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추억의 밤 (97/114)


97화 추억의 밤
2023.07.06.



 
모임 장소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정은 퇴근길 교통체증을 염려해 지하철을 타고 가장 가까운 역에서 하차한 뒤 택시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1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제법 멋스러운 운치를 자랑하는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반짝거리며 물비늘을 일으키는 호반을 끼고 아기자기한 조경으로 꾸며진 넓은 정원과 프로방스 느낌으로 지어진 건물이 인상적인 곳이었는데, 한적한 주변 정취와 어우러져 매스컴에도 심심찮게 소개되는 곳이라고 한다.


“손님. 예약하셨습니까?”

입구로 들어서자 점원이 물었다.


“네. 추억의 밤이라고…….”

모임의 첫머리를 떼자마자 아, 소리를 낸 점원이 즉각 반응했다.


“추억의 밤 행사는 뒷마당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깍듯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 점원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 뒤 건물의 안쪽으로 다정을 안내했다.

점원을 따라 뒷문으로 나서자 건물 후면에 펼쳐진 잔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연회장으로 꾸며진 잔디 정원에는 십수 개의 원탁이 배치되어 있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남녀가 잔디 위를 거닐며 반가움을 나누고 있었는데, 손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와인이나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학생 땐 아무 데나 돗자리를 펴고 컵라면에 소주를 병나발 불거나, 파전에 막걸리가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나름 기반들을 다져 취향들이 한결 고급스러워져 있었다.

문득 공중에서 나부끼는 촌스러운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20○○년 S대 건축학과 동문회. 추억의 밤.」

전반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한 건축학도들만의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언니?”

오래된 감상에 젖어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친숙한 부름이 들려왔다. 돌아서자 그곳에 나란히 팔짱을 낀 남녀가 서 있었다. 도준과 수경이었다.


“수경 씨?”

조금 어리벙벙하던 다정의 얼굴에 곧 화색이 돌았다. 그에 어머나! 하고 놀란 소리를 낸 수경의 눈길이 다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언니였네요? 세상에.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몰라볼 뻔했어요. 난 무슨 영국 왕세자 비인 줄.”

수경이 칭찬을 남발하며 특유의 웃음소리로 깔깔 웃었다. 오늘을 위해 잔뜩 힘을 준 건 사실이라 다정도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솔이는 청담동 며느리 같다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꾸민 티가 너무 나는 모양이다.


“아…… 너무 과한가요?”

“아뇨! 전 남친 결혼식에 복수하러 가는 여자처럼 정말 예쁘단 뜻이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아…… 다행이다.”

다행인 건가? 저조차도 확신이 없어 다정은 그냥 하하, 웃고 말았다.

수경과 화끈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다정의 눈길이 그녀의 곁에 선 남자에게 옮겨 갔다. 눈이 마주치자 도준이 애틋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지내지?”

다정도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언제고 이렇게 편하게 마주 볼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왔다는 사실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그럼요. 잘 지내요. 선배도 좋아 보여요. 그날 그렇게 헤어져서 아쉬웠는데, 두 사람도 화해한 것 같아 다행이고요.”

지난번 강변 레스토랑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도준이 예민하게 굴며 수경을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돌아서기에 내심 저 때문에 둘 사이가 어그러지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더랬다.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그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가 봐요.”

불쑥 끼어든 수경이 발전한 관계를 뽐내듯 도준에게 더욱더 몸을 밀착했다. 도준은 겸연쩍어 하관만 쥐고 문질렀다.

예전이라면 제멋대로라며 화를 냈을 텐데, 수경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확실히 달랐다. 뭐가 되었든 수경과의 관계가 발전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나지 않는 동안 그녀가 그리웠고 다시 만났을 땐 기뻤다. 그 감정들이 보통 이상으로 특별하다는 것을 도준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쳐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다정을 향한 마음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그 마음이 그의 등을 다른 이에게 떠밀었는지도.

혹은 인정해 버리고자 하였다. 앞으로도 내 것이 될 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수경에게 동문회에 같이 가자고 청한 것은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한 가닥 미련조차 잘라내 버리고 싶은 의지였다.

그런데 다정과 마주하는 지금 순간, 어째서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드는 건지 도준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진짜 어쩐 일이야? 이런 거 관심 없었잖아.”

그나저나 도준이 어쩐 일이냐는 듯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껏 동문회를 비롯해 다정은 각종 모임에 얼굴을 비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불참하리라 예상하는 건 당연했다.


“네, 얼마 전까진 생각도 못 했는데 이번엔 안 오면 안 되겠더라고요.”

푸념처럼 말하며 다정은 찌푸려 웃었다. 저와 시우가 지저분한 구설에 시달리는 현 사태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것조차 구차하게 느껴졌다.


“오면 온다고 말을 하지. 그랬으면 데리러 갔잖아.”

“선배도 참. 멀쩡한 여자친굴 두고 왜 날 데리러 와요?”

다정이 핀잔하자 수경이 새초롬 눈을 흘기며 동조했다.


“이 남자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어쩌겠어요?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수경 씨가 갱생시켜야죠.”

까르르 웃는 두 여자 틈에 끼여 도준은 목만 큼큼 다듬었다.

다정은 두 사람 틈에 끼어 자연스럽게 회장으로 들어섰다. 대부분 파트너와 동반해 있는 터라 다소 겸연쩍었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입장해 주어 민망함을 덜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입장을 가장 반긴 이들은 저만치서 옹기종기 담소를 나누던 성우 내외였다.


“유다정, 이 기집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성우와 부부 동반으로 함께 온 혜진이 격한 포옹으로 다정을 반겼다. 학교 때부터 친분이 있던 터라 못 보고 지냈던 시간만큼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사람들, 특히 동문회장 하태용에게만큼은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은 뒤에야 다정은 뷔페 음식을 담아 적당한 테이블을 꿰차고 앉았다. 도준 커플과 성우 내외도 함께였다.


“하여간 음흉한 새끼. 이런 미인을 감춰 두고 여태 아무도 없는 척했던 거야?”

절친인 자신도 모르게 미모의 제수씨가 있었다는 사실에 성우는 몇 번이고 혀를 내둘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도준이 나름 변명을 하지만, 성우의 배신감은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그 무렵 한쪽에 마련된 단상 위에선 동문회장의 인사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술이 올라 벌써 혀가 반쯤 돌아간 채였다.

사회를 보는 누군가가 몹시 극적으로 그의 재혼 소식을 알렸고, 몇몇 인사의 축하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술도 한 잔 기울고, 한 잔이 두 잔이 되자 우아하고 격조 높은 공간도 도떼기시장처럼 서서히 어수선해져 갔다.

저만치에선 부어라 마셔라, 또 저만치에선 누군가 걸쭉한 가락을 한 곡조 뽑아냈고, 저만치에선 수다를 떠는 여자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행과 적당히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해 나갈 때였다. 몇 쌍의 남녀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어슬렁 다정의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퍽 유쾌하지 않은 유언비어를 퍼트렸을 거로 예상되는 고서원과 그 똘마니들이었다.


“도준 오빠!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지금 딱 마주친 것처럼 서원이 반갑게 목소리를 키웠다.

1차 표적이 다정인 걸 뻔히 아는데, 다이렉트로 공격하기 뭐 했던지 서원은 학교 때 친하게 지낸 적도 없는 도준에게 살가운 척 엉겨 붙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근데 이분은 누구세요? 여자친구? 반가워요, 고서원이라고 해요.”

서원이 수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이수경이에요.”

수경과 손끝을 맞잡고 가볍게 흔든 뒤 서원이 함께 서 있는 빼빼한 남자를 소개했다.


“참, 이쪽은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한강병원 닥터.”

“처음 뵙겠습니다. 마상호라고 합니다.”

남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이쯤이면 부러움의 탄성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어째선지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전도유망한 ‘닥터’가 신랑감임을 내세워 어깨에 잔뜩 힘을 줄 요량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서원은 재빨리 다정에게 관심을 돌렸다.


“어머나! 다정아, 너도 있었구나. 이게 얼마 만이니?”

“오랜만이다.”

다정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온다고 말은 했어도 진짜 올 줄은 몰랐어.”

“말했잖아. 깊은 오해가 생기기 전에 풀 거라고.”

“그럼 그럼. 그런 헛소문이 진짜처럼 떠돌게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서원이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니들도 다 알지? 다정이가 유부남이랑 애까지 낳았다는 소문 말이야.”

“야! 고서원!”

도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서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왜들 그래요? 뒤에서 수군거리고 앞에서만 입 다물고 있으면 착한 사람이에요? 왜 야비하게 나만 나쁜 사람 만들어요? 솔직히 여기 있는 사람들 그 소문에 대해서 다 알잖아요.”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로 집중되고 침묵이 내깔렸다. 그 와중에 내심 궁금했던지, 좌우로 눈치를 살피던 성우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다정아. 아니지……?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자 혜진이 닥치라며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다정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거 다 헛소문이에요.”

성우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아, 그럴 줄 알았어. 다정이가 그럴 리 없지. 학교 다닐 때도 제일 성실했는데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낸 거야?”

“하지만 아이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결혼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왜냐하면, 제가 비혼주의거든요.”

다정의 목소리가 힘있게 울렸다. 장내에 다시금 정적이 깔리는가 싶었는데, 서원이 픽 코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시네. 얘, 둘러대려면 좀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 비혼주의? 그렇게 우기면 좀 낫니?”

비아냥거리던 서원이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더니 다정이 입은 원피스를 유심히 살폈다.


“얘, 너 직장인이라며? 직장인이 무슨 재주로 이런 명품을 주렁주렁 걸치고 다녀? 애 아빠라는 소문의 그 유부남이 사 준 거 아니니?”

소문의 그 남자가 유부남은 아니나, 애 아빠가 사 준 건 맞기에 다정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오해가 크네. 그 사람 유부남 아니야. 대체 그런 헛소문은 누가 퍼트린 거니?”

“그럼 애 아빤 누구야? 애 아빤 있을 거 아니야? 유부남 아닌 거 어떻게 증명할 건데?”

“아이 아빠는…….”

그때 뚜벅뚜벅 이어지던 발소리가 멎고 등 뒤에서 부드럽게 뻗어온 손길이 다정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흠칫 어깨를 떨며 눈길을 돌리려던 순간, 뺨 위로 말캉한 입맞춤이 스쳤다.

쪽.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다정은 숨을 꿀떡 삼켰다. 진하게 밀려드는 체향만으로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자기, 오래 기다렸지.”

 


믿기지 않았지만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요즘 세상에서 제일 좋은 그 남자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차정혁 씨?”

“어머! 다정아, 누구셔?”

감탄사처럼 내뱉은 혜진의 두 뺨이 발그레했다. 즉각 뾰로통해진 성우가 온 얼굴로 질투심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남자는 대강 주위를 크게 돌아보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애 아빱니다.”

찬물을 끼얹듯 사위가 고요했다. 그때 길어지는 정적을 뚫고 혜진이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정이 남편분이시구나!”

“아뇨. 남편 아니고, 그냥 애 아빠.”

다시 한번 못 박아 말하는 그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번졌다.

* * *



“두 분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첫 키스는 어디서 했어요?”

“애칭 같은 거 있어요? 뭐라고 불러요?”

어느새 주위로 몰려든 여자들이 이것저것 시끄러운 질문을 던져 댔다. 철없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대부분 아직 20대인 후배들이었다.


“처음 만난 건 5년 전 스페인. 첫 키스도 첫날밤도 전부 스페인에서.”

꺄, 하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부끄러움은 제 몫이라 다정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왜 묻지도 않은 말까지 지껄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호칭은…….”

잠시 고민하던 정혁이 다정에게 슥 돌아간 눈길을 원위치했다.


“난 아기, 저 여잔 자기. 합쳐서 아기자기.”

대충 지어 던진 말에 또다시 꺄, 하고 환호성이 터졌다.


“두 분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스페인에서부터면 5년?”

수경을 반대편으로 내쫓고 다정의 옆자리를 꿰찬 정혁은 삐딱하게 앉아 턱을 기울였다.


“만난 건 5년 전인데, 사귄 지는 한 달?”

이번엔 경청하던 이들의 고개가 꺄우뚱거렸다. 아이가 다섯 살인데, 누가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다.

얼떨떨한 반응에 정혁이 타이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말하자면 애부터 낳은 사이지.”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지만, 정혁은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지껄였다.

몇몇 호탕한 남자 선배들이 얌전한 고양이를 들먹이는 바람에 다정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래서 연애라도 해 보려고. 결혼까지 하면 더 좋고. 근데 유다정이 결혼은 싫대서 내가 목메는 중이고.”

여기저기서 어떡해, 라며 속상한 탄식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질타의 눈빛들이 날아와 새빨개진 다정의 얼굴을 강타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깊어지는 이 가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기억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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