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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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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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유언비어
2023.06.29.
“처음부터 그런 예감이 들었어요.”
침대에 엎드려 다크블랙 피규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경이 나직이 읊조렸다.
“무슨 예감요?”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워 도준은 수경의 벗은 팔꿈치를 희롱하듯 간지럽혔다.
“도준 씨가 나한테 순순히 안 넘어올 것 같은 예감이요.”
나른한 충일감으로 물든 도준은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예감과 달리 굴복해 버리고 만 결과를 선선히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수경이 도준 쪽으로 몸을 돌려 웅크렸다. 충만한 감정들로 반짝거리는 두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이렇게 넘어왔네요.”
“네, 넘어갔어요.”
“난 내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한 적이 없다고요.”
수경이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도준은 다시 한번 나른하게 웃었다.
“욕망덩어리네요. 방금 다크블랙 같았어요.”
그녀가 방금까지 만지작거리던 다크블랙 피규어를 도준이 힐끗 눈으로 가리켰다.
“다크블랙 팬으로선 최고의 칭찬인데요?”
“수경 씨는 다크블랙 같은 악당이 왜 좋습니까?”
“집요하잖아요. 원하는 걸 위해선 목숨도 아끼지 않는 끈기가 나랑 닮았어요. 가끔 구질구질해질 때도 있지만요.”
그 대목에서 수경이 밉다는 듯 눈을 흘긴다. 시선을 외면하는 도준은 어째선지 켕기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도준 씨는요?”
수경의 반문에 도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난…… 욕망에 뻔뻔한 점이 부러워서요.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거침없는 그 자신감도 부럽고.”
“음, 알 것 같아요. 사람의 내면엔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경우 악당도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강한 인간 유형은 약간 다르지만요.”
말끝에 수경이 가볍게 웃었다.
“그런가 봐요. 죽었다 깨어나도 난 다크블랙처럼은 못 하겠죠.”
“어째서요? 욕망은 타고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누구나 욕망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자신감과 도전정신이라고요. 도준 씨도 힘을 내봐요. 나처럼요.”
명쾌하면서도 명랑한 여자였다. 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이수경 씨. 다음 주 주말에 뭐 합니까?”
“글쎄요, 도준 씨랑 같은 침대에 있지 않을까요?”
“그럼 다음 주말에 나랑 어디 좀 갈래요?”
수경이 활짝 웃었다. 그녀의 두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기꺼이요.”
* * *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마치자마자 정애는 다시 청주로 내려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보통 쇠심줄이 아닌 터라 다정은 금세 백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청주 집까지 모시고 가겠다고 했으나, 정애는 한사코 마다하며 터미널에서 청주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보며 다정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만에 내려갈 거면 차라리 올라오지를 말지. 엄마는 하필 그 봉변을 목격하고 시우 아빠의 존재까지 알아 버리려고 마침, 그날 딱, 그 시간에 집으로 들이닥쳤나 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랴. 다정은 한숨이 깊었다. 고개를 잘잘 저으며 주차장으로 향할 때였다. 별안간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정은 뚱한 얼굴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다정아, 오랜만이다.』
고서원. 남학생들에게 주로 ‘공주님’이란 애칭으로 불리우는 다정의 대학 동창이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그런데 어쩐 일이야?”
『너 이상한 소문 돌더라?』
“이상한 소문?”
다정은 의아해서 눈썹을 들추며 차에 올랐다.
『너 애 있다며?』
“응, 그런데?”
무슨 큰 문제라도 되느냐 말하자 상대 쪽에서 코웃음을 쳤다. 이 뻔뻔한 태도는 뭐냐는 투다.
『어머, 다정아. 너 뭐니? 도둑 결혼했니? 아님, 유부남 애라도 낳았어?』
다정의 검미가 빠직 일그러졌다.
“야. 고서원. 너 지금 뭐 하냐?”
이쯤 되자 서원이 전화를 건 목적과 의도가 대략 분명해졌다. 생전 전화 한 통 없는 애가 전화했을 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서원이 거드름을 피웠다.
『오해하지 마. 동기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도는데, 듣고 있기 민망하더라. 다들 알지도 못하면서 말조심하라고 내가 따끔하게 한 소리 했어.』
따끔한 소릴 한 게 아니라, 그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장본인이 너겠지.
학교 때부터 그랬다. 고서원은 누군가 자신을 제치고 칭찬을 받거나 주목받는 꼴을 못 보는 애였다.
과제가 훌륭하다며 교수님이 다정을 칭찬하면 세상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여기저기 분풀이를 하고 다녔고, 다정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모든 게 완벽한 애가 매번 다정에게 장학금을 빼앗기니 심술이 날 만도 했을 거다. 다정으로선 장학금을 놓칠 수 없기에 절박했을 뿐인데, 고서원은 다정이 절 이겨 먹으려 발악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다정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대체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다니는 건지 궁금하네.”
『유언비어가 확실하면 이번 동문회에서 해명하면 되겠네.』
“해명? 내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한다, 너?”
『아니, 난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게 안쓰러워서 그렇지. 서로서로 억울한 오해는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
심호흡한 다정은 턱을 주억거렸다.
“그래,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네.”
『그럼 이번 동문회에 오는 거니?』
“응. 억울한 오해는 사지 말아야지.”
귀에서 휴대폰을 뗀 다정은 깜빡거리며 통화 종료를 알리는 휴대폰 화면을 쏘아보았다.
“그깟 동문회 나가지 뭐.”
다정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자신은 괜찮았다. 하지만 시우가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느니 하는 구설에 휩싸이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건지, 잡히기만 해 봐라.
* * *
유치원에서 돌아온 시우는 간식을 먹고 약속대로 30분간 휴대폰 게임을 한 뒤 책을 읽었다.
다정도 틈틈이 도면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손목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져 파스를 한 장 꺼내 붙였다.
며칠 전 선영 모녀가 들이닥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은 뒤로 손목 통증이 도졌다.
미안해하는 기색이라 정혁에겐 작업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그날 마구잡이로 움켜쥐고 힘을 쓴 탓에 병이 단단히 도진 것 같았다.
내일 당장 병원에 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손님을 보며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차정혁 씨가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묻자 정혁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구겨졌다.
“유다정. 정 없이 말하지 마. 손님처럼 대하지도 마. 넌 이름만 다정이지, 하나도 안 다정해.”
정혁이 불만을 토로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엄마는 내려가셨죠.”
“벌써?”
말끔한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여실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애가 있었더라면 우리 ‘차 서방’ 하고 간드러지게 말하며 반겨 주었을 테다.
정혁이 현관으로 들어서고 막 문이 닫히려던 차에 누군가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왔어.”
솔이였다.
“저도 왔습니다, 제수씨.”
솔이의 머리통 위로 준호도 쏙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 어쩐 일이에요?”
뭐 하자는 수작인가 싶어 다정이 미심쩍게 눈초리를 빛내자 준호가 손에 쥔 커다란 상자를 들어 보였다.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 다 같이 먹으려고 가지고 왔어요.”
준호가 곰처럼 푸근하게 웃는다.
* * *
“움직이잖아.”
다정이 약간 겁을 먹은 투로 말했다. 그러자 솔이가 자연스럽게 받는다.
“살아 있으니까 움직이는 건 당연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다정이 고민스레 말하자 솔이가 턱을 쥐고 심오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그러곤.
“등딱지를 먼저 분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밥을 비벼 먹지.”
“분리를 어떻게 하는 건데?”
“그보다 계속 움직이는데, 일단 죽여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물에 담가서 익사시킬까?”
다정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솔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에 사는 애가 과연 물에서 익사할까? 차라리 냉동실에 넣어서 동사시키자.”
“그건 너무 오래 걸리지.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꺼내면 죽어 있지 않을까?”
“산 채로? 어후 잔인한 기집애…….”
솔이가 으으으 소리를 내며 진저리를 쳤다.
식탁에 앉아 두 여자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정혁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익히기만 해도 맛있다는 꽃게를 왜 그냥 쳐다보고만 있는 건데? 아마 먹을 줄이나 알지, 해본 적도 없을 거다.
“여자가 둘이나 있는데, 지금 내 아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밥을 못 먹고 있네?”
침묵을 깨고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다소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강했다.
딱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라는 듯 시우의 눈길이 대각선 방향으로 올라선다.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할 말은 하는 아빠가 시우는 자랑스러웠다.
꽃게 손질도 못 하냔 비난에 여자로서 제법 자존심이 상한 다정이 반격했다.
“차정혁 씨. 지금 발언 성차별인 거 알아요?”
“성차별 듣기 싫으면 비켜.”
정혁이 손끝을 까딱거리며 두 여자에게 조리대에서 떨어지라 손짓했다. 그러곤 곧장 준호에게 눈길을 던진다.
“뭐 해? 성차별 듣기 싫다잖아.”
정혁의 한마디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식모처럼 열심히 육쪽마늘을 까던 그가 탈탈 손을 털고 일어났다.
“솔이 씨, 잠깐 나와 보십시오.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어쩜, 준호 씨 멋져용.”
“하하하하!”
* * *
탕이나 무침, 튀김 등의 다양한 꽃게 요리를 기대했으나, 시간 관계상 배고픈 시우를 위해 손질된 꽃게들은 곧장 찜통으로 직행했다.
초대받지 않은 커플은 든든하게 저녁을 먹은 뒤 야심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민 실장이 찾아왔다.
“전무님. 막 도착해서 뜨끈뜨끈합니다. 아침하고 저녁 하루에 2봉씩 드시면 됩니다.”
“수고했어요.”
네모진 상자를 건네받은 정혁이 그걸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유다정. 이거 먹어.”
“이게…… 뭐예요?”
다정의 눈길이 수상쩍다는 듯 상자와 정혁의 얼굴을 번갈아 향했다.
“좋은 거랬는데…… 민 실장 뭐랬지?”
“네! 이건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보약입니다. 뼈째 푹 삶은 가물치, 그리고 청정 자연에서 키운 지렁이와 전통 초가지붕에서 자란 토실토실한 굼벵이를 적절히 조합해서 만든 보약으로…….”
“그, 그만……!”
다정이 말을 막자 입을 합 다문 민 실장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질색팔색하며 다정은 상자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얼굴이 허옇다 못해 퍼렇게 질려 가는 걸 보며 정혁이 설득하는 투로 말했다.
“여자는 출산하고 몸조리를 잘해야 된대.”
“시우 낳은 게 5년 전인데, 지금 갑자기 몸조리를요?”
“그러니까 미리, 미리 회복을 해야 나이 들어 고생을 안 하는 거야.”
“차정혁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 아픈 데 없어요. 그러니까 도로 가져가요.”
정혁의 눈가가 슬그머니 일그러진다. 기껏 생각해서 어렵게 재료를 장만해 만들어 왔더니, 감동하지는 못할망정 껄쩍지근한 반응이 영 탐탁하지가 않다.
“왜 아픈 데가 없어 너 손목 아프잖아.”
“그건 고질병이라고 했잖아요.”
“거짓말하지 마. 유시우 키우면서 망가진 거잖아.”
“누가 그래요?”
“다 그래. 여자들 애 안아 키우면서 손목 다 나간다고.”
“…….”
다정은 입을 다물었다. 요즘 들어 정혁은 아는 게 참 많아졌다. 덕분에 지금처럼 받아칠 말이 궁색해지곤 한다.
언쟁 끝에 승기를 쥐었다 판단한 정혁은 못을 박았다.
“나이 들어서 고생하기 싫으면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챙겨 먹어.”
* * *
스포츠 채널에선 때 지난 축구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무심코 TV를 보던 정혁의 귀에 때때로 칭얼거리는 소리가 잡혔다. 눈길을 돌리자 다정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괴로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어르고 달래 보약을 먹였다고 이러는 거다. 겉보기엔 일반 한약과 다를 게 없는데, 아무래도 원재료의 정체를 알아 버린 탓에 섭취가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괜히 말했단 생각이 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랴.
픽, 코로 웃으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정혁은 다시 TV로 눈길을 돌렸다.
“차정혁 씨. 나 부탁 있어요.”
뜬금없이 흘러나온 말에 정혁의 눈길이 축구 경기에서 멀어졌다.
“무슨 부탁?”
“옷 좀 사 줘요.”
그녀의 이런 요구가 처음이라 정혁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요?”
동그래진 눈을 끔뻑이던 다정이 풉, 하고 웃었다.
“그런 거 없어요. 사실은 다음 주에 대학 동문 모임이 있거든요…….”
그런데? 라는 듯 그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얄미운 애가 하나 있는데…… 근사하게 등장해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어서요.”
“…….”
“근데 알다시피 내가 그런 재주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나보단 차정혁 씨 안목이 허례허식에 더 적합한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예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어.”
정혁의 눈살 한쪽이 가늘어졌다. 왜인지 뜨끔해서 다정은 배시시 웃었다.
“당연히 칭찬이죠. 어때요? 사 줄래요?”
다정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자 고민하는가 싶던 정혁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였다.
“뭘 물어? 오빠 카드는 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