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가족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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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가족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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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가족 같아서
2023.07.13.
빔프로젝터에서 쏘아 날리는 불빛 속에서 금빛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회의는 두 시간 연속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 모두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 어렵사리 휴식을 제안했고, 철야를 각오한 이들은 대비책으로 카페인을 찾아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
스크린에서 시선을 뗀 정혁은 피곤한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고요한 적막이 감돌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원동력 삼아 충전을 하던 중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이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정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루하고 피로한 일과 중에 걸려 온 여자의 전화가 반가웠다.
정혁은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유다정?”
『아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정혁의 입가 웃음이 한결 진해졌다. 제 것이 아니라 유다정 휴대폰으로 전화한 걸 보니, 엄마에게 허락받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유시우, 밥 먹었어?”
『어? 네! 새우볶음밥 먹었어요!』
“볶음밥?”
정혁이 눈가를 꿈틀거렸다. 그러곤 미심쩍은 투로 묻는다.
“맛있었어?”
『네!』
“거짓말.”
『어? 음…… 거짓말, 아닌데.』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유시우가 엄마 눈치를 보며 난처해하는 얼굴을 떠올리자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엄마는?”
『엄마 옆에요. 어…… 근데 아빠.』
정혁은 피식 웃었다.
“왜?”
『보고 싶어요.』
유시우가 고백하며 귀여운 소리로 웃는다.
“나도.”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한 정혁은 깁스가 된 팔을 움찔거리다가 손목시계가 없다는 걸 깨닫고 벽시계로 눈길을 돌렸다.
PM 09:10
지금 곧장 사무실을 나서도 도착할 때쯤이면 유시우는 기절해 있을 시각이었다.
애초에 글렀다. 괜한 마음에 시간을 확인하긴 했지만, 솔직히 자정 전에 회의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빠! 언제 와요? 어…… 두 밤 자면 와요? 아니면 세 밤?』
“내일.”
『내일? 진짜요?』
“유시우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 사 갈게.”
『어! 초코케이크.』
“초코케이크? 그래. 제일 큰 걸로 사 갈게.”
『우와!』
시우가 신나 하기 무섭게 다정이 훼방을 놓는다.
『차정혁 씨, 그런 거 먹으면 시우 키 안 커요. 충치도 생기고 안 좋으니까 사 오지 말아요.』
하여간 이상한 여자였다. 애한테 덜 익은 감자와 케첩에 비빈 밥을 하루에 한 끼는 먹이는 주제에 할 말인가 싶다.
가만 보면 유다정은 아들의 키 성장에 몹시 집착하고 그것을 염려했다. 그제야 정혁은 시우가 또래보다 어째서 키가 작은지 알 것도 같다.
가만히 눈여겨본 결과 유시우가 집에서 한 그릇을 다 먹는 꼴을 못 봤다. 맛있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절반은 남기는 편이었다.
그럼 유다정은 안 먹어서 키가 안 큰다며 푸념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결론은 맛이 없어서 안 먹는 거다.
여하튼.
『아빠! 시우가 사랑해요.』
정혁은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버터처럼 달콤하게 귀속으로 녹아들었다.
“나도.”
무뚝뚝한 편도 아닌데, 정혁은 어째 마주 사랑한다는 말이 부끄러워졌다.
“유다정. 이게 그건가?”
『그거요?』
스피커폰인지 다정의 목소리가 먼 울림처럼 들려왔다.
“왜 있잖아. 행복해서 미치겠는 거. 나 좀 많이 행복한 거 같아.”
스피커폰 상태로 귀를 기울이던 다정은 살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약간 고조된 그의 말투에서 설렌 기분이 다 느껴졌다.
역시나 아빠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시우를 보며 다정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행복한데요?”
『그냥. 우리가 가족 같아서.』
조금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다정은 살짝 찌푸려 웃었다.
『차정혁 씨. 우리 가족 맞잖아요.』
* * *
『엄마는 이사장단 회의 끝나고 곧장 갈 테니까, 출근해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유치원에 얌전히 붙어 있어. 알았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선영의 잔소리에 운전대를 부여잡은 현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허수아비야? 이럴 거면 나 유치원 원장 자리엔 왜 앉혔어?”
짜증을 부리자 너머에서 선영이 한숨을 뱉었다.
『현아야. 그러지 말고 이번에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는 게 어때? 우리 딸 파리 가고 싶다고 했잖아. 엄마가 비행기랑 호텔이랑 최상으로 준비해 줄 테니까 다녀와, 응?』
선영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떨렸다. 체육대회 때 있었던 천막 붕괴 사고는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
이러다가 현아와 영준이 공모해 벌인 일이라는 게 발각될까 선영은 전전긍긍했다. 그 심정도 모르고 현아는 오직 제 감정에만 충실했다.
그녀가 주행 중인 자동차의 핸들을 콱 내리쳤다.
“그래.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들 뿐이지?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해 주고 싶으면 오빠나 제자리로 돌려놔!”
통화를 종료한 현아는 휴대폰을 내던진 뒤 전방을 쏘아보았다.
한편 막 유치원에 도착한 다정은 시우의 팔꿈치를 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하룻밤 자고 났더니 우려했던 대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보는 것도 아까울 아들의 팔에 생긴 멍자국에 다정의 가슴도 파랗게 멍이 드는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팔이 붓거나 팔을 움직이는 데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아 병원은 안 가도 되겠거니 했다.
“우리 애기 많이 아파요?”
시우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 시우 하나도 안 아파요.”
“으응? 정말?”
다정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괜히 장난기가 도져 멍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시우가 아얏, 소리를 내더니 퍼뜩 어깨를 웅크렸다. 그런 아들이 귀여워서 다정은 깔깔 웃었다.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기!”
말이 끝나기 전에 시우가 선수를 쳤다.
“똑똑해 엄마 아들.”
다정은 시우를 두 팔 가득 꼭 끌어안았다.
시우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다정도 발길을 돌려세웠다.
주차장을 향해 터덜터덜 걷던 길, 문득 도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선배는 수경 씨랑 어떻게 됐을까? 화해했겠지. 그때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어째 다정과 마주칠 때마다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투덕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다정은 휴대폰을 열고 통화 창에 도준의 번호를 띄웠다. 걱정스러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면서도 긁어 부스럼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되었다.
다정은 고개를 잘잘 저었다. 역시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
그때 손안에 쥔 휴대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동시에 화면에 문구가 떠올랐다.
「최선아님이 당신을 초대하였습니다.」
다정은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였다.
최선아? 대학 후배 최선아? 엊그제 동문회에서 오랜만에 재회의 반가움을 나누기도 했더랬다.
어련히 그날 모임에 얼굴을 비춘 탓이려니 하고 다정은 초대에 응하며 단톡방으로 입장했다.
「최선아 :
다정 언니~~~>_< 고마워요. 이게 무슨 횡재래요?」
「안지연 :
다정아. 너무 고맙다~」
대체 무슨 일이지? 다들 고맙다고 아우성인데, 다정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정은 곧장 메시지를 입력했다.
「유다정 :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김윤지 :
선배 몰랐어요? 선배 남친이 그날 참석한 여자 동문들한테 H호텔 스파 10회 이용권 쫙 돌렸잖아요. 거기 스파 완전 럭셔리한 걸로 유명한데, 내 평생 갈 일이나 있을까 했더니 이게 웬일.」
스파 이용권? 내내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안지연 :
그날 자리 끝나고 돌아갈 때 지배인이 문 앞에서 일일이 나눠 주더라고.」
곧 채팅창 안에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금테가 들어간 진한 카키색 카드 봉투였는데, 전면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유다정 ♥ 애 아빠가 쏩니다.」
“어후, 미쳤어…….”
다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채팅이지만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안지연 :
다정이는 대체 무슨 복이니? 에혀, 그런 남자 어디 또 없나?」
「김윤지 :
선배. 이번 생은 틀렸어요. 다음 생엔 선배도 꼭 강아지풀로 태어나요. ㅋㅋㅋㅋㅋ」
다정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강아지풀 얘긴 또 언제 떠들고 다닌 거야?
「안지연 :
근데, 스파에서 고서원 떨거지들하고 마주치는 거 아니야? 마주치면 겁나 웃기겠다.」
「최선경 :
맞아요. 그 선배 대놓고 다정 언니 까기 바빴잖아요. 근데 스파 이용권은 받아 가더라.」
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을 무음으로 돌린 다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애 아빠 얘기로 단톡방이 떠들썩했다.
한편, 교실을 향해 달리던 시우는 제 앞을 가로막는 키 큰 어른의 등장에 끼익 발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휙 젖힌 시우는 냉큼 배꼽 인사를 했다.
“어? 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
어쩐 일로 상냥하게 인사를 받아 준 현아가 느릿하게 팔짱을 끼웠다.
“그런데 너…… 팔이 왜 그러니?”
“어? 이거! 시우가 의자에서 뛰려고 했는데 떨어졌어요. 근데 시우 하나도 안 울었어요!”
“그래?”
여린 팔꿈치를 물들인 푸른 흔적을 보며 현아의 두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 * *
똑똑.
희미한 노크 소리에 눈을 뜬 정혁은 문으로 들어서는 민 실장을 본 후 피곤한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음…… 몇 시예요?”
“오후 한 시 조금 넘었습니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간 무렵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만 감고 있는다는 게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민 실장은 안쓰러운 얼굴이 되었다. 어제도 밤을 꼴딱 새우고, 알아서 한다더니 결국 식사도 건너뛴 모양이다.
“전무님, 쉬엄쉬엄하십시오.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뉴욕 상장 일정 맞추려면 빠듯해요.”
민 실장은 탄식을 삼켰다.
하긴 TF팀 전체가 좀비처럼 퍼렇게 눈 밑을 물들이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덩달아 비서실장인 제 처지는 뭐 다를까.
“미국 현지 팀한테 보고서 올라왔어요? 법인 설립은 어떻게 됐대요? 왜 깜깜무소식이야?”
“그렇지 않아도 진척 상황을 보고하는 메일이 막 들어와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민 실장이 보고서를 첨부한 파일을 내밀었다. 뻑뻑한 눈가를 더듬은 뒤 눈에 초점을 맞추던 정혁이 눈썹 사이를 구겼다.
“뭐가 이렇게 더뎌?”
“아무래도 TF에 포함된 인력 중에 현지통이 없는 게 애를 먹이는 요인 같습니다. 팀 구성이 조금 허술했던 게 아닌가 싶은데, 팀원들을 통솔할 전문가를 빨리 영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 실장이 조언했다.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눈썹을 문질렀다. 골치가 아프다. 다 팽개치고 제가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쩐다.
“오늘 특별한 외부 일정은 없으니 일찍 들어가십시오. 아니면 사우나라도 가셔서 잠깐 눈 좀 붙이시든가요. 괜찮은 데로 알아볼까요?”
영 신통치 않은 그의 안색을 보며 민 실장이 권했다. 그에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던 손끝이 멈췄다.
“사우나 말고 초코케이크 잘하는 집 알아요?”
* * *
일찌감치 레지던스로 돌아온 정혁은 샤워부터 했다. 그렇게 간밤의 피로와 묶은 때를 벗기고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곧장 집을 나섰다.
차에 오르자 김 기사가 행선지를 확인한다.
“전무님. M호텔로 모시면 됩니까?”
“네.”
그가 긍정하자 차가 서서히 굴렀다.
웬만하면 혼자 움직이고 싶어 민 실장은 떼어 놨는데, 깁스한 팔로는 운전이 여의치가 않아 어쩔 수 없이 김 기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M호텔 베이커리의 쇼콜라 무스케이크가 유명하답니다.’
민 실장이 비서실 여직원들을 총동원해 검색과 리서치를 통해 얻어낸 결과였다.
유기농 밀가루와 카카오, 천연 감미료를 이용해 만든 케이크는 건강에도 좋고 달지 않아 여성과 아이들이 선호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일엔 불가능하다는 주문 예약까지 원스톱으로 진행한 걸 보면, 민 실장의 능력이 탁월하긴 했다.
“금방 나와요.”
김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호텔로 들어선 그는 안내받은 대로 카페 라운지를 지나 베이커리로 향했다.
잠시 후 직원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포장된 케이크 상자를 들고 금빛 양초처럼 생긴 난간을 따라 왔던 길을 거슬러 갈 때였다.
한 여자가 카페 라운지 안에서 차를 마시는 광경이 눈에 잡혔다. 아는 여자였다.
누군가와 차를 마시는 여자를 보며 정혁은 멍청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