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보고 싶다 (103/114)


103화 보고 싶다
2023.07.27.


손자와 증손자가 돌아간 뒤 박 회장은 한동안 뭔가에 골몰해 있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윤 비서가 그녀 앞에 허브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회장님. 꼬마 도련님은 그냥 그렇게 보내시는 겁니까?”

곰곰 허공을 주시하던 박 회장의 눈길이 올라섰다.


“제 아비가 데리고 갔는데 낸들 어째? 할미 집에 잠깐 놀러 왔구나, 했지. 오래 끼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현아에게 전화가 걸려 와 자초지종을 전해 듣기 전만 하더라도 박 회장은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학대했다나 봐요. 아이 몸에 매 맞은 흔적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 소릴 들었을 때 박 회장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누가 학대를 해? 그 애가 제 자식을 때렸다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

이 나이쯤 되면 눈앞은 침침해도 사람 보는 눈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콩으로 메주를 쑤었대도 못 믿을 소리였다.


“따로 등록된 친인척도 없고 해서 제가 임시 보호를 한다고 했는데, 곧 할머니께 인계될 거예요.”

한 건 했다는 듯이 의기양양 말하는 목소리를 듣자 더욱 기가 찼지만, 어린 걸 데리고 온다니 일단은 박 회장도 몹시 기다려졌다.

머지않아 경찰과 관련기관의 담당자들이 증손을 데리고 저택을 찾았다.

언젠가 할미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에 혹시나 하여 준비해 놓은 방인데,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훌쩍거리는 와중에도 박 회장을 알아본 시우는 허리 접어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길래 오냐, 하며 박 회장은 조심스레 아이의 몸을 살폈다.

그랬더니 글쎄, 꼬집혀 멍들고 손톱에 할퀸 자국이 여린 피부에 낭자한 게 아닌가. 그 꼴을 보는데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숨이 턱 막혔다.

뒤이어 현아가 도착하기 무섭게 박 회장의 추궁이 시작되었다.

현아는 모든 걸 체념한 채 이실직고했는데,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여야지 그냥은 못 넘어가겠지 뭔가.


“그럼 꼬마 도련님을 데리고 오실 생각이 아니셨던 겁니까?”

윤 비서는 박 회장이 증손을 너무 쉽게 내어준 게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데리고 와야지. 한데 방법이 틀리지 않았니. 그 애가 제 손으로 데려와 어린 걸 안겨 주고 떠나면 모를까. 애초에 될 일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별하지 않습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는댔다. 이건 특별한 게 아니라, 벼랑 끝에 세운 형국이지. 경찰서만 나와 보렴. 득달같이 달려와 제 새끼를 내놓으라고 할 애야.”

“유다정 씨가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애가 그럴 애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윤 비서 자네도 알잖아. 죄가 없으니 나올 테지.”

“현아 양이 부탁했던 대로 강 부장검사한테 연락을 넣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이를 데려왔으니, 검찰 쪽에 손을 써 쐐기를 박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실형을 살도록 하면 출소하더라도 전과가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돌려줄 일은 없을 테니, 윈윈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뚜렷한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감옥살이까지 시키누? 내 일평생 가지고자 하는 게 있다고 죄 없는 사람 인생을 망치는 짓은 안 하고 살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보다 자네도 아까 들었지?”

“네? 뭘 말씀이십니까?”

“그 애가 결혼을 안 해 준다지 않아?”

“아…… 예. 도련님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혁이 놈 말이야, 자네가 보기엔 어때?”

윤 비서의 눈알이 핑그르르 굴렀다.


“제가 그걸 판단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습니다만, 정혁 도련님이야 훌륭한 청년이 아닙니까. 경영 능력도 탁월하시고 장차 그룹을 이끌어 나갈 적임자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허면 여주댁이 보기엔 어때? 그 녀석 어디 모자란 데 있나?”

“아이고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우리 도련님이야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으시죠. 돈 많지, 인물도 훤하시지, 겉보기엔 부루퉁해도 어찌나 다정다감하고 자상하신데요.”

실제로 그랬다. 20년이 넘도록 이 댁 일을 돌봐온 여주댁이니 정혁의 어린 시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사내아이라 표현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다지 잘 웃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스리슬쩍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수고한다는 말을 대신하곤 하는 친절한 도련님이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다.


“아니, 근데 그 애는 왜 결혼을 안 한다는 게야?”

박 회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허공을 향해 의문을 드러냈다. 역정 같은 말에 윤 비서와 여주댁은 어리둥절 눈을 맞췄다.


“몰라. 매달려도 안 해 주고 애원해도 안 해 줘.”

아들이 보고 있지만 않으면 울기라도 했을 듯이 굴던 손자의 청승맞은 얼굴을 떠올리자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감히 내 손자를 애원하고 매달리게 해?

분노 서린 노인의 주먹이 팔걸이를 퍽 내리쳤다.


“고오―얀! 눈깔이 빠진 게 아니고서야!”

 

 

* * *

아빠의 커다란 재킷을 덮어쓴 시우는 자동차 시트에 강아지처럼 웅크려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작게 오르내리는 등을 조심조심 도닥이며 정혁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지금 당장 구속수사를 면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치원 관계자들의 고소 고발이 잇따랐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다정은 곧장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처럼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는 선량한 여자에게 누가 보더라도 가혹한 처사였다.

정혁은 손을 펼쳐 양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김 변. 내가 그따위 대답이나 듣자고 비싼 밥 먹고 당신하고 통화하는 줄 알아?”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한껏 예민해진 탓에 변호사를 향해 신경질적인 말투가 튀어 나갔다.


『최우선으로 구속적부심 청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뭘 해도 상관없으니까 꺼내기만 해.”

『아동학대와 관련된 사안은 조심스럽습니다. 워낙 까다롭고 민감한 사안이라 무죄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고서야 머리가 좀 아플 겁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잖아.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뭐가 더 필요해?”

『아무래도 아이들은 미성숙하기도 하고, 사법부는 아이의 말을 편파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대를 당했다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학대당하지 않았다는 말은 의심부터 하거든요. 부모가 두려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는 거죠.』

정혁은 크게 심호흡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여자가 일분일초라도 거기 있는 꼴 못 보겠어. 뒷일은 뒤에 처리해도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꺼내. 검찰로 넘어가더라도 무조건 불구속 기소로 끌어내란 말이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뭐가 되었든 당장 다정을 차가운 철창 밖으로 끌어내긴 불가능했다.

거칠게 통화를 종료하는 그에게 민 실장이 넌지시 위로를 전했다.


“변호인단도 동분서주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증인으로 나선 교사들을 만나 설득한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증인 신상은 확인됐어요?”

그에 민 실장이 파일철을 건넨다.

오현아와 더불어 학대로 의심되는 멍 자국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한 교사는 두 사람이었다. 모두 정혁이 아는 얼굴이었다.

사회 초년생이던 토끼반 담당 교사와 현아 주위를 늘 알짱대는 체육 교사.

박 회장은 나서지 않을 거다. 도와줄 거 아니면 방해나 하지 말라고 잔뜩 을러 놓고 왔으니, 설마 훼방을 놓지는 않을 거다.

무죄를 밝힐 수 있는 증거라…….

서류에서 눈을 뗀 정혁은 나른한 태도로 차창을 노려보았다.

심증은 차고 넘치는데 증명할 길이 없으니 답답하고 막막할 노릇이었다.

* * *

밤 10시를 넘긴 시각 도착한 곳은 한강병원이었다. 시우의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입구를 걸어 들어가자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차정혁. 여기.”

“어! 예쁜 누나, 안녕하세요!”

시우가 수경을 알아보고 꾸뻑 배꼽 인사를 한다. 낮잠을 길게 잔 탓인지, 밤이 늦었는데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시우도 안녕. 잘 지냈지?”

수경은 무릎을 짚고 시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헤집듯이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외삼촌한테 말씀드려 놨어. 올라가자.”

수경과 함께 원장실로 향하자 그녀의 외삼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병원 병원장이며 박 회장의 주치의였다.


“차 군. 오랜만이군.”

“네, 오랜만입니다.”

그가 악수를 청했지만, 정혁은 애석한 듯 깁스한 팔을 내보였다. 곧 죽어도 아들을 내려놓고 그와 악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멋쩍게 손을 거둔 김 원장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며 정혁의 무릎에 올라앉은 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마야. 반갑다.”

아빠 무릎에서 껑충 뛰어내린 시우가 즉각 배꼽 인사를 했다.


“어! 네!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응? 할아버지가 의사 선생님인 건 어떻게 알았어?”

“의사 선생님 옷 입고 있는데!”

손가락을 뻗은 시우가 하얀 가운을 가리켜 말했다.


“너 되게 똑똑하구나.”

칭찬을 받은 시우가 수줍어 배시시 웃는다.


“회장님은 별고 없으시지?”

“네, 방금 보고 왔는데, 노인네 아주 팔팔해요.”

한결같은 말버릇에 김 원장이 껄껄 웃는다.


“우리 수경이하고 Y일대 동문이라면서. 전혀 몰랐지 뭔가. 하하.”

“외삼촌. 그만하고 말씀드린 거나 빨리 해 주세요. 상황이 심각하다고요.”

“아아, 그렇지 참.”

김 원장이 유선 전화를 집어 들더니 내선 번호를 눌렀다.


“행정실장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 줘요.”

짤막하게 지시를 내린 그가 다시 정혁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런 사안으로 응급실에 가는 것도 그렇고, 준비해 뒀으니까 어려워 말고 필요한 검사가 있거들랑 다 받고 가게.”

“고맙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김 원장이 정혁의 무릎에 앉아 있는 시우의 뺨을 톡 건드린다.


“꼬마야. 너 큰일 났다.”

“어…… 왜요?”

“왕 주사 맞으러 가야 하니까.”

라며 김 원장이 개구쟁이처럼 킬킬 웃는다. 그에 시우는 얼굴이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 * *

서러워 죽겠는지 입술을 비죽이던 시우는 아빠 목을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팩 묻었다.


“유시우. 말 안 할 거야?”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과 콧잔등을 보며 묻지만 시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시우는 혈액과 DNA 검사를 위한 시료를 채취했다. 약물 반응을 포함해 여러 가지 검사 의뢰가 들어갔는데, 다정에게 건네받은 인조손톱 조각도 함께 넘겨졌다.

쪼그만 게 목청도 크지, 하나도 안 아픈데 주사를 왜 놓냐며 한바탕 대차게 울고불고 임상병리과가 떠나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대판 토라진 참이다.

야간이라 당직하는 선생만 있어 다행이지, 대낮이었다면 아무리 제 자식이지만 창피할 뻔했다.

정혁은 코알라처럼 매달려 토라진 시우의 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뱉었다.

집에 돌아와 유시우를 목욕시켜 나오자 자정을 훌쩍 넘겨 있었다. 제 아들이지만 애를 씻겨 본 건 처음인데, 몹시 색다른 경험이었다.

커다란 수건을 둘러 대충 물기를 닦이고 파자마를 입혀 침대에 눕히자 시우의 눈이 또랑또랑하다.

자정을 넘겼는데 오며 가며 열심히 쪽잠을 잔 덕에 막상 잘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린이용 침대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고 나란히 누워 정혁은 아들의 가슴을 도닥거렸다.


“어, 있잖아요…… 아빠, 엄마 언제 와요?”

제 아들이 엄마를 찾으니까 가슴이 묵직해졌다. 무엇보다 유다정이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떨고 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도 했다.

천장을 형광 빛으로 수 놓은 별님과 달님을 보며 정혁은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


“곧 올 거야.”

“내일?”

“그것보단 조금 더.”

“그럼…… 세 밤?”

“글쎄.”

확실하게 대답해 주고 싶은데, 어두컴컴한 밤처럼 막막함만 더해 갔다.


“엄마 보고 싶어요…….”

침울한 목소리에 정혁은 시우를 품에 꼭 안았다.


“나도.”

나도 보고 싶다, 유다정.
 

 
시우가 잠든 걸 보고 방을 나온 정혁은 다정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자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부드러운 공기가 몸을 감싸 안았다.

여전히 다정의 체취와 온기가 느껴지는데, 이 공간에 그녀만 없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마른세수를 하던 그는 잠시간 숨을 고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무심코 디딘 발끝에 뭔가가 툭 와닿는다.

정혁은 침대 아래로 튀어나온 상자의 모서리를 보다가 찬찬히 허리를 숙여 상자를 꺼냈다.

손때 묻은 상자에 새겨진 상호가 익숙했다. 오래되고 유명한 과자 상표였는데, 지금은 출시되지 않는 제품이었다.

설마 과자가 들었을 리 없고.

호기심에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던 그는 눈에 잡힌 내용물을 보며 호흡을 느리게 조절했다.

상자 속에서 발견된 물건은 얄팍한 수첩 하나와 두툼한 노트였다. 하나는 산모 수첩이었고 또 하나는 일기처럼 보였다.

산모 수첩을 펼치자 첫 페이지는 아기자기한 색의 펜과 스티커로 꾸며져 있었는데, 단연 눈에 띄는 건 중앙에 부착된 빛바랜 초음파 사진이었다.

알록달록하게 꾸며 놓은 것만 봐서는 아기를 가진 게 몹시 설레고 또 마냥 기다려지는 엄마만 같았다.

정혁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초음파 사진의 중앙에 찍혀 있는 작은 점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