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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자네만 믿네 (93/114)


93화 자네만 믿네
2023.06.22.


모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거실까지 밀고 들어왔다. 난데없이 밀어닥친 통에 얼결에 머리채가 잡히고 만 다정은 실랑이 끝에 선영의 손목을 붙잡아 제 머리에서 떼어냈다.

다정이 매섭게 으름을 놓았다.


“이거 지금 무단 가택침입에 폭행이에요! 알 만한 분들이 왜 이러세요?!”

“그걸 아는 X이 남의 남자를 넘봐?!”

조롱하듯 내뱉은 현아가 시근거리며 핸드백을 높게 쳐들었다. 다정은 재빨리 선영을 밀치고 허공에서 날아드는 핸드백을 붙잡아 세웠다.


“누가 남의 남자란 거예요?! 결혼 깨진 지가 언젠데! 그리고 넘보긴 누가 넘봤단 거예요? 차정혁 씨랑 나 정식으로 합의하고 교제하는 거거든요!? 악!”

다정이 말끝에 비명을 질렀다. 현아와 실랑이를 하는 틈을 타 선영이 다시금 덤벼 뒷머리를 그러쥔 까닭이었다.

다정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줌마! 이거 못 놔요?”

상황이 이쯤 되자 이사장이고, 원장이고 없었다. 다정의 으름에도 선영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합의? 교제? 웃기지 마! 니들 아무도 인정 안 해!”

“다 큰 성인이 좋아서 만나는데, 인정이 왜 필요해요?! 악! 아줌마, 진짜 안 놓을 거예요?! 나 안 참아요!”

“안 참으면 어쩔 건데!”

“꺄악!”

한바탕 악다구니를 쓸 때였다. 퉁!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울림에 모두의 눈길이 현관 쪽 통로로 향했다.

다정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통로 앞에 서 있는 정애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정애가 떨어트린 김치통이 보자기에 곱게 싸인 채 거실 한편을 묵직하게 지켰다.


“어, 엄마…….”

다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선영 모녀가 들이닥친 것보다, 머리채가 붙잡혀 두 여자와 실랑이 중인 이 상황을 엄마에게 들킨 게 더 당혹스러웠다.


“엄마야! 이게 뭔 일이래?!”

뒤따라 들어온 숙희가 아연해 소리쳤다. 그 뒤로 들어선 솔이 역시 집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곤 놀란 숨만 집어삼켰다.

예정에도 없던 정애의 방문은 상황을 180도 뒤바꿔 놓았다. 대강 눈으로 상황을 파악한 정애가 꽥 고함을 내질렀다.


“뭐여? 느덜 지금 내 새끼 머리끄덩이를 쥐어 뽑는 겨?!”

그러고는 들고 있던 손가방을 팩 패대기치더니 냉큼 현아에게 덤벼들었다.


“아나, 같이 뜯자! 이 망할 년들!”

“까악!”

정애에게 뒤통수가 붙잡힌 현아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꺾였다.


“꺅! 이 아줌마 뭐야! 엄마! 엄마아!”

“뭐 뭐야?! 저 여편네! 당장 내 딸 놓지 못해?!”

제 딸 머리채가 잡히자 당황한 선영이 위협하듯 다정의 머리채를 더욱 거칠 게 휘어잡고 흔들었다.


“내 새끼 머리털은 되구 니 새끼 머리털은 안 댜? 아나 떡이다!”

“꺅! 엄마, 어떻게 좀 해 봐! 이러다 현아 머리털 다 뽑혀!”

정애가 머리채를 쥐고 맹렬하게 흔들자 주저앉은 현아가 걸레짝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꽥꽥 비명을 질렀다.

허리도 안 좋은 양반이 기운도 좋단 생각을 하며 다정도 선영의 공격을 가까스로 버텼다.

그즈음 친구를 구명하기 위해 솔이가 다가왔다.


“아줌마! 이것 좀 놔요! 그만하라고요!”

“넌 뭐야, 이 X아!”

“꺅! 이 아줌마 미쳤어! 왜 내 머리를 잡아요?!”

덩달아 머리채가 잡힌 솔이가 빽 소리쳤다.


“아이고! 시우 할머니, 이러다 사람 잡겄어. 아가씨도 그만 놓고 말로 해요.”

숙희도 나서 보지만, 양쪽의 대립은 팽팽했다. 그리고 종국엔 누가 누구를 잡는 줄도 모르게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뒤엉켰다.


“야, 죽여!”

솔이가 소리치자 현아가 자지러졌다.


“꺅, 교양 없는 여자들 같으니라고.”

“미친X! 교양 같은 소리 하네!”

 

  

* * *

삐릭. 삐리릭.

흉흉한 경찰서 안엔 무전기 신호음만 무성했다.

담당 경찰관은 눈앞에 늘어앉은 여자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하나같이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시근거리며 여자들은 허공만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름 뭐예요?”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성의하게 묻는 경찰관과 눈이 마주친 여자가 쭈뼛쭈뼛 제 이름 석 자를 말했다.


“오현아…….”

콧구멍에 화장지를 박은 채로 훌쩍이던 현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다 아, 하고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두피가 죄 뜯겨 나간 것만 같아 머리 쪽엔 손도 못 댈 지경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아아아…….”

선영이 서럽게 흐느끼는 딸의 어깨를 보듬고 다독이지만, 그녀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정애와 숙희는 물론 다정과 솔이의 몰골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산발에 티셔츠는 목이 다 늘어나 있고 콧구멍은 화장지에 꽉 틀어막혀 있었다.


“무단침입에 기물 파손, 그리고 폭행 혐의 인정하시죠?”

경찰관의 말에 선영이 눈을 부릅떴다.


“이것 봐요, 경찰 아저씨. 무단침입은 무슨 무단침입? 초인종 눌렀고 문 열어 주길래 들어간 거라니까.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쌍방 폭행이지. 여기 봐봐, 우리 딸 얼굴 터진 거 안 보여요?”

선영이 제 딸의 턱을 잡고 좌우로 돌려 보이며 항변했다. 경찰관은 눈동자만 들어 현아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곧장 모니터로 시선을 내렸다.


“어쨌든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간 건 맞잖아요. 벽걸이 시계가 깨졌고 소파 가죽도 찢어졌으니까 기물파손죄도 성립하는 거고, 쌍방이든 일방이든 집단 패싸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조서를 꾸미느라 열심히 키보드를 쳐 나가는 경찰관의 중얼거림에 선영이 책상을 탕 치고 일어났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네에, 강선영 씨잖아요.”

경찰관의 대수롭지 않은 응답에 선영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표 비서는 왜 안 오는 거야! 어쨌든 나 이것들 싹 다 고소할 거야. 니들 콩밥 좀 먹어 봐.”

선영이 다정 일행에게 삿대질을 하며 쏘아붙였다.


“엄마야? 고소한다면 무서워할 줄 알고? 우리도 맞고소할 거야!”

숙희가 대거리를 하자 솔이가 동조하며 말을 보탰다.


“엄마. 맞고소 가지고 되겠어? 어디? 한송그룹? 내가 동영상 다 찍어놨어. 재벌 싸모하고 딸내미가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행패 부린 동영상 인터넷에 싹 뿌릴 거야. 제대로 개망신당하고 사회에서 매장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

언쟁이 길어질수록 경찰관의 낯빛이 퀭해 갔다. 난투극을 벌인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급격한 피로는 왜 제 몫인지 경찰관도 의문이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좋게 합의하시고 끝내시죠.”

양측의 원만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회유란 것도 해 보지만, 팽팽한 기 싸움에 이빨도 안 들어간다.

담당 경찰관의 피로도가 꼭대기까지 치받을 무렵, 여러 명의 남자가 경찰서 안으로 다급히 들어섰다.

가장 선두로 들어선 남자를 발견한 이는 현아였다.


“오빠!”

현아가 울먹이며 쪼르르 달려가지만, 정혁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다정에게 향했다.


“유다정! 이게 무슨…….”

요란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콧구멍을 틀어막은 화장지를 보며 정혁이 눈가를 꿈틀거렸다.


“화려하네.”

“…….”

민망해진 다정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의 손이 뺨을 감싸 고정하는 바람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다.


“괜찮아? 다친 덴?”

“괜찮아요. 그런데 차정혁 씨가, 여긴 어떻게……?”

“배솔이 씨가.”

정혁이 다정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턱짓했다. 괜한 짓을 했다며 다정이 눈을 흘기자 솔이가 혀를 빼쭉 내민다.

* * *

일행은 순조롭게 경찰서를 나섰다. 뒤처리는 민 실장과 대동한 변호사들이 맡았다.

「Cafe, Soul.」 카페의 오후는 한적했다.

이곳 방문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정애는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자를 요리조리 날카롭게 뜯어보기 바빴다.


“어, 엄마. 그만 가요.”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안절부절못하던 다정이 정애의 팔을 잡아끌었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그간 두 사람이 마주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건만, 하필 오늘 정애가 연락도 없이 올라올 건 뭐람.

정애는 경찰서에 나타난 남자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보자마자 단박에 애 아버지라 확신했으므로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닌 언내 찾아다가 집에 먼저 가그라.”

“어? 먼저? 그러지 말고 같이 가.”

다정이 다시 한번 정애를 보챘다. 그러자 정애가 붙잡힌 팔을 짜증스레 뿌리치고 엄한 목소리를 냈다.


“아, 글씨 가라 허잖여! 내 이짝헌티 볼 일 쪼까 있응께.”

“무, 무슨 말을 하려고?”

당황한 다정이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이던 다정이 이번엔 정혁을 채근했다.


“차정혁 씨. 차정혁 씨는 그만 가는 게 좋겠어요.”

팔을 잡아끌자 정혁이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어조였다.


“난 어머니랑 얘기 좀 하다가 갈 테니까 유다정은 가서 우리 아들이나 데리고 와.”

“우, 우리 아들…… 누, 누가 우리 아들이에요?!”

아직도 발뺌하고 싶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건지, 다정이 괜히 뜨끔해 언성을 높이자 정혁의 입꼬리가 미끄러진다.


“유시우, 너랑 나랑 해서 만든 거 아니야?”

“…….”

다정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미쳤나 보다. 어른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다급히 정애의 얼굴을 스치고 황당하게 쏘아보는 다정을 보며 그가 씨익 웃는다.


“맞잖아. 우리 아들.”

 

* * *

다정을 쫓아내다시피 한 뒤, 한동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골몰히 보며 정애는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진심이었다. 박 회장도 그렇고 어쩜 볼 때마다 어른들은 저 말을 해 대는지, 귀에 인이 박일 지경이었다.

정애는 피, 하고 입바람 소리를 냈다. 안 어울리게 변죽도 부릴 줄 아는 게, 처음 봤을 땐 딱 밉다가도 괜히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길이 한쪽 어깨에 걸친 재킷 안으로 비치는 팔의 모양을 살폈다.


“팔은 어쩌다가 그리됐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괜찮은가?”

“아뇨. 상당히 불편합니다.”

대화 도중 종종 침묵이 길어지는 건 대답이 너무 솔직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혁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공손하고 또 진솔하려 애를 썼다.

이어지는 정애의 목소리가 무게감 있게 울렸다.


“자네.”

“네.”

“총각인가?”

“네, 아직 미혼이고 아들 하나 있습니다.”

정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지육신은 멀쩡하고?”

“정상 이상으로 건강합니다.”

“돈은 좀 버나?”

정혁은 눈을 홉뜨고 잠깐 생각했다.

장모님들은 기대치가 하나같이 높던데, ‘돈은 좀’의 ‘좀’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몰라 잠시 고민했지만, 제 연봉과 자산 수익 정도면 빠지는 수준은 아니지 싶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 편인 것 같습니다.”

“모아둔 돈도 좀 있고?”

“처자식 고생 안 시킬 만큼은 됩니다.”

정애는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구조사는 빠르게 이어졌다.


“양친은? 모두 계시는가?”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부모 일찍 여읜 건 자네 탓이 아니지.”

퉁명하게 말한 정애가 애석한 듯 입을 내밀었다.


“그럼 형제는?”

“외동입니다.”

“그려, 인자 내 딸하고 손자는 워쩔 건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내 딸이 자네랑 결혼은 한다고 하고?”

정혁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결혼은 됐고 연애부터 하자고 한 지 고작 한 달여. 진솔하자고 다짐했지만, 이 대목에선 약간의 허세가 필요해 보였다.

정혁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돌리게 할 자신 있습니다.”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자신 있게 대답하고 마주 보는 정애의 반응이 어딘가 뜨뜻미지근하다. 정혁이 급히 한 마디를 보탠다.


“벌써 반은 넘어왔습니다.”

그러고도 눈초리가 마땅치 않자.


“반의 반은 넘어온 것 같습니다.”

정애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다소 못마땅하긴 해도 그녀는 조금 너그럽게 표정을 풀었다.

곧이어 한 서린 푸념이 이어졌다.


“내 딸 애비 없이 키운 게 가슴에 한이 됐네. 손자까지 애비 없는 자식으로 크는 꼴 난 못 보네. 무슨 말인지 알아 먹겠나?”

“조모가 계셨지만, 저 역시 부모님 손길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깍듯이 머리를 숙이는 그를 보며 정애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힘을 주었다.


“내 자네만 믿네, 차 서방.”

“명심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목소리가 숙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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