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멍청한 나무꾼 새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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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멍청한 나무꾼 새X
2023.07.09.
“몇 살이세요?”
“서른넷.”
“키는 얼마예요?”
“187. 아, 나이 들고 좀 줄었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다음은 그의 신상에 호기심이 집중되었다. 벌써 추종자도 생긴 모양이다.
“너무 잘생겼어요. 저 오빠처럼 잘생긴 사람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 같은 얼굴이 흔하진 않지. 그렇다고 너무 보진 마요. 닳아.”
그저 겸손을 모르는 것뿐인데, 여자들은 시크한 유머 감각쯤으로 받아들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시는 일은 어떻게 되세요?”
“명한유통 다녀요.”
이번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성우가 아, 하고 신음했다. 같은 계열사에 근무하다니,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보면 볼수록 어딘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골몰히 생각하던 성우가 어느 순간 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엉덩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이런 곳에서 뵐 줄은 올랐습니다.”
성우의 허리가 폴더폰처럼 반으로 꾸뻑 접히자 정혁이 의아하게 눈썹을 들추었다.
“나 알아요?”
“명한건설 개발 2팀장. 이성우입니다.”
“건설 쪽 직원이에요? 개발 2팀이라면…….”
“백화점 개편 관련해 전담하고 있습니다.”
“아, 그쪽. 그래요, 반가워요.”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무님!”
정혁이 내미는 손을 덥석 붙잡은 성우는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 * *
사람들의 관심이 느슨해진 틈을 타 다정은 슬그머니 일어나 장내를 벗어났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지만, 모든 신경이 제게 쏠려 있는 남자는 기민했다. 예상대로 그가 졸래졸래 다정의 뒤를 따라나선다.
“유다정 어디가?”
다정은 못 들은 척 묵묵히 뒷마당의 외진 곳으로 향했다.
“유다정. 어디 가냐니까?”
“…….”
유다정. 유다정. 유다정.
이름이 소모품이라면 벌써 닳아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얼마간 걷자 달덩이처럼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낡은 스윙체어를 비추었다. 주변으로 아기천사 석고상도 몇 개 보였다.
이쯤이면 되려나?
사람들과 거리를 적당히 두고 다정의 걸음이 멈춰 섰다. 어디까지 가려나 지루한 낯빛을 해 보이던 정혁도 덩달아 우뚝 멈춰 섰다.
“차정혁 씨. 여긴 말도 없이 어떻게 왔어요?”
“차 타고 왔어.”
“그런 말 아닌 거 알면서 농담하지 말아요.”
다정이 다그쳤다. 지그시 눈길을 내려 말간 얼굴을 응시하던 정혁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그러며 캄캄한 하늘 어딘가에 눈길을 고정했다.
“서운해서.”
“서운……요?”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곰곰 생각해 보지만 퍼뜩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시위 같은 거랄까.”
“…….”
다정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어떻든 정혁은 한번 터진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해 나갔다.
“유다정이 대학 동문회에 간다면서 나한테 옷을 사 달라잖아. 이 여자가 나한테 뭔가를 해 달라는 게 처음인데, 내가 얼마나 좋았게. 백화점을 통째로 갖다 바칠까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
“그런데 딱 거기까진 거야. 동문 모임에 입을 옷은 사 달라고 하면서 같이 가 달라는 말은 안 하더라고.”
다정은 벙긋 벌어진 입을 다물고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감아 물었다. 뭘 실수했나 했더니 그거였다.
다정은 총총 다가가 얼른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았다. 하늘을 보듯 고개를 바짝 젖히자 정혁의 눈길도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이 배시시 웃다가 작게 혀를 빼문다.
“있잖아요. 내가 아직 서툴러서 그래요. 어릴 때부터 뭐든지 혼자 해 오던 게 버릇이 돼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습관이 무섭긴 하지.”
“그래도 내가 당신을 늘 믿고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알아.”
정혁이 조금 나른하게 웃으며 다정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더 바짝 당겼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다정도 깨금발을 하고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유다정. 나 실수한 건가?”
다정은 도리질을 쳤다.
“아뇨. 어차피 이상한 소문 돌아서 분명하게 밝히려고 마음먹고 온 자리예요. 차정혁 씨가 나타났을 때 고서원 그 기집애 얼굴 볼만했는데. 성우 선배가 깍듯하게 인사할 땐 거의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니까요.”
어쩐지 그 뒤로 서원은 오징어 같은 ‘닥터’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남친 멋져. 이런 게 남친 찬슨가?”
그를 한껏 추켜세우며 다정이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그는 겸손이라곤 몰랐다.
“유다정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남친 서운하지 않게 진작 같이 오자고 할걸. 옷만 사 달라고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면 뽀뽀.”
애교스러운 요구에 깔깔 웃던 다정은 고민도 없이 뒤꿈치를 치켜들었다.
* * *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정혁과 함께 가을밤의 정취를 물씬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 뜻밖의 상황이 다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란을 빚으며 무언가를 에워싸고 있었고,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두 남자가 난투를 벌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장정들이 서너 명씩 들러붙어 떼어내려 하지만, 흥분한 남자들은 찰거머리처럼 엉겨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개자식아! 다시 한번 말해 봐!”
상대를 깔아뭉갠 채 주먹질을 해 대는 남자는 도준이었다. 그 아래 깔려 두들겨 맞는 이는 김재현.
“누가 좀 말려 봐요! 보고만 있을 거예요?!”
수경이 도움을 청하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도준을 말리려 몇 번이고 그를 붙잡아 보았지만, 여자의 변변찮은 완력으로 반쯤 눈이 돈 남자를 멈춰 세우기란 불가능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갔다. 덕분에 추억의 밤 행사도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는 모양새였다.
대부분은 돌아가고 핵심 인사 몇몇이 남아 뒷정리를 전담했다.
다정은 구석진 자리를 잠시 빌려 도준의 손을 치료했다. 주먹질이 어찌나 거칠었는지 손등과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새빨간 속살이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재현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지만, 거의 만취 상태라 지금으로선 통증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했다.
측근들의 말로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있었던 일은 기억도 못 할 거라고 하는데, 어쨌든 기절하듯 잠든 그는 측근들의 도움으로 집이든 어디든 던져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선배답지 않게…….”
속상한 마음에 타박을 쏟지만 도준은 시선을 회피한 채 말이 없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 일회용 반창고를 꼼꼼하게 붙여 주면서도 다정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준이 아니라 수경 말이다. 본래라면 도준의 상처는 수경이 돌봐야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텐데,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준이 싸움을 벌일 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막상 상황이 매듭지어졌는데 안도는커녕 어째선지 찬바람까지 쌩 부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불안불안하더니, 도준의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수경이 돌아섰다.
“수경 씨!”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도준이 그녀를 쫓지만, 수경의 태도는 전에 없이 냉정했다.
권도준에게 희망이 없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수경 씨! 잠깐만요!”
도준이 야멸차게 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요!”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왜 그러냐고요?!”
“내가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건 인정해요. 하지만, 수경 씨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걸 알아주길 기대한 내가 바보였죠. 분명히 알았어요. 도준 씨한테 난 그냥 잠자리 상대밖에 안 되는 대타라는 걸요. 그뿐이에요.”
도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수경 씨!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날 존중하긴 해요?”
“당연하죠.”
“그런 사람이 내가 보는 앞에서 주먹질을 해요?”
“그건…….”
“나에 대한 일말의 배려나 예의 따윈 없는 당신 마음 잘 알았다고.”
“수경 씨!”
“놔!”
도준을 뿌리친 수경은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로 시근거렸다.
이런 남자에게 뭔가를 기대했던 저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존심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수경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간신히 다독였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우린 아니네요.”
씁쓸한 말을 남긴 채 수경은 택시 승강장을 향해 돌아섰다.
“수경 씨……!”
다정이 불러 보지만 수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선배! 뭐 해요? 빨리 쫓아가지 않고요! 이러다 정말 후회할 거예요!”
다정이 발을 구르며 다그치지만, 무슨 자존심이라도 되는 양 도준의 두 다리는 꿈쩍 않고 붙박이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 도준을 시큰둥한 눈길이 직시했다. 쯧, 혀를 차며 한 남자가 씹어 뇌까린다.
“멍청한 나무꾼 새X.”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 와중에도 욕은 듣기 싫은가 보다. 비웃음을 담아 실소한 정혁이 한심하다는 투로 한마딜 더 보탰다.
“븅X.”
* * *
기어이 븅X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도준은 택시 승강장을 향해 달렸다.
“수경 씨!”
“이거 놔요!”
수경이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더 다가오지 말란 경고였다. 주춤 밀려난 도준은 그녀를 진정시키려 최선을 다했다.
“수경 씨. 내가 난폭한 모습을 보인 게 실망스럽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그 자식이 맞을 짓을 했다는 건 수경 씨도 봐서 알잖아요!”
“네! 맞을 짓을 했죠. 근데 그걸 왜 도준 씨가 하는 건데요?”
모든 시작은 재현이 만취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혁이 있을 땐 아무 소리 못 하더니 그가 다정과 함께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여기저기 다정의 험담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번 가시지 않은 앙금이 불씨가 되어 다시 불길로 치솟아 대차게 주먹다짐을 하게 된 사연인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좋아하는 남자가 짝사랑하던 여자 때문에 제 앞에서 주먹질을 해 대는데 그걸 아름답게 바라볼 여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 없을 거다.
남들 다 아는 그 진리를 눈앞의 이 멍청이만 몰랐다. 잠자리에서 속삭이는 달콤한 말 보다는 분노가 서린 주먹질이야말로 진심을 대변하는 게 아니겠는가.
수경은 허탈하게 웃었다.
“권도준 씨. 본인 마음부터 분명히 하는 건 어때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사랑한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니고요?”
“이수경 씨. 다정이 얘긴 하지 마요. 이 일이랑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다고요? 이 와중에도 그렇게 절절하고 애틋한가 보죠? 착각에 빠져 자기 혼자만 그 사랑에 책임의 굴레를 씌우고 충성한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더 이상 붙잡지 말아요.”
“……이렇게 가면 우리 정말 끝입니다.”
얼토당토않은 엄포에 수경은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할 소릴.
“네, 시작이 엉망인데 끝이 우아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죠. 끝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당신한테 실망하는 나한테 지치는 것도 지치니까.”
“이수경 씨!”
순간 도준의 눈에 불이 번쩍 튀었다. 대차게 따귀까지 날린 뒤 수경이 씹어 경고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이 개자식아. 사람 그만 가지고 놀라고.”
“…….”
그녀를 태운 택시가 멀어져 가는 동안 도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수경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도준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리둥절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믿었는데…….
가지고 놀다니. 아니다. 사랑이라고까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다.
* * *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다정이 도면 작업에 심취해 있는 사이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눈길을 들자 시우가 소파 아래에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소파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다정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시우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방금의 쿵, 소리로 보아 어딘가 타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우의 커다래진 눈이 울먹울먹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감싸고 울음을 터트린다.
“흐아아아아아아앙!”
깜짝 놀란 다정은 얼른 시우에게 다가가 머리를 살폈다.
“우리 시우, 어디 다쳤어? 어디 아픈지 엄마한테 말해 볼까?”
“여으기히이이이잉!”
시우가 서럽게 통곡하며 팔꿈치를 가리켰다.
“머리는? 머리는 안 아파?”
“머흐리아프아아아아, 여기그흐어엉!”
머리도 아픈데, 팔꿈치가 더 아프다는 소리였다. 시우가 통곡하며 테이블 모서리를 탕탕 때리더니 제 팔꿈치를 쥐었다. 테이블이 나쁘다는 뜻이다.
다정은 시우의 팔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별 탈 없이 구부러지고 펴지는 게 부러진 건 아닌 듯했다.
시우가 대성통곡하는 건 아무래도 통증보다 제풀에 놀란 탓이려니 하고 다정은 얼른 시우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우리 애기 많이 아팠구나. 엄마가 미안해요.”
토닥토닥해 주자 시우는 금세 울음을 그쳤다. 의젓할 땐 의젓하다가도 한번 응석을 부릴 땐 마냥 아기였다.
얼마 안 있어 훌쩍거리던 시우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코 먹은 소리로 당부했다.
“엄마. 있잖아요…… 어, 시우 울었다고 아빠한테 말하지 마요.”
“응? 왜?”
“아이, 그냥. 말하지 마.”
시우의 고사리손이 다정의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는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된다는 걸 매번 까먹어서 큰일이다.
여하튼 시우는 아빠한테 울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우리 시우 엄청 아팠는데, 안 울고 씩씩하게 참았다고 아빠한테 말해 줄게요.”
“어…… 근데! 아빠 언제 와요?”
“아빠? 음…….”
다정은 콧등을 찌푸려 웃었다.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네. 우리 아빠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