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실수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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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실수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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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실수 아닙니다
2023.06.15.
한결같이 어설픈 엄마와 생전 아빠 노릇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초짜 아빠였지만, 지금만큼은 아이의 반응을 성마르게 요구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다정과 정혁은 합의한 대로 시우의 눈높이에 맞춰 넉넉한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속으론 피가 말라붙는 심경이지만.
고해성사를 하고 죄가 사하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많은 얼굴로 두 사람은 시우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한동안 동그랗게 벌어져 있던 입이 습 다물리더니 시우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고개는 15도쯤 기울어진 채였다.
“시우야…….”
염소 울음소리처럼 떨리는 다정의 목소리에 정혁이 곁으로 눈길을 돌렸다. 유다정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벌써 눈가가 울긋불긋한 게 툭 건드리면 울지도 모르겠다. 어떤 땐 대담하기까지 한 여자가 자식 일이라면 이렇게 안절부절못했다.
식탁 밑으로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는 걸 보며 정혁은 손을 뻗었다. 얄팍하게 뼈가 도드라져 떠는 손등을 쥐자 다정의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쳐서 살풋 웃어 보였다. 그러자 큼직한 손안에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다정의 주먹에도 스르르 힘이 빠졌다.
“어음…….”
연신 어? 음? 소리를 반복하더니 천진하게 끔뻑이는 시우의 눈이 엄마와 아저씨를 번갈아 향했다.
어딘가 되게 현실성 없다는 표정인데, 그도 그럴 거다.
다섯 살 머리로도 조금 이해하기 힘든, 아니 복잡한 명제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장난감도 잔뜩 선물해 주는 좋은 아저씨가 엄마의 남자친구가 되었다가 하늘나라에 간 줄로만 알았던 아빠라고 하는데, 쉽사리 받아들여지면 그게 더 이상하잖은가.
오히려 어른이라면 단순하게 정리될 일이 다섯 살 아이라 더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시우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엄마를 향한 신뢰가 비례하는 건 아닐 테다.
다섯 살이면 유시우도 알 만한 나이다. 보통 엄마들의 말은 대개 절반쯤 뻥이라고 보는 게 옳다.
시우도 꽃분이 할머니랑 이모한테 받았던 세뱃돈을 대신 보관해 주겠다던 엄마의 말에 속아 몇 번이나 금전사기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엄마를 사랑하지만, 이 고백은 신뢰하기 어려울 거다.
입술을 앙다문 시우가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직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듯 쭈뼛거리던 다정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있잖아…… 시우야.”
“어, 네에!”
이 와중에도 시우는 천진하고 씩씩했다. 순진무구한 눈을 보며 다정은 씨익 어색하게 웃었다.
“옛날옛날에 엄마랑 아빠랑 너무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우리 시우가 생겨난 거예요. 엄마랑 아빠랑 사랑하면 아기가 생기는 건 알죠?”
갑작스레 시작된 동화 구연에 시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에! 수원이네 아빠도 원래는 수원이네 엄마를 사랑했는데, 어…… 인제는 다른 누나 사랑해서 아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수원이가 에휴, 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랬어요.”
“으응……? 그, 그래?”
다정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지금의 제 처지도 아들 친구 가정사에 혀를 찰 처지는 못 되었다.
“아무튼…… 시우가 생겨서 엄마는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 소식을 얼른 아빠에게 말해 주려고 열심히 달려갔는데, 글쎄 아빠가 탄 빠방이가 교통사고가 났지 뭐예요?”
그 대목에서 시우가 힉, 하고 놀란 숨을 삼켰다. 커다래진 눈망울도 충격으로 흔들렸다.
“빠방이가 자그마치 100대나 부딪치는 엄청나게 큰 사고여서 엄마는 아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하늘나라에 간 줄로만 알고 너무너무 슬펐답니다.”
라며, 다정이 우는 흉내를 냈다.
말 같지도 않은 동화 구연을 들으며 정혁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요즘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제 아들에게 가장 큰 숫자가 100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울하던 다정의 목소리가 다시 명랑하게 울렸다.
“근데 하늘나라에 간 줄로만 알았던 아빠가 어느 날 뿅! 하고 나타난 거예요. 엄마는 너무너무 놀랐지만, 아빠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교통사고 때문에 아빠가 기억상실에 걸렸거든요.”
그 무렵, 온몸으로 스멀스멀 일어나는 소름을 견디다 못한 정혁은 더 참지 못하고 속엣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야 만다.
“유다정 너무 구차해. 길게 설명할 거 뭐 있어?”
통박을 던진 그가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시우를 향해 단순명료하게 말했다.
“유시우. 어려울 것 없어. 내가 아빠야. 유시우 아빠.”
“어? 아빠……?”
“그래, 아빠.”
“…….”
여전히 어리둥절한 시우를 보며 정혁은 한숨을 삼켰다.
“유시우도 거울은 보잖아. 딱 봐도 내가 아빤데, 아직도 모르면 어떡해?”
“어……?”
시우의 뺨 한쪽이 씰룩이자 혼란만 부추기는 줄도 모르고 정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 그렇다면 유전자 검사를…….”
“차정혁 씨!”
다정이 재빨리 푼수 같은 입을 저지했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다. 애한테 이런 직설화법이 통할 리…….
“아빠?”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투덕거리던 두 사람의 눈길이 시우에게 향했다. 불현듯 시우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다래지더니 새 부리 같은 입도 동그랗게 벌어졌다.
“지인―짜?!”
“…….”
식탁 의자에서 폴짝 미끄러진 시우가 만세를 불렀다.
“아저씨! 진짜 진짜 시우 아빠예요?!”
“어? 어…….”
여기까진 예상 못했던지 정혁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우가 제자리를 껑충거리며 연신 확인했다.
“우와! 진짜?! 진짜, 진짜?!”
“응. 진짜 진짜 진짜.”
정혁은 몇 번이고 기꺼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곤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다정을 돌아보았다. 다정은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얼굴로 그저 멍할 뿐이었다.
껑충거리던 시우가 갑자기 와다다 달려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정혁의 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진짜 아저씨가 시우 아빠예요? 진짜? 정말?”
묻고 또 물어 확인하는 시우는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정혁이 여유작작 입꼬리를 미끄러트렸다.
“진짜. 내가 유시우 아빠야.”
“와아!”
또 한 번 확답하자 시우가 다시금 껑충거리며 거실 저만치로 달아났다. 그 모습이 마치 첫눈 온다는 소리에 득달같이 달려나가는 강아지만 같았다.
“아저씨! 시우 아빠 있어요!”
“그래. 유시우도 아빠 있다고 했잖아.”
다정은 멎었던 숨을 얕게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뭐가 이리 쉬운지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고개를 비튼 정혁이 다정을 향해 싱긋 웃는다.
“봤지? 유다정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어떨 땐 직관적인 대면이 문제를 더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핀잔 같지 않은 핀잔을 듣고 나서야 다정의 얼굴에도 안도 어린 웃음이 어렸다.
시우가 거실을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긴장이 풀린 탓에 층간 소음 문제를 지적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읏차, 하고 홀가분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정혁이 거실로 나가 시우를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워 안았다. 그러곤 소파에 풀썩 몸을 묻고 시우의 말랑말랑한 뺨을 다짜고짜 깨물었다.
그간 아빠가 아니고서야 하기 어려운 이 짓을 하고 싶어 얼마나 참았는지 모를 거다.
입을 크게 벌려 앙, 하고 뺨을 깨물자 꺄륵하고 시우가 돌고래 비명을 터뜨렸다. 잡아먹을 듯 덤비는 괴물에 맞서 저항하며 시우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유시우, 좋아?”
“네에! 대빵 좋아요!”
“나도.”
잔잔하게 대꾸한 정혁이 킥 웃었다.
“유시우. 아빠, 해 봐.”
“압빠! 압빠압빠압빠압빠압빠아!!”
정혁의 두 눈이 기쁨으로 넘실거렸다. 이걸 잡아먹을 수는 없고, 잡아먹는 시늉이라도 하자며 다시 깨물려 하자 시우가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거의 울부짖는다는 게 정확했다.
저 남자가 저러다가 제 아들을 죽이면 어쩌나 걱정하던 다정은 어째선지 허탈함에 맥이 턱 풀렸다.
마침내 시우에게도 아빠가 생겼다.
뭔가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도준이 깨어난 건 정오가 다 된 시각이었다.
의식을 차리자 눈 밑이 아린 감각이 들었다. 어제 주먹다짐 때문에 난 상처를 떠올리며 무심코 얼굴을 더듬는데, 손끝에 미끄덩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창고?
상처 위로 일회용 반창고가 길게 붙어 있었다.
분명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는데, 제 손으로 붙였을 리 없다. 반창고를 붙여 준 사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제 짐작이 맞다면 어젯밤 봤던 여자가 환영이 아니어야 한다는 거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준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옆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태아 자세로 웅크려 잠드는 게 수경의 잠버릇인 것 같았다.
끔뻑끔뻑, 느린 눈길로 잠든 수경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준은 다시 눈을 감고 피식 웃었다.
어제 본 여자가 환영이 아니면, 어제 꾸었던 꿈도 꿈이 아닌 모양이다.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 수경은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믿기지 않아 슬쩍 눈두덩을 문질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모로 누워 절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권도준이었다.
저와 밤을 보내고 나서도 그는 그저 옆자리에 편안히 누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때처럼 허둥지둥 옷을 갖춰 입고 멀찍이 떨어져 그녀가 깨기만을 기다리며 주먹을 쥐락펴락하지도 않았다.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만 깜빡이자 그가 입가를 늘여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된 꼬락서니로.
“잘 잤어요?”
“아…….”
짧게 신음한 수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엔 제 쪽에서 침대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옷가지들을 주워 들었다.
그 모습에 도준이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수경 씨? 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그게…….”
멈칫한 수경이 주워 든 옷가지를 끌어안은 채 돌아섰다.
보러 온 건 맞는데, 그냥 보기만 한 건 아니었던지라 수경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어젠 친구들을 만나 제법 술을 걸쳤다. 취기가 도니 어김없이 권도준이 보고 싶지 뭔가.
술김에 무턱대고 찾아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끌어안더란 말이지. 술기운이었다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그러니까 뿌리치지 못했다.
동시에 수경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여차여차 자존심은 개나 주고 본능적으로 밤을 보내긴 했는데, 제가 다 집어치우자 선언한 마당에 다시 그를 찾아와 이런 결과를 마주하고 보니, 민망함이 극에 달했다.
“미안해요, 권도준 씨가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게 두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어요. 금방 나가 줄 테니까…….”
“착각 아니면요?”
도준의 목소리가 불쑥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가 한 말의 의도를 몰라 수경은 잠시 침묵했다.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수경을 보며 도준이 체념하듯 뒷말을 이었다.
“착각 아니에요. 수경 씨인 줄 알았거든요.”
술기운에 시야가 흐리고 안경마저 없어 얼굴은 몰랐지만, 제 품에 안긴 체취가 수경의 것임을 알았다.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어젠 실수 아니에요. 만약 수경 씨도 실수가 아니라면 우리 오늘, 같이 있읍시다.”
* * *
밤이 무르익은 시간은 고요했다.
다정은 잠든 시우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제 아빠와 몸 씨름을 하느라 시우는 완전히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그렇게나 좋았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호랑이 아저씨가 아빠란 사실은 어찌어찌 고백했지만, 엄마와 아빠의 애매하고 복잡한 관계성에 대해선 아직 설명할 길이 막막했다.
단번에 이해시키는 건 당연히 무리일 테고, 그 역시 정혁과 합의를 보아 조금씩 설명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등에 찰싹 달라붙어 다정의 어깨에 턱을 괸 정혁이 세상 모르게 잠든 시우를 보며 의문을 제기했다.
“죽은 거 아니야?”
다정이 눈을 흘겼다. 신소리를 지껄이는 입을 확 때려 주려다 말고 소곤소곤 목소리 낮춰 말했다.
“완전 기절했어요.”
“그런 거면 다행이고.”
피식 웃는 그를 보며 곰곰 생각하던 다정이 뭔가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차정혁 씨. 아빠 된 기념으로 오늘은 시우하고 같이 자요. 그러고 보니 첫날밤이네요.”
그에게 특별한 밤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한 말인데 어째선지 정혁의 눈가가 가늘게 경련했다.
“말 같은 소리를 해. 밤은 귀중해.”
어깨를 비튼 다정이 그와 눈을 맞추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엄마랑 아빠는 같이 자야 한다는 말이야.”
“허, 미쳤어요? 오늘 아침처럼 시우 깨서 들어오면 어쩌려고?”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정혁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유다정. 대부분의 문에는 잠금 기능이란 게 있어. 어젠 충분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간과한 거고.”
느끼하게 소곤거리고 떨어지는 그를 다정이 가늘어진 눈으로 흘겨보았다.
“우리 시우 좋아한다더니 다 거짓말이네.”
“유시우는 낮에만 좋지, 밤엔 유다정이 더 좋아.”
피,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자 그가 정색하고 진짜야, 라고 덧붙였다. 그러곤 귓가에 입술을 붙이더니 간지럽게 속삭인다.
“근데 문고리 고장 났으면 어떡해? 빨리 가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