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누명 (101/114)


101화 누명
2023.07.20.


오늘은 평소와 달리 종일 들뜬 기분이었다.

잠을 자지 못해 조금 몽롱했지만, 꿈결처럼 나른하고 노곤할 뿐 고단함은 느낄 수 없었다.

유시우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 아들이 먹고 싶다던 초코케이크를 가지고 달려갈 생각이었다.

도란도란 케이크를 나눠 먹고 유시우와 농담 따먹기도 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뒤 넌지시 유다정의 무릎을 베고 눕는 거다.

앙탈을 부리겠지만, 어젯밤 회사에서 꼴딱 밤을 새워 눈이 핑그르르 돈다고 엄살을 떨면 그 인정 많은 여자가 차마 뿌리치진 못할 거다.

그렇게 유다정의 무릎을 베고 한숨 눈을 붙이면 작전은 성공하는 거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쟤만 아니었다면 그 작전은 벌써 성공하고도 남았다.


“있잖아. 나 성형할까? 코가 너무 낮은 것 같지 않아?”

라고 말하며 이수경이 제 오뚝한 코끝을 눌러 돼지코를 만들어 보였다. 영락없이 예쁜 돼지였다.


“코가 문제가 아닌가? 입술에 보형물을 넣는 건 어떨 것 같아? 졸리 언니처럼 도톰해지면 남미 스타일로 섹시할 것 같은데, 어때?”

이번엔 입술을 쭉 내미는데, 진심 타인의 똥X를 보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응? 왜 말을 안 해? 남자들은 청순한 게 좋아? 섹시한 게 좋아?”

청순섹시. 라는 즉답은 정혁의 내면에서만 메아리쳤다.

미처 알지 못했다.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이 이처럼 다채롭고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정혁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호박 마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고.

한때 이수경을 잔 다르크와 엇비슷한 선상에 놓고 바라본 적이 있더랬다. 그때가 잭오랜턴으로 미 상원의원의 외아들인 제임스 슐터의 대갈통을 깨트렸던 그날부터였지, 아마.

그런데 혁명 열사처럼 불타오르던 당시의 드세고 사납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나무꾼 새끼한테 까인 후유증으로 자존감이 지하 암반층까지 추락한 여자만 존재할 뿐.

넋두리도 아니고 신세 한탄도 아닌 잡설을 경청하는 척하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정혁은 그녀가 아직 사인하지 않은 고용계약서의 빈 서명란을 떠올렸다.

하여간 권도준도 엄청 짜증 나는 타입인데, 얘도 되게 피곤했다.

둘이 천생연분인가? 곰곰 생각하던 정혁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그걸 가늠하고 있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었다.


“아무래도 살을 더 빼는 게 좋겠지? 남자들은 마른 게 싫다고 하지만, 여자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어. 남자와 여자의 마른 기준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지.”

“…….”

평소엔 스팸 전화도 잘만 걸려 오더니, 어째 오늘은 휴대폰도 조용하다. 엉덩이에 땀이 찰 무렵 정혁은 꼬아 비튼 다리를 반대편으로 바꿔 꼬았다.

그때였다. 잠잠하기만 하던 휴대폰이 격렬히 몸을 떨었다.


 

* * *

전화 보고를 마친 민 실장은 초조한 눈길로 호텔 입구를 바라보며 대기 중인 차량 앞을 서성였다. 예사롭지 않은 사건의 경위를 파악함과 동시에 부리나케 호텔로 달려온 참이었다.

전화를 끊고 머지않아 차 전무가 커다란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서는 게 보였다.

천천히 주위를 훑은 그는 곧 자동차의 위치를 확인하고 발길을 옮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뛰어도 모자랄 판에 어째선지 그의 걸음걸이가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신 그는 전체적으로 아주 무거웠다. 발걸음도. 표정도. 숨소리조차도.

차 전무가 자동차에 오르자 차내 공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조수석에 오른 민 실장이 뒷좌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경찰서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유치원부터.”

“유치원…… 말씀이십니까?”

민 실장이 조금 놀란 투로 반문했다. 다정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서에 연행되었다는데, 경찰서가 아닌 유치원부터 가겠다니 말이다.

차가 유치원을 향해 달리는 동안 민 실장은 룸미러에 비친 그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폈다. 충격이 심하면 어쩌나 했더니, 제법 침착해 보여 다행이었다.

* * *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꿍얼거리던 현아가 얼굴에 아이스팩을 갖다 댔다. 부기가 뭉쳐 단단해진 뺨 한쪽이 아직도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가만…….

문득 하던 걸 멈춘 현아가 잇새에 손톱을 물었다. 그러고는 초조한 듯 딱딱 씹어 대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잘되겠지? 이대로 순조롭게만 흘러간다면, 정혁도 더는 그 미혼모에게 미련을 갖지 않을 테니 말이다.

박 회장의 노여움이 풀리면 결혼 허락도 떨어질 거다. 굴러들어온 ‘사생아’란 변수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로써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 않던가.

꾹꾹 뺨을 누르던 현아의 입에서 아아, 하고 앓는 소리가 터진다.


“……망할 할망구. 감히 날 때려?”

현아는 분기가 솟구쳤다. 제 부모도 제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할망구, 더 늙어서 보자. 오빠랑 결혼만 하면 배로 갚아 줄 테니까.

허황한 계획을 꿈꾸던 순간이었다. 쾅! 하고 갑작스럽게 울리는 굉음에 현아는 꺅! 하고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라기도 잠시 그녀의 커다래진 눈이 휑하게 뚫린 문으로 향했다. 원장실의 양문형 문 한쪽이 반쯤 주저앉은 채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견고해 보이는 문은 남자의 발길질 한 번에 우스울 만큼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 틈으로 긴 다리가 비집고 들어선다. 놀란 현아는 소파에서 반쯤 엉덩이를 뗀 채로 엉거주춤했다.


“오…… 오빠?”

현아는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에 정혁이 멈춰 세운 발끝을 다시금 움직였다.

현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무감한 얼굴에 깃든 서늘함이 전에 없이 오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뒷걸음치는 등이 장식장에 가로막히고 만다.


“오, 오빠가…… 여기 무, 무슨……일……! 힉!”

현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눈 깜짝할 새 척척 다가선 정혁이 현아의 가냘픈 목을 매섭게 낚아챘다.


“큭! 오…… 오빠…….”

숨통이 조이자 한껏 발돋움한 현아의 목으로 끅끅거리는 소리가 넘어갔다. 퍼렇게 서슬이 어린 그의 눈이 덜덜 떠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현아. 내 경고가 부족했나?”

“……컥! 무, 무슨…… 소리야!”

현아가 고통에 겨워하며 그의 손등을 때렸다. 그럴수록 정혁의 손등 위로 혈관이 더욱 도드라졌다.


“나 충분히 경고했어. 내 아들하고 아이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처음 널 의심할 거라고.”

“큭!”

“말해. 내 아들한테 무슨 짓 했어?”

“모, 몰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정혁의 입가가 비릿하게 휘었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뭘 어째? 그 여자가 아이를 학대해? 누명이잖아. 네 짓이고.”

“소설 쓰지 마. 내가 누명 씌웠다는 증거 있어?!”

현아는 필사로 발뺌했다.

증거. 그래 증거. 그게 있다면 애초에 여길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 거다. 다정에게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건 어디까지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혁의 어금니가 까득 맞물렸다. 동시에 깁스로 단단해진 그의 팔이 장식장으로 날아가 꽂힌다. 유리 파편들이 와장창 쏟아져 내리고 겁에 질린 현아는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정혁은 잠깐 가쁘게 오르내리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현아. 내가 아주 개X끼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아니었으면 너 같은 쓰레기는 여자 취급 안 했어.”

“…….”

“기다려. 증거 찾아올 테니까. 그땐 여자고 뭐고 없어.”

 

* * *



“경찰서로 출발하겠습니다.”

“아니, 한남동 먼저.”

정혁이 또 다른 행선지를 지시했다. 민 실장은 이번에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서는 안 가실 겁니까?”

“가, 가는데, 빈손으론 못 가.”

눈두덩을 꾹 누르는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본가에 들어 정혁은 느리게 중문을 밀고 들어갔다. 슬리퍼를 꿰어 신고 거실로 향하자 박 회장의 목소리가 귀에 잡혔다.


“또?”

이번에도 손대지 않은 음식들이 고스란히 들려 나오는 걸 보며 박 회장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하여간 변변찮은 것 밑에서 자라 애가 그 모양이지.”

고개까지 잘잘 흔들던 박 회장은 어느새 거실 한편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손자를 발견하고 눈길을 고정했다.

박 회장이 여느 때처럼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왔니?”

“…….”

정혁은 무감한 얼굴을 하고 제 할머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엄마고 여자 아닌가. 그런데 기어이 제 아들에게서 엄마를 빼앗았다.

대체 노인은 같은 여자면서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일찍이 자식을 잃어본 사람이 다른 이에게서 자식을 앗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정혁이 노인을 무시한 채 윤 비서에게 물었다.


“내 아들 어딨어요?”

“2층에 계십니다.”

윤 비서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자 그가 성큼성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복도 끝에 선 그는 대여섯 개나 되는 방문을 넓게 훑다가 먼저 제 방문부터 열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곧장 다른 방을 체크하고 마지막 방문을 열어젖히자 낯선 방이 드러났다.

이 방이 언제부터 이런 것들로 꾸며져 있었나. 원래는 자질구레한 가구나 집기를 쟁여 놓는 방이 아니었던가.

최고급 어린이 가구와 소품들로 꾸며진 아담한 방은 노인이 일찍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정혁은 그곳에서 유시우로 추정되는 형체와도 마주했다.

알록달록한 침구로 꾸며진 침대 위에 뾰족한 텐트 하나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바짝 오그라들더니 간혹 들썩거리기도 하고 훌쩍거리기도 했다.

그 모양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유시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불로 만든 텐트가 움찔거리더니 작은 구멍 안에서 눈만 빼꼼 내민다.


“어…… 압쁘아…….”

꽤 울었던지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이리 와.”

부르자 언제 꽁꽁 숨었냐는 듯 시우가 이불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와 두 팔을 뻗는다. 안아 들자 짧은 팔이 그의 목을 동아줄처럼 꼬옥 끌어안았다.

맞댄 작은 몸에서 콩닥거리는 심장박동과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들을 품에 안고 나서야 정혁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내내 막아두었던 것들이 이제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시우가 삐쭉거리며 말했다.


“압빠, 어…… 엄마가 안 그랬어요. 엄마는 시우 안 때리는데…….”

끔뻑 감겼다 떠지는 눈가로 큼직한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정혁은 가까스로 울컥한 심정을 추슬렀다.


“알아.”

“시우…… 엄마한테 갈래요. 여기 있기 싫어요…….”

서러워 죽겠는지 기어이 울음이 터지고야 만다.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듬고 쓰다듬었다.


“그래, 엄마한테 가.”

정혁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두 팔 가득 시우를 안고 보드라운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에 코를 문질렀다. 제 엄마의 냄새를 닮은 아이였다. 그 체취가 지금 순간 유독 슬프고 또 아프게 와닿는 듯했다.

시우를 안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박 회장은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정혁이 아무 말도 없이 현관 쪽으로 돌아서자 박 회장이 빠른 걸음으로 손자를 쫓았다.


“어딜 가는 게야?”

“…….”

“애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니까!”

“애 엄마한테.”

덤덤하게 흘린 대답이 못마땅했던지 박 회장이 손자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차정혁! 기어이 네 자식을 그 하찮은 것한테 데려다주려고!”

그 순간,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정혁은 저도 모르게 욱한 감정을 내지르고 말았다.


“씨X!!”

노인을 뿌리치는 동작이 다소 거칠었다. 가팔라진 호흡에도 감추지 못한 흥분이 드러나 있었다.

박 회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자가 영 다른 사람처럼 구는 모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치솟은 감정을 가라앉히던 정혁이 문득 눈만 내려 시우를 본다. 생소한 언어를 낯설어하는 무구한 눈을 보자 뒤늦게야 걱정이 된다.


“유시우, 귀 막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