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증거 있어? (107/114)


107화 증거 있어?
2023.08.10.



“아우 뻑적지근해.”

선영이 뻐근한 목을 좌우로 늘렸다. 그간 현아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신경을 썼더니,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텐트 붕괴를 조사하는 경찰의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단순 사고로 종결이 날 일이었다.

경찰이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발 빠르게 주변 CCTV 영상을 모조리 수거해 폐기하라 지시했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박 회장 역시 사고가 맞는지 조사하겠다며 넌지시 언짢은 속내를 내비쳤었더랬다. 애지중지 금쪽같은 손자가 상했으니 까다로운 성정에 역정이 날 만도 했다.

하나 지금까지 아무 언질이 없는 걸 보면 할망구도 물증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지나고 보니 유다정을 아동학대로 엮은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동안 감정만 앞세우던 딸애가 이렇게나 머리가 비상했다니, 기특한 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칭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게 이슈화되지 않아 검찰송치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유다정이 실형을 면키는 어려울 거다.

외국으로 떠나란 지시를 어기고 잠적한 김영준이 말썽이긴 하지만, 모든 정황이 유다정을 완벽한 아동학대범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만약 형 집행이 유예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면 제 엄마에게 아이를 돌려주는 일 따윈 없을 테니 말이다.

하나 걸리는 건 박 회장이다. 애초에 자신은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하라지 않았던가. 그 말처럼 박 회장은 어떠한 직접적인 간섭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행보를 보면 도무지 누구 편인지 종잡을 수 없긴 했다.

검찰에 압력을 넣어 일을 빨리 진행 시켜 달라는 현아의 부탁을 묵살한 것부터 그랬다.

방송국에 사건을 제보해 일을 키우려던 선영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역시 박 회장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이었다. 도무지 협조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아무렴 어떠랴. 이제 현아의 결혼을 막아설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대로 애를 데리고 왔으니, 노인도 더는 왈가왈부 못 하겠지. 노인이라고 이번 일에서 자유로울 리 없으니까.


“우리 딸. 기분전환도 할 겸 엄마랑 백화점 갈래? 가서 마사지도 받고 지난번에 갖고 싶다던 까○○ 팔찌도 사자.”

“정말?”

모처럼 애정이 담긴 엄마의 목소리에 현아가 화색을 띠었다. 그러기도 잠시 그녀가 아쉬운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엄마 혼자 가. 오후에 경찰서에 가 봐야 돼.”

“경찰서? 거긴 무슨 일로?”

선영이 눈썹 한쪽을 삐뚜름하게 세웠다.


“무슨 진술이 더 필요하다나 봐. 제대로 엮어서 보내려면 협조해야지.”

마치 칼을 가는 것처럼 현아는 이번 일에 몹시 열심히였다. 마무리는 확실히 짓는 게 좋다는 생각에 이견이 없는지라 선영도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엄마도 같이 가.”

“엄만. 내가 애인 줄 알아? 나도 다 컸어.”

현아가 불만스레 눈을 치떴다. 그런 딸의 응석을 선영이 사근사근한 투로 받아 주었다.


“엄마도 잘 알지. 우리 딸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거. 알았어, 엄마는 뭉친 어깨나 풀고 있을 테니까 혼자 잘해 봐. 알았지?”

“걱정 마. 말 몇 마디로 경찰들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니까.”

현아가 별것 아니라는 듯 으스댔다. 선영은 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준 뒤 원장실을 나섰다.
 

 

* * *



“오현아 씨, 변호사는 부르지 않은 겁니까?”

경찰서에 도착한 현아에게 사건 담당 형사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현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일에 무슨 변호사가 필요해요? 나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뭐 좋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현아는 손에 든 핸드백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며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아 비틀었다.

어두컴컴한 방. 녹화 카메라가 돌아가고 한쪽엔 영화에서나 보던 거울 벽이 있었다.

마치 범인처럼 취조를 받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별로라 현아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일정이 있어서 자리를 오래 못 비워요. 그러니까 빨리 끝내 주세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담당 형사는 느긋하게 제 할 말만 했다.


“사건이 있던 시각에 말입니다. 피해 아동이 있던 토끼반에서 원장실로 향하는 동선까지의 CCTV가 모두 고장 나 있었는데, 그 사실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나요?”

“아뇨.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현아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럼 언제 알았습니까?”

“그야, 사건이 있고 나서 관리실에서 따로 전해 들었…….”

무심코 대꾸하던 현아는 뭔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형사님. 참고인 조사를 하는 거예요? 아니면 범인 취조를 하는 거예요?”

현아가 따져 물었다. 그에 담당 형사가 뭔가를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취조실 문이 덜컥 열렸다.

그 문으로 등장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잠시 현아가 반색하며 튀어 나갔다.


“오빠! 오빠가 웬일이야? 현아 보러 왔어?”

정혁의 무감한 눈길이 제 팔을 꼭 끌어안고 매달린 형체로 향했다. 정말이지 언제봐도 오현아는 한결같이 꿋꿋했다.


“그냥.”

대충 둘러대며 그는 현아의 손을 슬쩍 뿌리쳤다. 그 무정한 태도에도 현아는 굴하지 않았다.


“형사님. 단둘이 얘기 좀 하겠습니다.”

“네, 녹화는 중지하겠습니다. 잠시 나가 있을 테니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사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담당 형사가 자리를 피하듯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정혁은 현아의 맞은편 빈자리에 적당히 몸을 기대었다.


“정말 그냥 왔다고? 원하는 게 있어서 온 게 아니라?”

뻔하다는 듯 현아가 새초롬하게 그를 떠본다. 정혁은 맞장구를 쳤다.


“글쎄, 그럴지도.”

느릿하게 팔짱을 낀 현아가 턱을 살짝 비틀어 곧추세웠다. 입가엔 승리감에 도취된 웃음이 번졌다.


“미안하지만, 오빠가 원하는 건 들어주기 곤란해.”

“내가 원하는 게 뭔데?”

“그야 뻔하지. 그 여자 풀어 달라고 온 거잖아.”

정혁이 비식 입꼬리를 휘었다.


“맞아. 유다정이 풀려났으면 좋겠어. 근데, 그 여자를 유치장에 집어넣은 게 마치 너인 것처럼 말하네?”

“어……?”

현아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정혁은 등받이로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아니, 꼭 그 여자한테 누명 씌운 게 너라고 자백하는 거 같아서.”

“무, 무슨 소리야? 넘겨짚지 마!”

“그나저나 네 남자친군 요새 뭐 해?”

“나, 남자친구라니?”

진심으로 당황한 현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노는 사이였나?”

“오빠, 정말 왜 이래? 난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순간순간 당황과 흥분을 감추는 게 쉽지 않았지만, 현아는 얕은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정혁의 입가에 낙낙한 미소가 물렸다. 상체를 기울인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뭘 그렇게 정색해? 지금부터 더 놀랄 일만 남았는데.”

“노, 놀랄 일……?”

정혁은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으슥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현아. 넌 네 입으로 아무것도 자백하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지금부터 내가 모조리 밝혀 줄 테니까.”

숨을 멎은 현아의 동공이 크게 휘청였다. 정말 뭐가 나오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응?”

그때 몸을 바로 세우던 정혁의 팔꿈치에 쓸려 현아의 핸드백이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이런.”

정혁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잡다하게 쏟아져 나온 립스틱이며 콤팩트 같은 화장품을 벌어진 핸드백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가 팔을 뻗어 자그마한 약병을 집어 올렸다.

약병에 새겨진 문구를 향해 그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수면제?”

그 순간 헉! 소리를 삼킨 현아가 그의 손에서 잽싸게 약병을 가로챘다. 제 핸드백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수면진정제였다.


“네 거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빤히 보자 현아가 망설이다가 선수 쳐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그게 요즘 너무 힘들어서…… 알잖아. 오빠 때문에 나 힘든 거.”

“그래, 그랬구나.”

정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다시금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었다.


“참, 보여 줄 거 있는데.”

정혁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 팩을 꺼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새빨간 인조손톱이었다.

흠칫 동요한 현아는 긴장한 손끝을 꿈지럭거렸다. 지금 그녀의 손톱은 새로이 단장되어 있었지만, 저 빨간 인조손톱에 제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게…… 뭐야?”

순진한 척 구는 얼굴을 보며 정혁은 피식 웃는다.


“뭐긴? 네가 내 아들 꼬집고 할퀼 때 떨어져 나간 손톱이지.”

현아는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이 무의식중에 거울 벽을 슥 훑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현아는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오빠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그거 내 거 아니야. 봐봐, 내 손톱은 이렇게 멀쩡한걸…….”

현아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며칠 전과 완전히 달라진 손톱을 보며 정혁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러네.”

“그리고 그게 내 거라는 증거 있어?”

“그치. 근데 내가 이걸 줍고 보니까 말이야. 네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갖고 있던 게 생각나더라고. 왜, 그때 한 움큼 뽑았었잖아.”

말끝에 킥, 하고 웃음을 흘린 정혁이 주머니에서 또 다른 비닐 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붉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 몇 올이 엉킨 채 들어 있었다. 현아는 지난번 그가 제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던 일을 떠올렸다.


“그, 그래서 뭐! 죄 없는 사람한테 덮어씌우지 마!”

“그래, 죄 없는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면 안 되지. 그래서 내가 몇 가지 검사를 의뢰할 생각이야. 네가 이렇게 억울해하니까 어떡해? 결백을 밝혀 줘야지.”

“뭐……?”

“국과수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인조손톱 접착 면에는 손톱의 표피 세포가 남기 마련이래. 그거랑 머리카락이 유전적으로 일치하는지 검사할 수 있다더라고. 그리고 인조손톱에서 발견된 또 다른 DNA가 내 아들 피부조직하고 일치하는지도 알 수 있대. 검사해 보면 이 손톱 주인이 누군지 알겠지.”

현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머리카락도, 접착 면에 붙어 떨어져 나간 손톱 표피도 모두 제 것이니 DNA가 일치할 건 당연했다.

제 DNA가 나온 손톱 밑에서 아이의 피부 세포가 검출되면 어찌 되겠는가.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면 누구라도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할 거였다.


“아아아, 아니야!”

혼란스러워하던 현아는 테이블 위에 있던 비닐 팩을 냅다 낚아챘다. 그리고는 인조손톱을 꺼내 다급히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플라스틱과 기타 화학물질의 결합체는 그녀의 식도를 타고 꿀떡 삼켜졌다.

정혁은 황당함에 눈가를 찌푸렸다. 제 발이 저려 당황해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엽기적인 장면까지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실토하네. 고작 다섯 살짜리 애를 약물로 재우고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로도 모자라 아이 엄마에게 그 누명까지 씌운 게 오현아 바로 너라고.”

현아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약이라니……?”

“아까 그 처방 약. 네가 먹는 수면제라고 자백했잖아.”

“……?”

정혁이 그녀의 핸드백을 눈짓했다. 하얗게 질린 현아는 냉큼 핸드백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영장 없인 의료기록을 조회할 수 없을 텐데, 제 입으로 수면진정제를 처방받았다고 자백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니! 손톱은 사라졌어. 증거인멸에 성공했는데, 뭘 두려워하는 거야?

도도하게 다리를 꼬아 앉은 현아가 여유작작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오빠도 참. 방금 못 봤어? 증거도 사라졌는데, 뭘 어떡하려고?”

“증거는 사라졌지만, 자백은 들었잖아.”

“아까 녹화 중지한다는 말 못 들었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오현아. 방금 네 배 속에 들어간 거 말이야. 사실은 너무 오염돼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더라고. 참 그리고.”

정혁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조작하자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동학대범으로 경찰서에 처넣었거든요.』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건 제 목소리였다. 현아는 성자와 나눴던 통화를 떠올렸다. 그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아이참, 거짓말이죠. 어쨌든 콩밥 먹이는 걸로 결론지었으니까 앞으론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 알겠죠?』

현아의 얼굴이 부글부글 일그러졌다.


“뭐, 뭘 하자는 수작이야?!”

현아가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정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어째선지 악마의 미소처럼 차고 사악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취조실 문이 덜컥 열렸다.


“야! 오현아아앍!”

깜짝 놀란 현아의 어깨가 쭈뼛 섰다. 돌아보자 열린 문간에 선 여자가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슉슉 뿜어내고 있었다.

현아는 믿기지 않아 눈두덩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제 손으로 유치장에 처넣은 그 유다정이 분명했다.


“뭐, 뭐야 너?! 어떻게 나왔어?”

다정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자 얼뜬 얼굴로 굳어 있던 현아가 놀라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날렵한 무언가가 허공을 가른 건 순간이었다. 그리고 코앞까지 날아든 형체가 뭔지 인지한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다.

짜악!

매서운 손바닥이 현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