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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잡았다 (105/114)


105화 잡았다
2023.08.03.


예상 밖의 전개에 다정은 뒤룩 눈알을 굴렸다.

노인과 처음 마주친 순간 시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은근히 긴장한 까닭이었다.

제가 없는 틈을 타 시우에게 무슨 일을 벌이면 어쩌지? 하는 기우였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한시름 놓았지만, 역시나 이 같은 전개가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다정은 태도를 바르게 한 뒤 다시 한번 진중하게 못을 박았다.


“회장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차정혁 씨랑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 글쎄, 그러니까 왜에!

박 회장은 답답함에 쩍 입맛을 다셨다.


“내 보기에 그만하면 내 손자 인물이 못 봐 줄 만큼은 아닌데…….”

살짝 떠보는데 다정은 꿍꿍이 하나 없이 진솔하기만 했다.


“아무렴요. 손자분 같은 얼굴이 어디 흔한가요?”

외려 명랑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니까 박 회장은 더 약이 올랐다. 그녀가 목을 큼큼 다듬는다.


“우리 그룹 시가총액이 850조쯤 된다. 나 죽으면 그게 다 누구 거겠니?”

850조? 도무지 현실성 없는 숫자라 쉽게 와닿지는 않지만, 일단 놀라는 척은 해 본다.


“우와, 어마어마하네요. 차정혁 씨는 좋겠어요.”

그러고는 또 배시시 웃는다. 탐탁하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에 박 회장은 절로 한숨이 터졌다.


“이리 답답해서야. 뭐 때문에 내 손자를 걷어찼느냐 묻는 거다!”

버럭 호통치듯 질문을 던지고는 박 회장이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다정을 응시했다.

어떻게 하면 내 손자처럼 잘난 애를 퇴짜 놓을 수가 있지? 진심으로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박 회장의 이런 반응은 다정에게 적잖은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정은 어리둥절해 눈만 깜빡거렸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같은 표정으로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회장님은 저 싫어하지 않으셨어요? 손자분하고 제가 결혼하길 바라지 않으시잖아요.”

순간 박 회장의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색 잔치가 열렸다. 아무래도 정곡을 제대로 찔린 모양이다.


“다, 당연하지! 네깟 거 백 트럭을 준들 내가 눈이나 깜짝할 것 같으냐! 너 같은 거한테 줄 바에야 그 녀석 혼자 늙혀 죽이고 말지!”

“……네, 그러니까요.”

선선히 수긍하며 다정은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손자에 대한 노인의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손자는 일생을 통틀어 그녀가 만든 것 중 가장 가치 있고 훌륭한 걸작이었다. 하니 길 가다 차이는 돌멩이 같은 다정에게 내주기엔 아까울 수밖에.

어쨌든 손자를 허락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면서, 내 손자를 퇴짜 놓는 건 또 용납이 안 되는 거다.


“글쎄! 이유가 뭐냐고 묻잖니!”

박 회장이 이유를 추궁했다. 조금 당황해하며 굳어 있던 다정은 저도 모르게 그만 쿱,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에 노인의 눈살이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왜 웃니? 늙은이가 우스운 게야?”

다정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차정혁 씨가 할머님을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다정은 박 회장을 참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노인이 어떤 인물인가.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만인에게 존경받고 그들을 아우르는 기업 총수이며 이 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함은 물론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산증인이다.

말인즉 몸집은 왜소해도 모진 풍파를 이겨낸 거대한 산과도 같은 존재란 거다.

당연히 보통 사람과는 다를 거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세상에서 자기 손자가 최고인 줄 아는 그냥 평범하고 꼬장꼬장한 할머니일 뿐이었다.


“그 녀석이…… 그러더냐? 날 좋아한대?”

박 회장이 의외인 기색으로 되물었다. 다정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설마 모르셨어요?”

“모르긴 왜 몰라! 내가 할미고 저가 손잔데 당연히 좋아하겠지!”

버럭거리며 우격다짐 식으로 내뱉지만, 어감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며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노인이 멋쩍은 투로 꿍얼거린다.


“녀석도 참. 그런 말을 다 하고…….”

“입 밖으로 그런 말 할 성격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냥 평상시에 그렇게 느껴졌어요.”

다정의 얼굴에 상냥한 웃음이 번졌다.

아이를 달라며 대단한 기세로 위압을 부릴 땐 야속한 마음이 컸었다. 당시에는 당장이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우를 빼앗아 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서러워서 투덜투덜 손자에게 노인의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결코 자기 할머니를 욕하는 일은 없었다.

그건 아마도 그에게 있어 노인이 감싸고 보듬어야 할 소중한 가족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겉으로야 철의 여인인 척해도 오직 해바라기처럼 손자만 바라보고 있는 헌신적이고 따스한 할머니인 걸 알기에 더더욱 그녀를 미워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발칙한 것. 늙은이를 놀리는 게야?”

박 회장의 눈총이 날을 세웠다. 네깟 게 지레짐작으로 날 농락했냐, 뭐 그런 눈초리였다.


 
어째선지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먼 곳을 쏘아보고 있던 박 회장이 별안간 에헴, 하고 헛기침을 쏟는다.


“듣자니 어려운 상황에 있는 모양이구나.”

이제야 겨우 두 사람이 경찰서장의 방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언급되었다.


“그렇게 됐어요.”

다정은 애써 웃으며 긍정했다. 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다 떠나 그저 하루라도 빨리 시우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뿐이었다.


“내게 바라는 건 없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련.”

선심을 베풀 수도 있다는 말투지만, 박 회장은 외려 싸늘한 태도를 유지했다. 딱한 처지에 동정심이 일지만, 다정에게 마음이 동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페어플레이해 주세요.”

“…….”

노인이 뭔 소리냐는 듯 힐끗 눈길을 들어 올린다. 다정은 또박또박 뒷말을 붙였다.


“제가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시우를 데려가신다거나 하는 비열한 일은 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물론 제가 나갈 때까지 손자분이 잘 지키고 있겠지만요.”

“이이이, 고얀!”

애써 좋게 봐주려 해도 꼭 이런 식이다. 하는 말마다 아주 뒷덜미를 움켜쥐게 할 만큼 당돌했다.

박 회장은 끙, 하고 불편한 심기를 삼켰다.

물류회사 지분도, 빌딩 한 채도 혼수로 싸 들고 올 주제가 안 되는 아이였다. 그만큼 쥐뿔도 없는 애한테 손자가 아까운 건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런데 저가 먼저 결혼을 안 한다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괜한 안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었다.

* * *

다정이 도면을 그리는 작업공간이던 식탁은 이제 정혁의 업무용 책상으로 둔갑해 있었다.


『동영상 하나 보내겠습니다. 텐트 사고 피해자 중 한 사람에게서 지금 막 제보받은 영상입니다.』

민 실장의 말을 묵묵히 경청하던 정혁의 눈길이 반짝 올라섰다.

기다리던 건 맞는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이라 조금 뜻밖이었다.

그때 그 일이 진짜 사고가 맞는지 의심하던 박 회장과 마찬가지로 정혁도 그 일을 우연한 사고라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가진 게 많고 자신들이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우연도 우연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법이다. 당연히 심증적으로 짚이는 범인도 있었다.

그에 경찰 쪽과는 별개로 조사를 했다. 증거를 입수해야 했으니까. 주변 CCTV를 뒤지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 목격자가 없는지 일일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실마리는 잡지 못했다. 수사를 종결짓지 못한 건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차츰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니, 뜻밖이면서도 반가울 수밖에.

잠시 기다리자 휴대폰으로 영상이 전송되었다는 알림이 울린다. 정혁은 지체하지 않고 영상을 재생했다.

유치원 체육대회 때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를 촬영한 동영상이었는데, 당근색 텐트가 바라다보이는 방향이 배경이었다.


『보고 계십니까?』

“보고 있어요. 딱 걸렸네…….”

눈가를 가늘게 좁힌 그가 감탄스럽게 중얼거린다.

영상에는 텐트 붕괴가 우연한 사고가 아닌, 누군가의 계획적 범죄로 벌어진 사고란 증거가 담겨 있었다.


『하나야. 엄마 봐야지?』

엄마의 목소리에 보글보글한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활짝 웃는다. 그 뒤로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잡혔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텐트를 지지하는 프레임 근처를 서성인다.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사고 직후엔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다가 어젯밤에야 비로소 영상을 떠올리고 살피던 중 수상한 남자가 포착된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모서리 부분의 철제 기둥에서 안전핀을 제거했다. 사고 후 업체 측에서 안전핀이 사라졌다는 진술과 맞아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잡았다.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걸 잡았다고 할 수 있나?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쓴 걸로도 모자라 검은 마스크에 손에는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체육대회가 벌어지는 장소인 걸 감안하면 몹시도 눈에 띄는 행색인데 어떻게 아무도 의심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얼굴 잡히는 영상은 없어요?”

『네, 사고가 아니라는 건 밝혀졌는데, 이것만으론 범인을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경찰에 넘길까요?』

“아니. 써먹을 데가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 더 있어 봐요.”

통화를 마친 정혁은 영상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1분 남짓한 영상을 반복해서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남자의 건들거리는 특유의 걸음걸이. 분명 어디서 봤는데…….

* * *



“도착했습니다, 전무님.”

김 기사가 클리닉 앞에 안정적으로 차를 대고 말했다. 정혁은 차내 디지털시계로 눈길을 돌렸다. 얼추 딱 끝날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드나든 지 사흘 정도 되니까 이젠 건물 구조도 익숙했다.

코너를 돌자 방문들이 복도 좌우로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치료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 교실이었다.

마침 끝 쪽 방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작은 형체가 튀어나온다. 휙 돌아서더니 깍듯하게 배꼽 인사까지 한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시우야, 아빠 오셨나 봐야지?”

선생의 말에 시우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 돈다. 눈이 마주쳐서 피식 웃었더니 자그마한 유치를 활짝 드러내고 웃는다.


“아빠 왔어요! 안녕히 계세요.”

“시우도 안녕. 내일 또 만나자.”

시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선생이 멀리 눈길을 던져 학부형과도 눈인사를 나눈다.


“아빠아!”

씩씩하게 소리친 시우가 오도도 달려들었다. 아이의 기대처럼 번쩍 안아 들고 공중에서 3회전을 해 주면 좋겠지만, 외팔이인 관계로 정혁은 무릎을 굽혀 품으로 뛰어든 아이의 등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오늘 어땠어?”

“어…….”

고개를 갸웃한 시우가 한숨을 쉰다. 아빠의 질문은 좀 추상적이라 귀찮다.

예를 들면 엄마는 ‘우리 시우,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재미있게 놀았어요?’라며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질문했기에 대부분 ‘네.’라고 간단히 대답하면 끝이 난다.

반면 아빠는 질문하고자 하는 의도를 모르겠어서 대답을 고민해야 할 때가 많았다.

어땠더라? 떠올려 본 시우는 결국 주절주절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할 즈음 시우는 교육용 영상으로 보았던 애니메이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또롱이가 과자를 이만큼 훔쳐 먹었어요. 그래서 조금 있다가 방구를 뿡뿡했는데, 친구들이 다 도망갔어요.”

시우가 작은 콧방울을 꼬집어 쥐며 이히히, 하고 웃는다.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정혁이 물었다.


“저녁 뭐 먹을래?”

“어…… 짜장면?”

“짜장면?”

정혁은 눈썹을 으쓱하면 잠시 고민했다. 만만한 게 자장면이긴 한데, 문제는 이틀 전에도 먹었단 거다.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아들 걱정을 하고 있을 다정을 생각하면 배달 음식을 자주 먹이는 게 조금 양심에 걸렸다.

철창을 붙잡고 한 다정의 당부들이 메아리처럼 귓전을 울리는 것도 한몫했다.


‘평상시에 변비 있어서 힘들어해요. 그러니까 매일 아침 먹기 전에 유산균 먹이는 거 잊지 말아요. 응가 누는 습관도 들여야 하니까 아침 먹고 조금이라도 변기에 앉아 있게 해요. 안 그럼 종일 컨디션이 안 좋거든요. 참! 잠자기 전엔 키 성장 영양제도 꼭 먹여요. 그리고…… 환절기라 습도 유지 잘해 줘야 해요. 가습기는 매일 깨끗하게 씻어서 틀어요. 자고 일어나면 코를 찡긋거릴 때가 있어요. 건조해서 숨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 그럴 땐 면봉으로 코딱지를 파 줘요. 가끔 많이 건조하면 코피가 날 수도 있는데,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면봉으로 보습제를 살살 발라 주면 돼요. 그리고 또…….’

대략 백 가지 정도 당부를 들은 것 같은데, 응가와 코딱지가 인상적이었던지 그 밖의 것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혁은 시우와 손을 잡고 걷다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내린다.

오늘은 응가를 누지 못했는데, 깡충거리는 게 생각보다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모른다.

애들이 얼마나 변덕스러운데. 이렇게 잘 놀다가 언제 어디서 갑자기 컨디션이 뚝 저하될지 모른다.

아이가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예고도 없이 수시로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살다 살다 제 평생 아침마다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힘을 주는 누군가를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일련의 과정을 사운드 하나 빼놓지 않고 생생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강아지 똥 누는 것도 애써 보려 하지 않는데, 요즘은 제 자식이 똥 누는 걸 자연스레 관찰하고 있는 게 일상이었다.


“짜장면은 다음 주에. 오늘은 건강식으로 먹어. 식이섬유 많은 걸로.”

그렇게 식단을 정하고 정면으로 눈길을 향할 때였다.


“차 서방 이제 오나?”

문 앞에 쪼그려 앉았던 노인이 아이고,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에 정혁은 발길을 우뚝 멈춰 세웠다.

반대로 시우는 깡충거리며 달려 나갔다.


“할머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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