았다. 가 보니 오현아가 정체 모를 알약 하나를 건네며 그녀에게 일을 사주하더란다.
위압에 못 이겨 약을 받아 온 민서영은 낮잠 시간을 노려 곱게 간 약을 시우의 물통에 타 먹이고 나중엔 잠든 시우를 안아 원장실로 데려다주었다.
대강 납득이 되지만 이런 정황 설명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 맨입으론 좀 그런데.”
영준이 거드름을 피운다. 정혁은 피식 실소했다.
“그래? 그럼 그 입에 뭘 처먹여 줘야 만족할까.”
“형씨 정도면 해 줄 수 있는 거 많잖아. 가진 게 돈밖에 없으니까.”
그 순간 정혁의 눈길이 얼어붙었다. 호의가 호의인 줄 모르면 가르쳐 줘야지.
“살인미수로 걸려들어 가고 싶은 거 아니면 증거 놓고 꺼져, 새끼야.”
* * *
자신의 처지는 생각도 못 하고 뻐기던 영준은 곧 정신을 차린 뒤 호텔을 나서 경찰서로 향했다. 자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그가 계획적으로 무너뜨린 텐트에 깔려 부상을 입었다. 강철 프레임이기에 제대로 깔렸다면 사망자가 속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정혁은 증거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그에게 집행유예를 약속했다. 그러려면 정상참작을 위해서라도 자수는 필수였다.
김영준이 내놓은 증거는 손톱만 한 메모리 카드였고 내용은 CCTV 영상이라고 했다. 언제고 현아에게 뒤통수를 맞을 걸 예상해 원장실 내부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영준이 떠나고 정혁은 곧장 휴대폰에 영상을 띄웠다.
제법 긴 영상 속에는 담당 교사 민서영이 시우를 원장실에 데려다준 이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현아가 잠든 시우에게 하는 짓을 묵묵히 지켜보던 정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추후 다른 증거를 보강하더라도 우선은 이것만 있으면 다정의 무혐의는 곧바로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럼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통 개운치가 못했다.
* * *
정혁을 따라 클리닉으로 온 다정은 초조하게 맞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고작 일주일인데, 당장은 시우가 눈에 밟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봐선, 유치장에 하루만 더 있었더라면 딱 말라 죽었을 거다.
다정은 목을 빼고 복도를 살폈다. 경찰서를 나선 모습 그대로였지만 집으로 가 씻거나 옷을 갈아입는 사치를 부리기엔 몹시 여유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업을 마치고 방을 나선 시우가 그녀를 먼저 알아봤다.
“엄마아!”
“시우야!”
아들을 보자마자 다정은 어쩔 줄 몰라 자지러졌다. 씩씩하게 달려간 시우는 발만 동동 구르는 엄마를 힘껏 안아 주었다.
짧은 두 팔로 감싸 안아 주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흐엉, 엄마 아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항.”
“아닌데! 시우가 더 보고 싶었는데!”
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정혁은 어린애 같은 다정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울든 웃든 하나만 하지, 입은 웃고 있는데 두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조금 웃겼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시우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어! 근데 있잖아요, 엄마! 백 번 이겼어요?”
“응?”
다정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
“어! 아빠가 그랬는데! 엄마가 나쁜 사람하고 싸워서 백 번 이기면 집에 온다고 했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대강 파악한 다정은 얼른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휴, 맞아요. 엄마가 시우한테 빨리 오려고 나쁜 사람들 다 물리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우와! 그럼 엄마가 티라노사우르스도 이겨요?”
“아마 그럴걸?”
다정은 아들을 위해서 티라노사우르스가 되는 것도 마다치 않는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