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싸가지 없는 X
(10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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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싸가지 없는 X
2023.08.06.
제법 목이 탔던지 정애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설마 집이 비었을 줄 모르고 딸네 집에 왔다가 족히 집 밖에서 두 시간 가까이나 기다려야 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던 정애가 소파에 풀썩 몸을 앉히고 다리를 콩콩 때렸다. 그러자 눈치 빠삭한 시우가 냉큼 소파를 기어올랐다.
“할머니. 시우가 다리 주물러 줄게요.”
그러고는 고사리손으로 할머니 다리를 꼭꼭 주무른다.
“우리 강아지. 할미 다리 주물러 주는 겨?”
신통방통해 죽겠다며 정애는 흐뭇해 어쩔 줄을 몰랐다. 별다른 내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런 정애를 지켜보는데 정혁은 기분이 이상했다.
뭐랄까. 그 역시 생소했으나 굳이 표현하자면 죄스러운 마음이 든달까.
“전화를 하시죠.”
미리 연락을 주었더라면 어떻게든 대처를 했을 거다. 그럼 지금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애미한테 전화를 혔지. 수도 없이 혔는데, 안 받는 걸 워쩌?”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 있지만, 생전 그런 일이 없어 정애는 가슴이 철렁했더랬다. 딸애하고 사나흘씩 연락이 안 되니 무슨 일이 있지 싶어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그쯤 했는데도 정혁의 입에서 딸애 얘기가 나오지 않자 정애의 눈길이 시우에게 향했다.
“아가, 네 애미는 어딜 간 겨?”
“엄마? 어! 엄마 경찰서!”
시우가 천진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정애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린다.
물론 내 딸이 경찰서를 가도 일이 있어 갔겠지, 험한 일로 갈 거란 생각은 안 하는 터라 크게 대수로워하진 않았다.
“경찰서? 애미가 경찰서에 있다고?”
정애가 다소 의아한 투로 재차 확인했다. 이번엔 정혁이 나섰다.
“경찰서…… 때문에 지방에 갔어요. 그쪽에 경찰서 건물이 새로 들어설 예정이라 시찰을 간다면서…… 저한테 유시우 맡기고…… 며칠 걸린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려니 여간 낯간지러운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천진함을 가장해 유시우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릴까 열심히 눈을 맞추고 텔레파시를 쏘아 날렸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벙긋대는 듯도 했으나 시우는 이내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는 일에만 전념했다.
재주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둘러대고 본 건 백 가지쯤 나열했던 다정의 당부 때문이었다.
‘혹시, 엄마가 캐물으면 적당히 둘러대 줘요.’
정애는 이번에도 별스럽지 않게 반응했다.
“잉? 그려? 근데 전화는 왜 안 되는 겨?”
“아마…… 지방이라서 그럴 겁니다. 엄청…… 산골짜기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나 별다른 의심 없이 정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고야, 내 정신 좀 봐. 자네 밥은 먹었나?”
“아뇨. 배고픕니다. 유시우도 배고프대요.”
“그려어? 내 강아지 배가 고파 워쩌?”
끙차 일어난 정애가 바리바리 싸 온 보자기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 * *
푸짐하게 한 상 차려 저녁을 들고 머지않아 시우가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할머니! 시우랑 코하고 가요.”
“아이고, 할미는 가야 써.”
며칠 엄마 품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시우가 평소답지 않게 떼를 썼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혁이 장단을 맞췄다.
“주무시고 가세요. 아침에 모셔다드리라고 할게요.”
“아녀, 내가 가만 생각해 본께 장독 뚜껑을 죄 열어놓고 온 거 같어.”
정말 그래서인지 혹시 비라도 올까 봐 정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연신 힐끔거렸다.
정혁은 극구 돌아가겠다는 정애가 걱정스러웠다. 박 회장에 비하면 정애는 젊은 축에 속했지만, 그래도 노인이었다. 노인 혼자 먼 길을 오가는 데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정애가 빈 반찬통을 챙기는 사이 정혁은 시우를 데리고 살그머니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유시우 휴대폰 할머니 주자.”
“어……?”
시우가 반원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고민스러운 눈치라 재깍 설득 들어간다.
“할머니는 혼자 살잖아. 안 그래도 허리 아픈데 넘어지면 어떡해. 캄캄한 시골이라 촛불도 켜고 아궁이도 떼야 해서 불날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떡해?”
“어! 119!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그렇지. 근데 휴대폰 없으면 119에 전화도 못 하잖아.”
“어…… 그럼 큰일 나는데.”
시우가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걱정스레 눈을 빛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 유시우 거 할머니 줘. 불나면 119에 전화는 해야지. 유시우 건 또 사 줄게. 어때?”
설득의 기술에 넘어간 착한 손자는 그렇게 제 휴대폰을 할머니에게 흔쾌히 양보했다.
손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애는 기어이 신을 구겨 신었다. 장모를 배웅하느라 정혁도 시우와 함께 주차장으로 나섰다.
“잘 모셔다드려요.”
“알겠습니다, 전무님.”
마침 김 기사가 퇴근 전이라 싫다는 정애를 제 차에 반강제로 태웠다. 손짓하자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정애가 얼른 들어가 보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그 틈으로 시우가 작은 종이가방을 밀어 넣었다.
“할머니, 이거!”
“이게 뭐여?”
정애가 종이가방을 벌려 본다. 휴대폰과 충전기가 들어 있었다.
“어…… 스마트폰! 시우 꺼 할머니 줄게요. 아프면 병원에 전화해야 되니까!”
정애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린 게 기특하기도 했다.
“아유, 됐어. 할미가 이런 걸 워따 쓴댜.”
“가지고 가세요. 이따가 전화드릴게요.”
정혁이 거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정애는 그러마, 고개를 끄덕이곤 쌀쌀한 밤공기에 다시 한번 손을 휘휘 저었다.
“내 강아지 감기 걸릴라, 어여 들어가게.”
“네.”
정혁이 한 걸음 물러나자 차가 서서히 굴렀다. 시우는 멀어지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 빠빠이!”
* * *
“대체 어딨다는 거야?”
휴대폰 화면에 눈길을 박은 현아가 스크롤을 바삐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선영도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변 국장이 분명 오전이랬는데…….”
SBC 보도국장인 그의 말에 따르면, 분명 오늘 자 뉴스 메인에 뜰 예정이라고 했다.
선영이 그 사건을 제보한 건 일을 크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아동학대 사건이라 하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고 보는 국민 정서상, 이슈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해 부모를 엄벌에 처하란 글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도배가 될 테고, 여론은 연일 시끄럽게 입방아를 찧어 댈 테지.
여론의 뭇매에 못 이겨 검찰이 자연스레 개입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변 국장의 말과 달리 뉴스 포털사이트 어디에도 해당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선영은 변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 국장님. 오늘 뉴스 뜬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강 여사. 그 사건 뭡니까? 단순히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맞아요?』
변 국장의 말투가 하마터면 똥 밟을 뻔했다는 투다. 선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건 기사로 써서 데스크에 올리기 무섭게 아주 혼쭐이 나서 그럽니다.』
“혼쭐이 나요? 국장님. 당최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명한그룹에서 압력이 들어왔어요. 그 기사를 내보내면 광고를 모조리 끊겠답니다!』
선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명한 쪽에서 매스컴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고? 누구지? 차 전무? 아니면 박 회장인가?
“그, 그래서 기사를 안 내겠단 말이에요?”
『어쩝니까? 내 모가지는 지켜야지.』
“이봐요, 변 국장님. 광고는 한송 쪽에서도 끊을 수 있어요.”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나 참, 마음대로 하슈. 명한이냐 한송이냐, 골라야 할 판이면 명한 쪽 동아줄 붙잡고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나이에 비해 팽팽한 선영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때 강 건너 불구경하던 현아가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또 어딜 가려고?”
“쇼핑이나 할까 하고. 네일도 좀 받고.”
현아가 손을 내보이며 인조 손톱이 떨어져 나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만 보면 온갖 사고는 저가 쳐 놓고 천하태평이었다. 그래, 다른 걸 한다고 방방 나서는 것 보다는 차라리 쇼핑이나 하며 얌전히 구는 게 백번 낫다.
“딴 짓거리하지 말고 얌전히 쇼핑이나 하고 와.”
세상 태평하게 돌아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선영은 아픈 골치를 감싸 쥐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자꾸만 엇나가는 딸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딸이 저지른 일의 조력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걸.
그래서일까. 선영은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현아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는 건지 그 목적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처음엔 또렷한 목적이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 홀린 약혼자의 마음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를 앗아간 여자를 향한 미움과 증오가 몸집을 부풀렸고 그럴수록 목적도 흐릿해져 갔다.
정혁을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지금껏 무얼 위해 달려왔는지 목적과 이유조차 불분명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제가 꽃밭이라 믿었던 것들이 부서지고 나자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이젠 질주하는 방법밖엔 몰랐다. 그것이 마치 삶의 의무나 되는 양.
네일 팁을 제거하고 손톱 기본 관리에 들어갔을 때였다.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파전집 여자」
퉁명한 눈길로 발신자를 확인한 현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어머니임― 하고 콧소리를 내며 곰살맞게 굴던 며느리는 더 이상 없었다.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에도 굴하지 않고 성자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새아가 오랜만이구나. 통 소식이 없어서 전화 한번 해 봤어.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목소리 들으면 모르세요? 잘 지냈겠죠.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어요? 그냥 잊고 사세요.』
몰라보게 달라진 현아의 태도에 성자는 기가 막혔지만, 휴대폰 너머로까지 내색을 비치진 않았다.
“어머, 얘. 그나저나 미안해서 어떡하니? 내가 어떻게든 그 애를 쫓아내려고 했는데 글쎄, 네 말대로 찰거머리가 따로 없더라.”
『됐어요. 어차피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아 제가 알아서 했어요.』
싸가지 없는 X. 하고 성자가 입 안에서 욕설을 굴렸다.
“알아서 했다고? 어떻게?”
『아동학대범으로 경찰서에 처넣었거든요.』
현아가 통쾌한 웃음을 흘렸다. 성자는 조금 놀랐지만,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머머! 걔가 애를 학대했대?”
『아이참, 거짓말이죠. 어쨌든 콩밥 먹이는 걸로 결론지었으니까 앞으론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 알겠죠?』
엉큼한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뚝 끊겼다. 통화를 마치고서야 성자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탄식을 뱉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다.
아들 녀석에게 쫓겨난 이후 성자는 다시금 다정의 아파트를 찾았다. 며칠 같이 지냈다고 이상하게 손자 얼굴이 눈에 밟힌 까닭이었다.
집으로 들이닥친 건 아니고 아쉬운 대로 손자 얼굴이나 볼까 싶어 주변만 어슬렁거렸더랬다.
한데 웬걸. 손자가 아파트를 걸어 나오는데, 제 엄마가 아니라 아빠 손을 잡고 있지 뭔가.
아이 엄마가 그리 적대적이지 않으니, 우연히 마주친 척을 하고 손자에게 말이라도 붙이고 까까라도 하나 사서 쥐여 주고픈 마음이었다.
그런데 애 엄마가 아니라 서슬 퍼런 아들놈이랑 같이 있어 근처에도 못 가고 여러 차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는 말이 사실이면, 아주 호되게 일을 치른다는 말인데.
“아유, 이를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