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완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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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완벽해요
2023.07.02.
부아앙! 다소 요란한 소음을 일으키며 달려온 차는 대강 백화점 정문 언저리에서 멈춰 섰다.
블랙과 레드로 조화롭게 도색된 슈퍼카는 고급스러운 광채를 발하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혁은 화려한 슈퍼카를 아무렇게나 방치한 뒤 다정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백화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보폭을 쫓느라 종종걸음치던 다정은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세상 비싼 차를 타고 와 둘도 없이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왔는데, 어째서 부끄러운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여자가 돈이 많은가 보다 싶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평범한 여자도 덩달아 눈에 띄었다.
슈트 차림이 아닌 캐주얼하고 편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본 보안 요원들은 어딘가로 다급히 무전을 치기 바빴다.
정혁은 보통 손님들이 다니는 경로가 아닌 은밀한 곳으로 다정을 안내했다. 도착해 보니 승강기 문에 「임직원 전용」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임직원 전용 승강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VIP 라운지였다. 문이 열리자 그를 알아 모시는 직원들이 벌써 떼를 지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본점 총괄 매니저가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전무님. 연락도 없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돈 쓰러 왔으니까 긴장하지 마시고, 가서 퍼스널쇼퍼 불러와요.”
짤막하게 지시한 정혁은 곧장 라운지의 개별 공간으로 향했다.
호사스럽게 꾸며진 개별 응접실은 널찍하기도 해서 흡사 호텔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이런 곳은 난생처음이라 다정은 긴장한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고민하던 다정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기…… 차정혁 씨. 이런 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냥 평범하게 쇼핑하면 안 돼요?”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진 정혁이 나른한 눈길을 힐끔 들어 올렸다.
“뭐 하러, 귀찮게.”
단호했다. 옷 한 벌 사달라고 했다가 별별 경험을 다 하는 그녀였다.
곧이어 퍼스널쇼퍼가 한 무리의 직원들을 잔뜩 몰고 와 옷이 걸린 행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더불어 소파 중앙에 하느작 몸을 늘어뜨린 정혁의 돈질도 시작되었다. 다정에겐 수난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재연될수록 십 수벌의 옷과 구두, 가방 같은 것들이 구매 목록에 차곡차곡 이름을 올렸다.
얼마 후 인형 놀이를 당하느라 완전히 녹다운된 다정은 결국 소파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 힘들어요…….”
더는 못 한다며 징징거리는데 문득 몸에 걸친 원피스의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을 확인한 다정은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차정혁 씨. 이거 너무 비싸요. 그리고 동문회 갈 때 입을 옷 한 벌만 있으면 되는데, 너무 많아요.”
애원처럼 말하는 다정의 얼굴에 부담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관자놀이를 괸 정혁의 눈길이 다시 한번 올라섰다.
“동문회 갈 때 한 벌 입고 나머지는 유치원 갈 때 입으면 되겠네.”
“유치원 갈 때마다 이런 옷을 빼입으라고요? 난 못 해요!”
다정이 학을 떼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그가 킥, 하고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럼 시장 갈 때 입어.”
* * *
두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쇼핑도 끝이 났다. 퍼스널쇼퍼와의 상담과 조언을 통해 과한 소비가 이루어졌고, 그제야 정혁은 만족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무님. 차량은 VIP 전용 주차장으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정문으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됐어요. 직접 내려가요.”
정혁이 직원의 손에서 스마트키를 넘겨받았다. 그러곤 다정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유유히 돌아섰다.
엄청난 돈을 쓰고 나섰는데, 손에 든 짐은 하나도 없었다. 주소지로 배송까지 해 주는 특급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시 임원 전용 승강기에 올라 다정은 휴, 하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저 동문회에 나가 기죽지 않을 만큼 멋진 옷 한 벌이면 됐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만치 무겁게 내쉬는 한숨이 정혁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나 방금 차 한 대 값을 쓰고도 대접 못 받는 기분이라 별로야.”
“…….”
다정은 아, 하고 짧게 신음했다. 다정이 원한 건 차가 한 대냐, 두 대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급격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순한 남자가 토라지기 직전이라 다정은 얼른 몸을 돌려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당분간 옷 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푸스스 애교스럽게 웃어 보이자 더 토라진 척을 못 하겠던지, 그도 피식 웃는다.
“정말 그거면 돼?”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수리에 코를 문질러 대던 그가 물었다. 다정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옷, 구두, 가방, 주얼리까지 다 장만해 줘 놓고 또 뭘?
“아뇨, 완벽해요.”
도리질을 친 다정은 활짝 웃었다. 진짜 완벽한 건 쇼핑한 물건들이 아니라, 눈앞의 이 남자였다.
* * *
주차장에 도착한 정혁이 스마트키를 쥔 손을 뻗었다. 딸칵. 딸칵딸칵. 어째선지 빵! 하는 익숙한 소음은커녕, 휘황찬란한 생김새의 자동차도 한눈에 잡히지 않는다.
“여기 맞아요?”
다정이 의아한 투로 묻자 정혁이 눈썹을 으쓱했다.
“기다려 봐.”
귀찮은 투로 중얼거린 그는 느릿하게 건널목을 건너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층을 착각한 게 아닌가 했지만, VIP전용 주차장은 지금 있는 층에만 있었다.
정혁의 말대로 묵묵히 기다리던 다정은 언제부터인가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사라지고 1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뺨을 부풀리며 약간 불안하게 좌우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혁이었다.
“찾았어요?”
『VIP 전용 주차장이 아래층까지 확장됐대.』
“찾았으면 됐죠. 내가 내려갈까요?”
『기다려, 지금 올라가.』
“네, 알겠어요.”
통로 중앙으로 걸어 나간 다정은 목을 빼고 차가 올라오는 지점을 주시했다.
“아직 안 보여요.”
그때였다. 등 뒤에서 빠앙! 하고 울린 거친 클랙슨 소음에 지하층이 다 들썩였다. 깜짝 놀란 다정은 그만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
너무 놀라 식겁한 얼굴로 돌아보자 하얀색 외제 차량이 다정의 얼굴을 향해 위협하듯 상향등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줌마! 죽고 싶어? 길 막지 말고 비켜!”
다짜고짜 언사가 거칠었다. 손을 들어 불빛을 차단한 다정은 얼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그런데 가만, 휴대폰을 줍다 보니 주차장 바닥에 그어진 일방통행 표시가 눈에 띄었다.
애초에 차가 오는 방향을 짐작해 정혁이 올 거라며 반대편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 차가 등 뒤에서 나타나지 않았던가.
주차장이라 도로교통법이 적용되진 않는다지만, 통념상 명백한 역주행이고 소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위협에 가까운 고성방가는 엄연히 몰상식한 행위였다.
“아줌마! 비키라니까!”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손을 뻗어 비키라 손짓했지만, 다정은 통로 중앙에 선 채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괘씸한 운전자가 저지른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기 위해서였다. 참다 못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내려서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뚜벅뚜벅 다가선다.
“이 아줌마가 진짜!”
어딘가 말투가 귀에 낯설지 않다고 생각할 무렵,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등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남자도 다정을 알아보고 혀를 찬다.
“뭐야? 또 아줌마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냉면집에서 진상을 피우던 그 남자를 여기서 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누가 할 소릴? 또 아저씨였어요?”
“이 아줌마가 사사건건. 아줌마 스토커야?”
남자가 삿대질을 하며 불쾌하단 듯이 쏘아붙였다. 그 역시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그 당시 냉면집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자 혈압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아저씨야말로 왜 자꾸 내 눈앞에 알짱거려요? 그리고 왜 자꾸 반말이에요? 짜증 나 정말.”
“뭐어?! 이 여자가 근데―!”
“오빠. 무슨 일이야?”
상황이 쉽게 정리되지 않자 조수석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한 여자가 내려섰다. 그러곤 총총 걸어와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 매달렸다.
브랜드 로고가 큼직한 명품백을 어깨에 메고 미니스커트와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여자였는데, 배가 납작하다 못해 홀쭉했다.
말인즉, 남자가 백화점에서 명품백을 사 안긴 여자는 둘째를 임신한 채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던 그 여자가 아니란 소리다.
다정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생긴 대로 논다더니, 진짜 가지가지였다. 다정이 콧방귀를 뀌자 여자가 보챘다.
“오빠, 저 여자 아는 여자야?”
“아, 아니야. 애기는 차에 타고 있어.”
남자도 조금 켕기긴 하는지, 어린 애인을 대놓고 자랑할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다정의 눈 속에 한심함과 경멸이 어울어졌다. 그 눈초리와 마주한 남자가 다급히 손사래를 친다.
“아줌마. 오해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뭐가 오핸데요? 임신한 와이프 두고 어린 여자랑 바람피운 거 말하는 거예요?”
“이 아줌마가 말이면 단 줄 아나? 누가 바람을 피워? 얘는…… 얜 내 조카야!”
남자가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변명을 지껄였다. 제 발이 심하게 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바람피우는 거랑 아줌마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죠. 단지 자기 남편이 어린 여자랑 이러고 다니는 줄도 모르고 둘째 낳아 주겠다며 갖은 고생 마다치 않는 아저씨 부인이 불쌍할 뿐이에요.”
“아니, 근데 이 여자가 말이면 단 줄 아나. 확 그냥!”
타고난 인간성은 바뀌지 않는다. 냉면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자가 손찌검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때 부아아아아앙! 거친 엔진음을 울리며 차 한 대가 돌진해 왔다.
쏜살같이 달려온 차는 마치 아슬아슬한 퍼즐 게임처럼 하얀 외제 차를 스칠 듯 멈춰 섰다. 동시에 두 차량의 사이드미러가 충돌하며 콰직,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이어서 슈퍼카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퍽, 하고 하얀 외제 차의 반질반질한 옆면이 움푹 우그러져 들어갔지만, 차에서 내린 남자는 아랑곳없이 굳이 좁은 틈을 비집고 내렸다.
그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다정의 휴대폰이 뚝, 소리를 내며 통화 종료를 알렸다. 그제야 다정은 내내 그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제 자동차에서 떨어져 나간 사이드미러를 보며 남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이, 이이, 이거 어떡할 거요?! 난 가만히 서 있었어. 이거 당신 과실이야! 어?!”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발작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남자의 호통에 정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네. 내 과실로 망가졌으니까 물어줘야겠네. 어떻게, 이 정도면 되나?”
정혁이 지갑을 벌려 수표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액수를 확인한 남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제 차 수리비가 아무리 비싸대도 이 정도면 고민없이 합의할 용의가 있었다.
남자가 큼큼 목소리를 다듬었다.
“뭐, 합의하자고 하니까 오늘은 좋게 넘어가는 거요. 조심하슈.”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서는데.
“어이, 아저씨. 그냥 가면 어떡해?”
“에? 뭘……?”
“내가 아저씨 차 수리비 줬잖아. 그럼 아저씨도 내 차 수리비 줘야지.”
“…….”
합의금을 받았다며 화색이 띠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되고 말았다.
“아니, 박은 건 그쪽인데 내가 왜?!”
남자가 펄쩍 뛰었다. 딱 봐도 중저가 외제 차와 슈퍼카의 수리비는 비교 불가였다.
“아저씨 역주행해서 길 막았잖아. 통행에 지장 줘서 사고를 야기했으니까 아무리 쌍방이라도 아저씨 쪽에 과실이 더 큰 건 알지?”
“이봐요, 그건…….”
“됐고, 긴 얘기는 내 변호사랑 해. 난 우리 애기랑 데이트하러 가야 해서.”
* * *
“세상에! 이 원피스 뿌아○ 거 아냐?”
명품 원피스를 착용한 친구의 모습에 솔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한 핏을 자랑하는 원피스뿐 아니라 백과 구두, 주얼리까지 완벽했다.
“어, 어때?”
제 모습이 어색한 듯 다정이 수줍게 물었다.
“대박! 완벽해. 완전 청담동 며느리 같아. 어후, 좋겠다 지지배.”
엄지를 추켜세운 솔이의 두 눈이 부러움에 사무쳐 그렁그렁했다.
“시우야, 니 엄마 봐봐. 너무 예쁘지?”
“어! 네에!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모를 따라 시우도 쌍 엄지를 추켜세웠다. 다정은 무릎을 굽히고 활짝 웃었다.
“우리 시우. 엄마 다녀올 때까지 이모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네에!”
“넉넉히 세 시간만 부탁할게.”
커피숍에 시우를 데려다 놓고 다정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솔이도 요샌 준호와의 데이트 때문에 바쁜 눈치라 조금 염치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뭘. 신경 쓰지 말고 넌 쓸데없이 입 놀리는 것들 주둥이나 납작하게 눌러 주고 와. 알았지?”
“알겠어, 아주 납작하게 뭉그러뜨리고 올 테니까 걱정 마.”
다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