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안아 주라 (102/114)


102화 안아 주라
2023.07.23.



 
아빠의 지시가 있자 시우는 재깍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 나서야 정혁의 눈길이 다시 박 회장에게 향했다.


“애 듣는데, 말조심해. 다 뒤집어엎기 전에.”

“이 녀석이……!”

정혁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길게 말 안 해. 애 엄마 꺼내.”

그러자 박 회장이 듣던 중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키우더니 뚝 잡아뗀다.


“죄지어 잡혀갔다지 않아? 한데 내가 무슨 수로?”

“할머니. 진짜 이러면 재미없어.”

박 회장이 미동도 없자 정혁은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친 그가 휴대폰을 쥐어 귀에 붙였다.

마침내 통화 연결음이 끊어졌다.


“나야.”

정혁은 박 회장을 빤히 주시하며 또박또박 뱉었다.


“시멘트 지분 전량 넘겨.”

그가 뱉은 첫마디에 박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미디어도 넘겨.”

박 회장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지금 뭘 하는 게야?!”

용건만 지시한 뒤 통화를 마친 그가 할머니의 호통에 휴대폰을 쥐어 보였다.


“보면 몰라? 7살 때 받은 생일 선물하고 초등학교 졸업식 때 받은 졸업선물 팔아치웠잖아. 고등학교 입학식 땐 뭘 받았더라?”

복수는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로 갚아 주는 거다. 노인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가 하면, 자신이 일군 것들이 다른 놈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통화목록을 뒤지던 그가 다시 휴대폰에 귀를 붙였다.


“나야, 지 상무. 용건만 말할게. 코스메틱 형 가질래?”

“정혁아!”

박 회장이 펄쩍 뛰었다. 진심으로 당황하는 노인을 향해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정혁은 능청스레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쫄리지? 내가 다 팔아치울까 봐.”

“너 이 녀석! 정말 이리 나올 게야?!”

박 회장이 노발대발했다.


“경고했잖아. 재미없다고.”

“난 모르는 일이다.”

박 회장이 모르쇠로 일관하자 정혁이 미심쩍게 눈가를 구겼다.


“모르는데, 유시우가 왜 여기 와 있어?”

“어미가 못 돌보면 아비가 돌보는 게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따지는 게야?”

“그러니까. 얘가 할머니랑 이모 삼촌이 몇인데, 서류에도 없는 증조할머니 손에 와 있냐고. 이런데도 시치미 뗄 거야?”

“아, 글쎄! 난 모른대도! 네 녀석이야말로 네 자식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게야? 이게 키워 준 보답인 게냐고!”

그 레퍼토리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여하튼 제대로 한 방 먹인 건 분명한 모양이다. 자존심 드센 박 회장 입에서 키워 준 은혜 운운하며 감정에 호소하는 소리가 나온다는 건 정말 할 말이 궁색하다는 거다.


“그렇게 싫거든 다 놓고 나가거라! 너도 네 아비처럼!”

노인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목을 잡고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그녀의 손자는 태평했다.


“싫어. 내가 왜?”

“뭐? 지금 뭐라고 하는 게야?”

“싫다고. 내가 미쳤어? 평생 이것들 다 갖자고 길러졌는데, 이제 와서 내가 다 버리고 뛰쳐나갈까 봐? 할머니는 자기 손자를 띄엄띄엄 보네.”

“하, 이 녀석이…….”

“그리고 할머니가 모르는 게 있는데, 나 경영하는 거 좋아해.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 잘하기도 하고 꼭대기에 앉아서 대장 놀이하는 것도 재밌어. 다 가질 거야. 돈이 있어야 처자식 고생 안 시킬 거 아니야. 안 그래?”

박 회장은 기가 찬 얼굴로 웃고 말았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하는 말마다 예쁜 말만 골라 하니 더 화를 내려 해도 입꼬리가 씰룩거려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공기는 훈훈해졌는데 청산유수 지껄이던 정혁의 낯빛은 돌연 무겁게 가라앉는다.


“할머니. 유시우한테 그러지 마.”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풀 누그러진 박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할미가 무얼?”

“나한테 하던 대로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강요하고 무섭게 구는 거.”

“…….”

박 회장은 손자의 말을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꼭 저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윽박지르고 강요하고 무섭게 굴다니. 어찌나 애지중지 귀하게 기른 손자인데…….


“나한테 하던 것처럼 애 듣는 데서 엄마 욕도 하지 마.”

“…….”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인형 취급도 하지 말고.”

“정혁아…….”

그제야 박 회장의 눈앞에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랬던가. 애정이라고 말하며 네 살짜리 아이를 엄격하게 다룬 건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혹여나 손자가 상처를 입었던 걸까.


“안 그래도 유다정이 결혼 안 해 줘서 미치겠는데, 할머니까지 속상하게 정말 왜 그래?”

협박을 해 대더니 갑자기 칭얼칭얼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 대목쯤 되자 박 회장의 귀가 쫑긋 섰다.


“……뭐, 뭘 안 해 줘?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애가 결혼을 안 해 줘? 왜?”

“몰라. 매달려도 안 해 주고 애원해도 안 해 줘.”

침통하게 얼굴을 감싸는 손자의 몰골이 처량했다. 박 회장은 뭘 잘못 들었지 싶어 귀를 문질렀다.

* * *

여러 방면으로 떠봤지만, 박 회장이 이번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물론 늘 그렇듯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식으로 한발 물러나 큰 그림은 보고 있었을 테지만.

노인을 바락바락 이겨 먹고 기어이 아들을 되찾아 온 후에야 정혁은 다음 행선지로 향할 수 있었다.


“경찰서로 가.”

시우는 아빠 가슴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무거운 눈꺼풀과 사투를 벌였다.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종일 시달린 탓에 어린 게 진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땅거미 가라앉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작은 등을 도닥거려 주자 천근만근인 양 무겁던 시우의 눈꺼풀도 스르르 가라앉는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솔이와 준호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만 전해 듣고 발만 동동 구르던 솔이는 시우의 몸에 난 자국들을 보자마자 오열부터 쏟았다.


“으아아앙! 우리 시우 괜찮아? 시우야, 누가 이랬어! 대체 누구야!”

“어……. 엄마가 안 그랬어요…….”

그 밖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었기에 시우가 아는 진실은 오직 그 하나였다.


“당연하지! 네 엄마가 왜 그런 짓을 해! 흐아아앙! 우리 다정이 어떡해앵!”

이모의 대성통곡에 겨우 그쳤던 시우의 눈이 다시 그렁그렁해지기에 정혁은 서둘러 경찰서를 향해 돌아섰다.

그 뒤를 털레털레 따라가며 솔이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으아아아앙! 우리 시우 어떡해엥! 우리 다정이 어떡해에!”

“솔이 씨, 진정 좀 해요.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다정 씨일 텐데, 솔이 씨가 이렇게 울면 다정 씨는 어떡해요?”

준호가 달래 보지만, 솔이의 오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 *



“미쳤어요?”

정혁은 담당 경찰관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어서 뭔가를 말하려 입을 벙긋대던 그가 도로 입을 다물고 제 팔에 안겨 있는 시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유시우, 귀 막아.”

이번에도 시우는 즉각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한결 안심이 된다는 듯 정혁의 눈길이 다시 담당 경찰관에게 향했다.


“이것 봐요. 다섯 살짜리 내 아들한테 철창에 갇힌 엄마를 보여 주란 말입니까?”

사정을 고려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이쪽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담당 경찰관이 허리에 손을 얹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애초에 피해 아동이랑 가해 범인이랑 대면이 불가능하다니까요. 이게 원칙상 안 되는 건데, 서장님이 편의 봐 드리라고 해서 특별히 조치하는 거예요. 아니, 아동학대로 체포된 범인을 아무 데나 풀어놓을 것 같으면 체포는 뭐 하러 한대? 쳇.”

그 대목에서 정혁의 눈가가 불편하게 일그러진다.


“이봐, 말 가려 해. 누가 범인인데? 당신들이 잡아간 사람은 피의자도 아니고 용의자일 뿐이야. 요즘 경찰들은 무죄추정의 원칙도 싹 무시하고 판결까지 내리나 보지? 판사 사칭은 범죄인 걸로 아는데?”

“판사 사칭이라뇨! 내가 언제요?!”

담당 경찰관은 펄쩍 뛰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남자한테 뭐든 꼬투리가 잡히면 인생 피곤해진다는 걸.

경찰관의 발뺌에 피식피식 실소를 흘리던 정혁이 눈길을 돌렸다.


“유시우, 방금 이 아저씨가 범인이라고 한 말 들었지?”

그의 물음에 시우가 동그란 눈을 연속으로 깜빡였다. 그러곤.


“어, 네! 아까 범인이라고 하는 거, 시우가 들었는데! 어! 진짠데!”

귀를 틀어막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했다.


“들었죠? 내 아들도 들었다잖아. 철창? 안 돼요. 수갑도 안 됩니다. 거울 달린 취조실도 안 돼요. 지금 당장 아이 엄마 접견실로 데리고 와요. 경찰이 판사 사칭했다고 확 신고하기 전에.”

  

* * *

철창을 사이에 두고 비밀리에 이루어질 뻔했던 면회는 누군가의 맹렬한 반대와 협박에 부딪혀 급히 장소가 변경되었다.

관할 경찰서장 장만수는 서장실 안을 오락가락 서성였다. 제 방이 이렇게 불편한 적은 처음이었다.

코가 꿰도 제대로 뀄지. 왜 또 하필 이 남자와 관계된 일이며, 그놈은 왜 판사 사칭을 하고 다녀서! 으휴.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서장실 방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다정이 들어서자 얌전히 앉아 기다리던 시우가 가족 소파를 폴짝 뛰어내렸다.


“엄마아!”

“시우야!”

다정은 제 품으로 뛰어든 시우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까다롭게 요구한 대로 수갑 따위를 채우지 않은 건 물론, 다정은 일상생활을 할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불려왔다.


“차 전무. 30분입니다.”

장장 6시간 만에 이루어진 모자 상봉을 지켜보던 경찰서장이 정혁에게 넌지시 귀띔을 한 뒤 방을 나갔다.


“다정아앙!…… 어떡하면 좋아아! 우리 다정이 어떡해엥!”

솔이가 다시금 오열했고 그를 달래느라 준호만 똥줄이 탔다.


“우리 시우 괜찮아?”

다정은 애써 활짝 웃지만 절로 뜨거워지는 눈시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 네! 시우 괜찮은…… 으아아아앙! 시우가 잘못해쪄여어!”

씩씩하겠다고 아빠랑 약속했는데 엄마를 보자 시우의 눈물샘이 다시 폭발했다. 울컥한 다정은 눈물을 꾹 삼키고 아들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시우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애기……. 보고 싶었어.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불과 몇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우를 보지 못한 그 몇 시간이 목이 타들어 가게 괴로웠다. 자유를 앗긴다는 건 그랬다. 1초가 1년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종일 긴장하고 있다가 엄마를 보자 맥이 턱 풀려 버린 시우는 엄마 품에서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담당 경찰관이 넌지시 면회 종료를 알렸다.


“다정아. 잘 해결될 테니까, 몸 잘 챙기고 나쁜 생각하지 말고오오…….”

겨우 진정됐던 솔이는 마지막 인사를 하던 중에 또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정혁은 잠든 시우를 준호에게 맡긴 뒤 다시 유치장으로 끌려가는 다정을 졸졸 뒤쫓았다.

철커덩. 쇳소리를 내며 철창의 문이 굳게 걸렸다. 정혁은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손만 뻗으면 닿고 만질 수 있는 거리인데, 다정이 있는 공간은 유독 차게 느껴졌다.


“차정혁 씨. 뭔가 잘못된 거예요.”

다정이 철창을 붙잡고 가까이 다가섰다. 시우와 시간을 보내느라 미처 나누지 못한 얘기들이 많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 고작 5분 정도가 허락되어 있었다.

철창을 힘껏 움켜쥔 그녀의 관절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정혁은 보기에도 시린 손을 감쌌다.


“알아. 누군가 누명을 씌웠겠지. 검찰로 송치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견뎌. 오래 안 걸려. 응?”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한 말인데, 우습게도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스럽게도 다정은 의연했다.


“내 걱정은 말아요. 그것보다 이거요.”

다정이 바지 주머니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작게 구긴 화장지 뭉치를 꺼냈다. 조심히 펼치자 빨갛게 네일아트 된 인조손톱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다정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유치원 원장실 바닥에서 발견한 거예요. 시우 몸에 난 자국들이랑 관계있는 것 같아서요. 꼬집고 긁힌 상처였거든요. 이게 증거가 될지도 몰라요.”

붉은 바탕에 자잘한 큐빅이 사선으로 띠를 이루고 있는 인조손톱을 본 순간 정혁의 뇌리에도 어떤 장면이 스쳤다.

원장실 장식장을 깨부수던 순간 머리를 감싸던 오현아의 손톱이 이것과 같았더랬다. 그중 하나가 사라져 맨 손톱이었고.


“알았어. 어떤 식으로든 조사할게.”

“그리고 시우도 병원에 가서 검사해야 해요.”

“낮에 외과 진료는 받았다고 들었어. 큰 이상은 없다고…….”

“그거 말고요. 시우가 자기 몸에 그런 자국이 생긴 걸 기억 못해요. 낮잠 시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생겨난 것들이랬어요. 그럼 잠든 사이 생긴 건데 몸에 그런 자국이 남을 동안 깨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팠을 텐데……. 혈액검사 해 줘요.”

“그래, 그럴게.”

“또…… 그리고 또…….”

시간에 쫓겨서일까. 속사포처럼 정신없이 쏟아낸 다정은 철창을 그러쥐며 또 당부할 말이 없는지를 떠올렸다.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정혁이 포개어 쥐었다. 따스한 온기에 다정의 눈길이 올라섰다.


“유다정은? 유다정은 없어? 내가…… 널 위해 뭘 해 줄까? 말해 봐.”

그제야 다정의 입가에 아스라한 웃음이 번진다.


“우리 시우 잘 부탁해요.”

“그건 당연히 해. 아빠잖아.”

“고마워요. 난 그거면 충분해요.”

정혁은 허탈한 실소를 뱉으며 철창에 이마를 대었다.


“차정혁 씨는요? 나는 차정혁 씨한테 뭘 해 주면 돼요?”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저도 어쩌지 못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럼…… 좀 안아 주라…….”

어린애처럼 의기소침해진 그를 보며 다정은 찌푸려 웃었다. 그러곤 창살 밖으로 두 팔을 뻗어 한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남자의 등을 꽉 보듬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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