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거짓말 (100/114)


100화 거짓말
2023.07.16.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던 수경은 따분해 죽겠는 얼굴이었다.

긴장감이나 성의라곤 전혀 엿보이지 않는 수경과 달리 상대는 한껏 예의를 갖춘 태도로 맞선에 임하고 있었다.

수경은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감고 배배 꼬아 대며 눈앞의 샌님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에 짙은 눈썹. 키도 크고 체격도 튼실한 게 이만하면 듬직하고 잘생긴 타입이었다. 물론 현재로선 그게 누구든 수경의 마음에 찰 리 없지만.

사실 권도준만 아니었다면, 이런 선 자리는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오기로 나왔다는 말이 정확했다. 상처가 쓰라려 죽겠는 스스로에게 저항하고 싶어서.

열 번의 데이트에서 그의 마음을 열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이 두 번이나 좌절되고 나서야 돌이켜 보니, 좌절했던 순간 겪어야 했던 감정들이 깊게 파인 흉터처럼 상처로 남았다.

그날 느낀 감정들은 뭘까. 애써 묻어두려 했던 그를 향한 불신? 혹은 함께 있자고 말했을 때도, 다정하게 입을 맞출 때도 모든 순간이 진심이 아닌 적이 없던 남자의 배신?

뭐가 되었든 일말의 신뢰는 무너져 내렸다. 다른 이에게 그리도 미련이 많은데, 제게 온다는 말을 어찌 믿을까. 또다시 기만당하는 절 볼 자신이 없었다.


“수경 씨, 제가 이 말 했던가요?”

맞선남의 목소리에 상념에 잠겼던 수경의 눈길이 퍼뜩 올라섰다.


“무슨 말요?”

“이수경 씨, 제 이상형이란 말이요.”

“…….”

수경은 대놓고 지루한 기색을 드러냈다. 부모님의 강요로 맞선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어떤 의욕도 샘솟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기도가 먹혔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구원 같은 등장이었다.


“자기야. 이 남자 누구야?”

어처구니없는 말에 눈길을 들어 올린 수경이 목소리의 주인을 보더니 허, 하고 헛숨을 뱉었다. 미친놈을 보는 눈이었다.

정혁은 개의치 않고 앙탈을 부렸다.


“자기야. 설마 그새 또 바람피우는 거야? 다신 안 그런다고 했잖아.”

“수경 씨. 이 사람 누굽니까?”

맞선남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수경은 내 알 바 아니란 듯 코웃음만 쳤고 정혁은 맞선남을 향해 보란 듯이 쇼콜라 무스케이크를 들어 보였다.


“이봐, 남자. 이게 뭔 줄 알아?”

“예? 케이크…… 아닙니까?”

“맞아. 우리 2세가 생긴 걸 기념하려고 산 거야. 이 호텔 제일 꼭대기 층에서.”

라며 그의 검지가 천장을 가리켰다.


“2, 2…… 2세요?!”

어안이 벙벙한 맞선남의 눈길이 수경의 얼굴과 홀쭉한 배를 빠르게 오갔다.


“수경 씨! 저 말이 사실입니까?”

“노코멘트 할게요.”

수경이 딱 잘라 말했다. 시크하다 못해 뻔뻔한 태도에 기막혀하는 남자를 향해 정혁이 케이크 상자를 휘휘 내저었다.


“남자, 알았으면 꺼져.”

남자는 욕설을 뱉으며 돌아섰다. 그제야 수경이 불만스럽게 눈을 홉떴다.


“무슨 짓거리야? 누가 누구랑 2세를 만들었다고?”

“유시우 동생 생길 때를 대비해서 연습 좀 해 봤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맞은편에 풀썩 몸을 묻었다.


“얼굴에 제발 꺼졌으면 하고 써 있는데, 눈치 없게 못 알아먹더라고. 대신 꺼지게 했잖아. 고맙지?”

“고맙네.”

인정할 건 인정하는 수경이었다.


“고마우면 미국 좀 가라. 지난번에 제안서 봤지? 가서 기술 특허랑 법인 설립 마무리 좀 해.”

“뭐? 싫어. 내가 왜?”

“지난번 내 비서가 제안서 가지고 갔을 땐 결혼 앞두고 있어서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그랬지?”

“근데 나무꾼 새끼랑 쫑났잖아.”

정곡을 찔렸다는 듯 수경이 꿍한 눈길로 그를 쏘아본다.


“근데 권도준 씨가 왜 나무꾼이야?”

“멍청하잖아.”

수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딘가 맞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나빠 수경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뭐랬지? 증강현실을 접목한 홈쇼핑이랬나?”

정혁의 미간이 빡 구겨졌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시작된 사업을 한낱 홈쇼핑으로 치부하는 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홈쇼핑이라니?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내가 실현하려는 건 증강현실을 이용해 OTT 플랫폼과 쇼핑을 결합한 글로벌 쇼핑 네트워크라고. 플랫폼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동시에 쇼핑을 할 수 있어.”

“아, 글로벌 쇼핑 네트워크.”

수경이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 관심 없다는 투다. 반응은 이래도 처음 제안서를 봤을 땐 차정혁답게 기발하단 생각을 하긴 했었다.

마치 사업설명회를 하듯 정혁은 열의를 갖고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호박 마녀 네가 만약 플랫폼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등장인물이라면,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다가 네가 하고 있는 스카프를 보고 말하는 거지. 스카프 예쁜데? 그럼 곧장 휴대폰을 들고 AR 카메라로 TV 화면을 촬영하는 거야. 그럼 AI가 그 제품을 판매하는 전 세계 모든 온라인 숍을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라고.”

그건 모르겠고. 수경이 관심 없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래서 일정이 어떻게 된다고?”

“OTT 업체 인수는 구두상 확정이야. 법인부터 설립돼야 정식 계약이 체결될 거 아니야. 그리고 기술 특허와 뉴욕증시 상장까지. 눈코 뜰 새 없는데, 멍청이들이 지지부진이야. 내가 알기로 그 분야 전문가는 호박 마녀, 너만 한 인재가 없고.”

수경이 갈팡질팡하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그럴까. 가 버릴까. 지리적으로 멀어지면 그 남자도 언젠가 잊혀지겠지.


“얼마 줄 거야?”

“너 받던 만큼”

“안 해.”

수경이 미련 없이 도리질을 쳤다. 검미를 꿈틀거리던 정혁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3%”

“7%”

“5%”

잠시 꾸물거리던 수경은 시원하게 외쳤다.


“콜.”

만족스럽게 타협을 끝낸 정혁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민 실장. 지난번에 호박, 아니 이수경 씨 영입 건으로 만들었던 서류 있죠? 곧 사인하러 갈 테니까 출력해서 준비해 놔요.”

그는 용건만 명료하게 전하고 통화를 마쳤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혁은 겨우 마음이 놓인다. 수경이 팀에 합류하면 현지에서의 진행 절차는 완벽히 믿고 맡겨도 될 테다. 그녀만큼 그곳 정세에 빠삭한 인재도 드무니까.


“근데 오늘 누구 생일인가 봐?”

수경이 케이크 상자를 눈짓했다. 초콜릿의 단내가 은은하게 피어오르자 정혁의 눈길도 자연스레 케이크 상자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냥. 내 아들이 먹고 싶대서.”

 

* * *

다급한 연락을 받고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 고요한 사위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유치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이들은 교실에서 수업이 한창이기 때문이었다.

다정은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지나는 길에 경찰 제복 차림의 사람들 몇몇이 복도를 서성이는 장면이 눈에 스쳤다.

불안에 입술을 깨물며 원장실 앞으로 가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오 원장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어딘가 엄중한 느낌이었다.

다정은 조심스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등장하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현아가 소파의 상석을 지켰고, 대각선 방향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가 보였다. 날카로운 인상에 기민한 눈초리를 번득이는 남자들이었는데 낯이 익었다.

이윽고 다정은 그들이 관할 경찰서의 경찰관들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지난번 서남식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들이었다.

또 맞은 편엔 토끼반 담당 교사와 축구 교실을 전담하는 체육 교사가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다정은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원장님. 대체 무슨 일이죠? 우리 시우가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다짜고짜 아이에게 일이 생겼으니 당장 유치원으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다정이 묻자 허공만 주시하던 현아가 길게 한숨을 뱉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눈길을 돌리더니 다정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쏘아본다.


“어머님. 오늘은 한송 사립 유치원장으로 대화해야겠어요.”

고상을 떨며 뜸을 들이는 얼굴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사적인 감정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없었다.


“됐고, 우리 시우가 어떻게 됐는지 묻잖아요. 우리 시우 어딨어요?”

“지금은 아이를 만나게 할 수 없어요.”

현아가 딱 잘라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어째서 제 아이를 만날 수 없다는 건지, 다정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현아의 눈초리가 그런 그녀를 주시했다. 일그러진 두 눈 가득 묻어난 혐오감이 짙었다.


“왜 그랬어요? 엄마라는 사람이 힘없는 아이한테 대체 왜 폭력을 휘둘렀죠? 그 작은 아이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현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단 듯이 가슴을 짚고 숨을 골랐다. 끔찍하단 듯이 고개를 내젓는 그녀를 보며 다정은 입술만 뻐끔거렸다. 마치 딴 세상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하나도 모르겠어요.”

진심이었다. 어느 것 하나 알아듣지 못하자 경찰관 중 한 사람이 끼어들어 설명을 붙였다.


“유다정 씨. 유시우 군 몸에서 다수의 폭행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께서도 그동안 아이의 몸에서 구타의 흔적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구타……요? 증언이라고요? 거짓말…….”

다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선생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봤다는 건가.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 말은 내가 내 아이를 때렸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유치원 관계자가 유다정 씨를 아동 학대 혐의로 고발했고 증언도 확보됐습니다. 아이의 진술과 병원 진단 서류까지 준비가 되면 빠르게 검찰로 송치될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시우 어딨어요? 우리 시우부터 봐야겠어요. 당장 내 눈앞에 데리고 와요!”

다정이 흥분해 소리쳤다.


“유다정 씨. 아동 학대 사건의 경우, 가해 부모와 아이를 최우선 분리하는 게 원칙입니다.”

“누가 아동 학대 가해자란 거예요!! 당장 우리 시우부터 데려오세요!”

다정이 고집을 부리자, 경찰관이 다른 경찰관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곧 여경의 손에 이끌려 시우가 원장실로 들어왔다.


“엄마아!”

“시우야!”

다정은 오도도 달려와 안기는 시우를 품에 꼭 안았다. 잔뜩 울었는지 눈시울은 벌겋고 두 뺨은 뜨거웠다.


“우리 애기 괜찮아?”

무릎을 굽힌 다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우는 코가 빨개진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유시우 어린이. 아까 원장 선생님한테 했던 말 기억하지? 엄마가 때렸다고 말했잖아. 여기 경찰 아저씨들 앞에서 다시 말해 봐.”

현아의 말에 아연하게 질린 다정은 얼른 시우의 옷을 걷어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러곤 이내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침에 멍든 곳은 팔꿈치가 다였는데, 그 사이 시우의 등과 목덜미, 무릎 뒤쪽과 발목까지 이곳저곳 멍 자국이 낭자했다.


 


“이런 게 왜…… 시우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랬어?”

“모르겠어요. 시우는 코하고 일어났는데…… 어…… 잘 모르겠어요.”

시우가 울먹이며 도리질을 쳤다.


“세상에, 우리 애기.”

다정은 다시 시우를 품에 꼭 안았다. 아이에게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꼬마야. 엄마가 때렸다고 말하래도!”

현아가 다그쳤다. 그에 시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엄마가 때린 거 아니에요! 시우가 의자에서 내려오다가 떨어진 거예요!”

현아는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얘, 왜 아까랑 말이 달라? 때리는 사람도 엄마라고 감싸는 거야? 이래서 어린애들 말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네 엄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든?”

“아니…… 아니에요!”

울먹거리던 시우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정은 시우를 품에 꼭 안고 다독였다. 불현듯 두려움이 사무쳤다. 온 세상이 저와 시우를 바보로 몰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벅저벅. 꼭 끌어안고 있는 모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유다정 씨. 당신을 아동 학대 혐의로 긴급체포하겠습니다.”

 

* * *

철썩!

현아의 뺨 위로 불덩이가 할퀴고 지나갔다. 화끈거리는 뺨을 움켜쥔 현아의 두 눈이 충격으로 요동쳤다.


“하, 할머니! 왜 이러세요?!”

“네깟 게 감히 내 집안 어린 것한테 손을 대?!”

박 회장의 노성이 드넓은 저택을 쩌렁 울렸다.

현아는 억울함에 뺨을 쥐고 울먹거렸다. 증손자를 데리고 오면 너무 좋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줄 알았더니, 되레 날벼락이었다.


“그, 그건…… 할머니가 시켰잖아요! 애를 데려오라면서요! 전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시키긴 누가 시켜! 머리가 나빠도 유분수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 하는 걸 어디다 써! 그런 짓을 하고도 내가 널 봐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할머니, 흐윽…….”

현아의 설움이 폭발했다.


“한 번만 더 우리 장손 몸에 그런 짓을 해.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니!”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현아는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맞대고 싹싹 비볐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현아가 잘못했어요. 현아가 생각이 짧았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꼴도 보기 싫어! 썩 꺼져!”

울고불고 흐느끼던 현아는 결국 사람들에게 붙잡혀 저택 밖으로 끌려 나갔다.

성가신 소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박 회장은 한결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했다.

증손자를 찾아왔으니 이제 선영 모녀도 적당히 잘라낼 시점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우나, 그 과정이 아주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데려오라 했기로서니, 어떻게 그런 방법을……. 고얀 것.

저런 물건 손에 귀한 증손을 맡겼다간 아이가 남아날 턱이 없지.

세상 말세라는 듯 박 회장이 혀를 찰 때 2층에 올라갔던 윤 비서가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왔다.


“회장님 어쩌죠? 꼬마 도련님께서 꼼짝도 안 하십니다.”

윤 비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손에는 과일과 간식이 들린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처음 가지고 간 모습 그대로였다.

박 회장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손도 안 댔구만.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는 본 게야?”

“여쭤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울기만 하세요.”

이어서 주방에 있던 여주댁이 불려왔다.


“여주댁, 애 좋아할 만한 걸로 한 상 차려 봐.”

“아이고, 예예, 회장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