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우리 아빠예요! (92/114)


92화 우리 아빠예요!
2023.06.18.



 
화창한 월요일 아침.


“유시우는 내가 데려다주고 출근해.”

트랜치 코트 안으로 깁스한 팔을 감추며 정혁이 말했다. 시우까지 준비를 마친 뒤 현관까지 따라나선 다정은 잠이 덜 깨 나른한 얼굴로 벽에 기대섰다.


“정말 괜찮겠어요?”

다정이 재차 물었다. 지난 5년간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빌려 애를 키운 여자치곤 걱정이 지나쳤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긴.”

정혁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언젠 제가 안 했던가. 재회한 후로 제 아들 유치원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데 굳이 새삼스럽다.


“유다정은 더 자. 어제도 일하느라 늦게 잤잖아.”

다정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음만 흘렸다.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뻔뻔할 수 있을까.

어젯밤 일을 하겠다며 설계 도면을 본 건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잠을 못 잔 건 몇 시간에 걸쳐 방문의 잠금 기능을 확인한 탓이지,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어 입이 근지러웠지만, 어린 아들의 듣는 귀도 있고 해서 그냥 관두기로 했다.


“그럼 부탁해요.”

그가 베푸는 친절이 나쁘지 않아 다정은 부스스한 몰골로 배시시 웃었다. 그런 다정의 뺨에 정혁이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다정은 눈을 훅 부릅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니 아래쪽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내리자 시우가 키득키득 웃는 게 보였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엄마랑 아저씨랑 뽀뽀했대요. 뽀뽀했대요!”

“유시우.”

민망해진 다정이 스읍, 소리를 내자 시우가 합, 하고 입을 틀어막더니 소리 죽여 어깨를 들썩거렸다. 눈은 초승달처럼 한껏 구부러진 채였다.


“아저씨!”

“아저씨 아니고 아빠.”

그 와중에 정혁이 정정했다. 아, 맞다! 하고 혀를 빼문 시우가 민망해서 배시시 웃는다. 아직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시우였다.


“어, 아빠! 엄마 얼굴 빨개요.”

“니네 엄마가 아빠 좋아해서 그래.”

“유시우 그만. 그리고 차정혁 씨!”

다정의 눈길이 휙 올라섰다. 애 보는 데서 자꾸 이럴 거냐 눈을 부라리는데, 불쑥 다가온 남자가 이번엔 다정의 입술에 쪽 뽀뽀를 하고 멀어졌다.

다정은 숨이 멎고 말았다. 휘둥그레진 얼굴을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여보. 다녀올게.”

“엄마! 시우 유치원 다녀오겠습니다!”

화사한 햇살을 흩뿌리다가 쿵 닫힌 현관문을 보며 다정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뭘까. 여느 부부의 아침 출근길 같은 상황들은.

드라마에서 많이 봐서 익숙하면서도 해 본 적이 없어 생소한 기분에 다정은 잠시간 호흡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

* * *



“아줌마 안녕하세요! 경준아 안녕!”

유치원에서 경준 엄마와 마주친 시우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곤 매달리다시피 정혁의 검지를 쥐어 당겼다.


“아줌마! 시우 아빠예요! 경준아! 우리 아빠야!”

“어머나! 시우 아버님은 처음 뵙네요. 안녕하세요, 시우 아버님.”

수더분한 인상의 경준 엄마는 아들 친구라 그런지 시우에게 호의적이었다. 목소리를 듣기 전만 하더라도 밉상 삼인방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정혁도 친절한 학부형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이젠 아저씨가 아니라 아빤데,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 어느 정도 품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쉴 새 없이 입꼬리가 씰룩이긴 했다.


“안녕하세요. 시우 아빱니다.”

이 한마디를 하는 게 너무 좋아서.


“시우, 이렇게 멋진 아빠가 계셔서 너무너무 좋겠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경준 엄마가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은체는 안 해도 경준이와 시우가 친하게 지내는 덕에 대강 다정 모자의 사정을 아는 터였다.


“네에! 대빵 좋아요!”

시우가 씩씩하게 소리치며 해맑게 웃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마주칠 때마다 ‘우리 아빠예요!’라고 크게 외친 시우가 더 말할 사람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끼 독수리처럼 바삐 움직이는 머리통을 보며 정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선생님, 시우 아빠예요!”

“수원아! 우리 아빠야!”

“보안관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급식 이모! 시우 아빠예요!”

누구든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시우는 정혁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들에게 아빠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랑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을까. 그동안 아빠가 없어서 자랑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테다.

돌연 제 아들이 안쓰러워진 정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자랑하고 싶을 만큼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만은 기특하고 기뻤다.

할 만큼 한 뒤 고개를 휙 젖힌 시우가 배시시 웃는다. 정확히 뭔진 모르는데, 자기도 오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 모양이다.

마주 웃어 보인 정혁이 현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유시우, 이따 봐.”

헤어질 순간이 와서 그런가. 어째선지 목소리가 애틋하게 떨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유시우는 고사리 같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저씨, 아니! 아빠! 빠빠이”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시우를 현관으로 들여보낸 뒤 정혁은 대기하고 있는 차량을 향해 돌아섰다.

부모들과 헤어진 아이들이 짹짹대며 현관으로 밀려들었다.


“경준아! 같이 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시우는 경준이와 교실까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신나게 달려나갈 때였다. 별안간 어느 지점에선가 시우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퉁, 밀치는 손길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시우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원장 선생님과 유치원에 종종 오는 아줌마가 나란히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를 향한 현아의 탐탁잖은 눈길을 보며 선영은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도 현아가 불안불안해 사고나 치지 않을까 싶어 당분간 감시 목적으로 나란히 출근했더니, 하필 현관 앞에서 안 봐야 할 장면을 본 게 화근이었다.

제 아빠라며 아이가 정혁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떠벌리는 장면을 본 순간 현아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줌마 안녕하세요.”

날 선 눈초리에도 시우는 씩씩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꾸뻑꾸뻑 두 번의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고 교실을 향해 돌아서려는데, 돌연 사나운 손길이 시우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깜짝 놀란 시우가 흠칫 몸을 떠는 사이 현아가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얘! 아까 그 사람이 네 아빠라고?”

“어……? 네! 아저씨였는데, 인제 아빠예요. 그래서 시우랑 엄마랑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너네 집에서? 한집에서 산단 말이야?”

“네! 엄마 침대가 작아서 아빠가 침대도 대빵 큰 걸로 사 오고, 어…… 자꾸 큰 집으로 이사 가자고 조르다가 엄마한테 혼났어요.”

“…….”

말끝마다 아빠, 아빠!

끓어오르는 분노를 응축시키듯 현아의 이마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영은 다시금 이마를 쥐었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 현아를 자극하고 있었다.

현아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 잇새로 씹어 으깬 말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워. 누가 네 아빠라는 거야……?”

뾰족한 인조 손톱이 박아 넣기라도 할 기세로 시우의 여린 팔을 움켜쥐었다.


“아…… 아파요.”

통증을 느낀 시우가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지만, 현아는 아랑곳없이 시우의 얼굴을 향해 다른 쪽 손톱을 세웠다.


“오현아!”

선영의 외침에 순간 현아는 나갔던 정신을 되돌렸다. 선영이 다급히 아이의 팔에서 현아의 손을 떼어냈다.


“얘, 넌 교실로 돌아가.”

선영이 내쫓듯 손을 휘 내저었다.


“어, 네! 안녕히 계세요.”

원장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시우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오현아! 너 정혁이가 저 모양이 된 이유를 벌써 까먹었어?”

아까 보았을 때 깁스한 팔을 하고 나타난 정혁을 가리켜 말하는 거였다.

체육대회가 있던 그날의 사고로 몸을 사려야 할 때라 현아가 은인자중할 수 있도록 무던히 애를 쓰는 선영이었다.

누가 그 꼴을 만들어 놨는지를 상기시키자 하얗던 현아의 안색이 겨우 제 색을 찾았다.


“엄마가 말했지? 애는 안돼. 절대 손대지 마.”

선영이 으름을 놓지만, 현아는 듣는 둥 마는 둥 시우가 사라지고 없는 방향만 노려보다가 팩 돌아섰다.

원장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간 현아는 신경질이 묻은 몸짓으로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정혁을 꼬드긴 그 요망한 X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 선영은 병이 도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며 제 딸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벌떡 일어난 현아가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곤 원아들의 인적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선영의 미간이 미심쩍게 구겨졌다.


“오현아 뭐 하는 거야?”

“가만 안 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선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 뒤, 현아가 뭔가를 확인하고 급히 원장실을 뛰쳐나갔다. 또 사고를 치지 싶어 선영은 재빨리 딸의 뒤를 쫓았다.


“현아, 오현아! 어딜 가는 거야?!”

주차장으로 달려 차에 올라탄 현아가 시동을 거는 사이 선영도 놓칠까 싶어 냅다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오현아, 어디 가냐니까?”

“아까 못 들었어? 그 X이 기어이 오빠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였다잖아. 둘이 같이 산다잖아! 아아아악!”

꽤액 지르는 고함이 차내를 쩌렁 울렸다. 선영이 귀를 틀어막았다.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새빨간 스틸레토힐을 신은 구둣발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부아아앙, 소리를 내며 차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 * *

느긋하게 커피를 한잔 내려 식탁 앞에 앉은 다정은 두툼한 노트를 펼쳤다.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를 정리한 노트였다.

정혁은 더 자라고 당부했지만, 막상 두 사람을 배웅하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아 자연스레 밀린 일거리로 눈길이 향했다.

홍 회장이 의뢰한 설계에서 다정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아이의 공간이었다.

홍 회장은 집을 선물할 막내아들이 앞으로 아이를 더 많이 낳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아이들이 먹고 자고 뛰놀며 무럭무럭 자라날 공간이니 하나의 성별에 치중된 설계가 아니라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아이들이 뛰놀기 적합한 설계를 하는 게 마땅했다.

인중에 연필을 끼우고 곰곰 생각하던 다정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노트북을 펼쳤다. 웹하드에 접속하자 오래전 저장해 두었던 사진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5년 전 스페인에서 찍어 온 사진들을 훑다가 마침내 가우디의 수작 중 하나인 까사바트요의 세부 사진들을 찾아냈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과자로 만든 집처럼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집을 보며 까사바트요가 가진 특징을 디자인적으로 응용하는 건 어떨까 하고 고심해 보았다.

생각에 잠겨 커피잔을 기울이는데, 빈 잔이었다. 한 잔 더 내려 마실까 고민하던 다정은 문득 시간을 보았다.

브런치 먹기 딱 좋을 때네.

커피는 됐고 간단하게 뭐라도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갑자기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까지 더해졌다.

인상을 찌푸린 다정은 월패드 앞으로 가 스크린에 떠오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형상이 테두리 쪽만 비치고 막상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다정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묻자 뭔가 울컥한 듯한 목소리가 이내 차분히 흘러나왔다.


『유시우 어머니? 한송 유치원에서 나왔어요. 나 원장이에요.』

“어머! 오 원장님?”

다정은 잠시 허둥거리다가 냉큼 현관으로 달렸다.

어째선지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아 가슴이 쿵쿵 뛴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거였지만, 대한민국 최고 사립 유치원 원장이 연락도 없이 원아의 집을 찾아와야 할 이유가 뭐 있을까.

그보다는 정혁과 관계된 일로 찾아왔을 거라 짐작하는 게 합당했다. 그렇대도 시우의 유치원과 관련된 일이라 덮어놓고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정은 대충 옷차림을 여미며 현관문을 열었다. 환한 빛을 등지고 서 있는 두 여자가 보였다.


“원장님이 어쩐 일로…….”

현아의 곁에 선영까지 서 있자 다정은 조금 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사장님도 오셨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너 족치려고 왔지이―!!”

꼿꼿하게 서서 무표정을 유지하던 현아가 별안간 돌변하더니 손톱을 세우고 덤벼들었다.

다정은 놀랄 겨를도 없이 옷자락이 붙잡혀 집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뒤늦게야 가까스로 현아의 손을 뿌리치고 소리치자, 강 건너 불구경하는가 싶던 선영이 덩달아 가세했다.

참자, 참자, 하면서도 막상 화근이 된 다정의 얼굴을 보자 선영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분기가 솟구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 그녀가 다정의 머리채를 바락 움켜쥐었다.


“꺅!”

“네가 감히 우리 차 서방한테 꼬리를 치는 거로도 모자라 집으로 불러들여서 살림을 차려?! 이 나쁜 X! 오늘 죽어 봐라, 이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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