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반갑다 (108/114)


108화 반갑다
2023.08.13.


뺨을 감싸 쥔 현아가 눈을 부라렸다. 그 눈을 마주하다 못해 잡아 먹을 듯이 주시하며 다정이 씹어 뱉었다.


“왜? 아파? 넌 이깟 게 아프니? 내가 당한 걸 돌려주려면 수백, 수천 대를 휘갈겨도 모자라!”

“이, 이게 미쳤나!”

현아가 버럭 내지르기 무섭게 또다시 짜악, 하고 뺨으로 불이 붙었다.


“이건 우리 시우 몫이야.”

“이씨…… 너!”

어금니를 앙다문 현아의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그리고 이건 저 남자 대신이야. 내 남자가 신사인 걸 다행으로 알아, 이 나쁜 년아!”

번개처럼 휘두른 손이 또 한 번 철썩, 소리를 울렸다. 현아의 뺨을 보기 좋게 휘갈긴 다정의 눈길이 정혁에게 향했다.

눈가가 달아오르려 하지만, 씨익 웃는 그를 보자 눈시울이 뜨거운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현아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벌겠다. 따귀가 연달아 세 대나 날아와 꽂히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황당한 건 둘째치고 진심으로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고였다.


“너…… 네까짓 게 감히 날 때려? 너 내가 고소할 거야!”

덜덜 떨리는 턱을 감싸 쥔 현아가 새하얗게 질려 악다구니를 썼다. 다정은 기가 막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칠 암울한 미래에 대해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여자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너 지금 고소라고 했니? 얼마든지 해. 그 전에 내 고소장 먼저 받아야 할걸? 아니, 그 전에 무고와 위증, 그리고 아동학대로 구속영장부터 받아보려나?”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열린 취조실 문으로 담당 형사가 들어왔다.


“말씀들 나누셨습니까?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오현아 씨는 사건이 있기 전까지 CCTV가 고장 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했죠? CCTV는 토끼반과 원장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것만 고장이 났어요. 그런데 사건 직전 오현아 씨가 CCTV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도 CCTV가 고장 났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현아는 이런 상황에 너무도 태연한 형사가 어이없었다.


“형사님. 범죄자가 수갑도 안 차고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참고인으로 여기 있는 거라고요.”

현아가 따져 묻는다. 그러자 담당 형사가 말한다.


“아, 모르셨습니까? 유다정 씨는 무혐의가 입증돼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오현아 씨는 방금 주요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전환되셨고요.”

 

* * *



“그동안 여러모로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번 사건의 담당 경찰관들이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다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처량한 웃음을 머금었다.

범인 취급을 받은 거야 못내 억울하고 분한 감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게 이들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다정은 다시금 되찾은 자유가 기쁘기 한량없었다.

시우를 생각해 한시도 희망을 놓은 적은 없다지만, 일주일이란 기나긴 시간 동안 감금되어 있다 보니 어쩌지 못하고 최악의 극단적인 상황을 종종 떠올려 보곤 했었다.

시우를 영영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죄여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견디며 다정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부디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가족……

아무 힘도 없어 보이지만, 단단한 결속을 불러일으키는 그 두 글자가 아니었다면 다정은 지금껏 버티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기꺼이 사과를 받아들인 다정 역시 그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애쓰셨어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성역 없는 수사 부탁드립니다.”

다정 측에서 제출한 다양한 증거를 토대로 오현아는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참고인 진술을 위해 불려 온 줄 알았던 현아는 취조실에서 제시된 체포 영장과 더불어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자 현아는 현실을 부정하며 한동안 난동을 부렸다.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끌려가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이젠 오현아가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다정은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변호사와 함께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때 저 멀리 회전문 너머로 익숙한 뒷등이 보였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등이었다.

그를 발견하고 마음이 급해진 다정은 그간 시간과 고생을 아끼지 않았던 변호사에게도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변호사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렇게 풀려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일인데 별말씀을요. 그리고 유다정 씨의 결백을 입증한 대부분의 증거는 전무님께서 정신없이 뛰어다니시며 직접 수집하신 겁니다.”

다정은 입구 밖을 서성이는 남자의 등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태평한 성정과 나긋해 보이는 겉모습만 보면 정신없이 뛰어다녔을 모습이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모쪼록 다행이라 말하는 변호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다정은 입구로 발길을 서둘렀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커다란 회전문 안에서도 그녀의 두 발이 종종걸음쳤다. 그렇게 회전문을 통과한 다정은 다짜고짜 커다란 남자의 등으로 뛰어들었다.

등을 가격하는 작은 충격에 잠시 주춤하는가 싶던 정혁은 새삼스럽지도 않은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제 허리를 꼬옥 감아쥔 다정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너른 등에 얼굴을 묻은 다정은 시큰한 콧등에 힘을 주고 눈물을 꾹 참았다. 그의 온기와 체취를 느끼고 있자니,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눈물이 되어 터진 둑처럼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유다정 울어?”

그가 물었다. 다정은 거세게 도리질을 쳤지만, 심정만은 오열을 퍼붓는 중이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그런 다정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그럼 오랜만에 나 좀 봐.”

매미처럼 그의 등을 끌어안고 놓지 않던 다정의 팔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마주한 다정을 물끄러미 보던 정혁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다정의 어깨가 연신 들썩였기 때문이다. 입술은 잇새에 꾹 물린 채로 눈시울을 타고 넘친 눈물이 설움에 상기된 뺨을 쉴 새 없이 적혔다.

가만 보면 유다정도 거짓말이 늘었다. 울지 않는다더니…….

정혁은 한숨 같은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설움에 들썩이는 어깨를 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 * *

다정과 나란히 차에 오른 정혁이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맞대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이렇게 보고 만지고 느끼는 순간들이 좋았다.


“장모님 보러 청주부터 갈래, 아니면 유시우 먼저?”

부리를 비벼대는 새처럼 보드라운 머리칼에 입술을 문지르며 묻자 다정이 깍지 낀 그의 손을 끌어와 제 뺨에 맞대었다.


“엄마한텐 미안하지만, 시우 먼저요.”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아들이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를 지경인데, 불효막심하다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었다.

정혁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 클리닉에 들러서 유시우 찾아다가 같이 청주 가.”

다정은 그게 좋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껏 수그린 그의 입술이 다정의 이마를 꾹 누르고 떨어졌다. 눈이 마주쳐서 다정도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춰 화답했다.

좋은 걸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이던 그가 이번엔 다정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러고도 몇 번인가 쪽쪽거리는 소리가 오고 갔지만, 누구도 운전석에서 핸들을 붙잡고 있는 김 기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그나마도 매일 얼굴을 보지 않았던가. 판사사칭으로 꼬투리가 잡힌 담당 경찰관이 특별한 면회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지만, 어쨌거나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봐 왔는데 어째선지 사선을 넘어 재회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함이 깃들었다.


 


“오 원장이 텐트 붕괴 사고 범인인 건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다정이 문득 의아해 물었다. 경찰서에서 얼핏 흘려듣기론 아동학대 건만이 아닌 다른 사고들도 오현아와 얽혀 있는 모양이었다.

정혁이 무심한 눈길을 내렸다.


“오현아 하수인이 불었어.”

“하수인이 누군데요?”

“유시우가 학대당했다고 했던 증인 중에 체육선생.”

다정이 헉, 소리를 삼켰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며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새삼 놀랄 일이 뭔가. 아이 몸에서 여러 차례 멍 자국을 보았다며 아이 엄마가 아이를 학대한 것 같다고 위증을 한 작자가 아닌가.

다정이 혐의를 벗을 수 있었던 건 정혁이 입수한 증거 때문이었다. 동영상 파일이었는데, 영상 속 내용이 그녀의 무혐의를 입증하고 있었다.


“참. 증인들이 사라져서 애를 먹었다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어디서 찾은 거예요?”

“그게 어디서 찾았냐면…….”

말꼬리를 늘이던 정혁은 이틀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저녁이었다. 유시우와 함께 저녁을 먹고, 목욕을 시켜 나와 잠옷을 입히고 엄마가 그리워 우울한 아들을 달래 잠자리에 들었다.

작은 등을 도닥여 주며 잘나가던 아빠의 소싯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잠시 유시우는 머지않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천사처럼 잠든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선 정혁은 그날 밤도 다정의 혐의를 벗기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수집한 자료를 보며 골머리를 앓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늦은 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다정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정혁은 수납장 모서리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턱을 문질렀다. 눈길은 자정이 다 되어 손님이랍시고 찾아온 중년 여자에게 향한 채였다.

일단 아는 얼굴이라 거실까지 불러들여 앉혀 놓긴 했지만, 정혁은 눈앞의 이 충성스러운 할머니의 심복이 영 의심스러웠다.


“윤 비서가 어쩐 일로?”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이 상황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인 듯 윤 비서도 어색하게 웃는다.


“차도 한 잔 안 주십니까?”

“나도 아직 이 집 손님이라. 이 시간에 차 마시러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닐 테고.”

바랄 걸 바라란 식으로 받아치자 윤 비서가 어쩌지 못하고 히죽 웃는다.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오래 고민하시다가 말씀하시길 ‘이 물건을 써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라고 하셨습니다.”

박 회장의 전언을 전하며 윤 비서가 테이블 위에 USB 메모리 카드를 내려놓았다.


“영상 속 인물의 행방은 제가 파악하고 있습니다. 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렇게 용건만 간단히 한 뒤 윤 비서는 아파트를 떠났다.

정혁은 의문의 USB 메모리 카드를 즉각 확인했다. 한편의 동영상이 담겨 있었는데, 몹시도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건들건들 눈에 띄는 걸음걸이 하며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것 역시 낯이 익었다.

얼마 전 제보받은 동영상 속 인물과 일치했는데, 그 영상이 별 쓸모가 없는 것에 반해 이건 대단한 쓸모가 있었다. 왜냐하면, 마스크에 꽁꽁 가려진 얼굴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인적 드문 주차장 쪽으로 걸어오며 모자를 벗는다. 연이어 마스크도 벗는다. 주차된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이었다.

박 회장이 운이 좋은 건지, 능력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여하튼 곰곰 영상을 보며 생각하던 정혁은 샐쭉 웃었다.


“반갑다 XX야…….”

그는 휴대폰을 쥐어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짧게 울린 신호가 끊기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윤 비서였다.


『네, 도련님.』

“이 새끼 어딨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