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사실은 (90/114)


90화 사실은
2023.06.11.


쪽, 쪽쪽.

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다정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곁에서 잠들었던 남자는 사랑스럽단 듯이 입맞춤을 퍼붓고 있었다.

애초에 팔이 불편하다며 제집으로 비접을 오게 한 게 무색하게, 정말 그거랑 그거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다정이 굼벵이처럼 꿈틀거렸다.


“하지 말아요. 간지러워요.”

진심으로 간지러워 키득거릴 때였다.


“엄마아!”

문밖에서 익숙한 부름이 들려왔다. 화들짝 눈을 부릅뜬 다정은 냉큼 정혁의 배를 걷어찼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의 육중한 체중이 침대 밑으로 굴러 쿵, 하고 묵직한 소리를 울림과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뒷덜미로 찬 바람이 불었다.

냉큼 일어난 다정은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제발 얌전히 있으라며 몸을 일으키려 움찔거리는 정혁의 배를 발로 꾹 눌렀다.


“어…… 우리 시우 잘 잤어요?”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아침 인사를 건네자 시우가 또랑또랑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엄마! 아저씨 어딨어요?”

“어? 아저씨?”

다정의 발이 움찔거리는 정혁의 배를 다시 한번 꾹 눌러 밟았다.


“시우가 구십구 번! 호, 해 준댔는데, 아저씨 없어요.”

시우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 거실에 깔아 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이부자리와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아…… 정말? 아저씨가…… 음…… 어디 갔지? 아, 맞다. 아저씨 아침 운동 간댔지? 아저씨 되게 부지런해서 매일 아침 운동한댔는데, 엄마가 깜빡했어요.”

“운동……?”

그 팔을 해서? 그 점에 있어선 시우도 의혹을 품는 듯 보였지만, 엄마의 설레발에 그도 금세 잊히고 만다.


“우리 시우, 밥 먹게 세수하고 쉬하자. 그럼 아저씨 와 있을 거야. 혼자서 할 수 있죠?”

“네에!”

시우가 씩씩하게 돌아섰다. 다정은 식겁한 얼굴을 하고 무심코 침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짓밟고 있던 그의 배에서 화들짝 발을 떼었다.

양쪽 눈썹을 씰룩거리던 정혁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우리 노인네 말이, 남자는 하늘이랬어.”

그런데 감히 어딜 밟냐, 따지는 투다. 다정의 눈살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지금 뭐예요? 조선시대 컨셉이에요?”

“아니, 날 밟은 건 네가 처음이야 정도로 해석해도 좋다고.”

킥, 웃은 그가 다정의 발등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재빨리 옷을 찾아 입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유시우가 세수와 쉬를 끝내고 나오기 전에 현관으로 들어오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아저씨다!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화장실을 나선 시우가 마침 현관으로 들어서는 정혁을 보며 뛰어와 인사했다.

아침부터 예의가 바른 아들을 번쩍 안아 들고 머리카락에 코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깁스를 한 탓에 여의치 않아 자그마한 뒤통수를 사정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눈을 뜨자마자 유시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유시우, 잘 잤어?”

“네에!”

눈을 맞추며 웃는 사이 다정이 침실을 나섰다.


“어머! 차정혁 씨……. 아침 운동은 어땠나요?”

“…….”

어설프게 연기하는 다정을 보며 정혁의 눈살이 일그러진다. 차라리 말을 말지, 되게 어색했다.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는 중에 다정의 눈길이 계속 정면으로 향했다. 정면에 앉은 남자가 어딘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허리가…… 찌뿌둥해서. 유다정 침대에서 못 자겠어. 침대 후져서 되게 불편해.”

순간 흡, 하고 숨을 삼킨 다정은 제 옆에 앉은 시우에게 쪼르르 눈길을 보냈다. 바삭한 토스트를 와그작 베어 먹는 시우가 천진한 눈을 끔뻑였다. 다행히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 하여간 눈치라곤 밥 말아 먹으려도 없는 남자였다.


“차, 차정혁 씨. 우리 집 소파! 그러니까…… 우리 집 소파가 얼마나 편한데 그래요? 무슨 남자가 허리가 그렇게 부실해요?”

어색하게 연기라는 걸 하며 둘러대자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유다정, 아까까지 확인해 놓고 기억이 안 나? 내 허리가 부실했으면 유시우 세상에 있지도 않았어. 내가 밤새 영혼을 불살라서…….”

“……차, 차정혁 씨!”

저도 모르게 외친 다정이 정색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시우를 한번 보다가 퍼뜩 두 손으로 시우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혁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 막기엔 좀 늦었다고 생각 안 해?”

 

 

* * *

한가로운 일요일. 어깨에 에코백을 둘러멘 다정이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나갔다 올게요.”

“유다정, 어디 가?”

“도서관에요. 자료 찾을 게 있어요.”

“나도 가.”

“차정혁 씨가 도서관에 따라와서 뭐 하려고요.”

다정은 현과 앞까지 쪼르르 따라 나온 큰 남자와 작은 남자를 번갈아 보며 당부했다.


“방해되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요. 시우 잘 보고요.”

“언제 올 건데?”

“두어 시간쯤 걸릴 거예요. 점심은 알아서 시켜 먹어요.”

다정이 허리 굽혀 시우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시우야, 아저씨 아야, 하니까 시우가 엄마 없는 동안 아저씨 잘 돌봐 줘야 해요. 그럼 엄마 맛있는 거 사서 금방 올게요.”

“네에! 어…… 시우가 아저씨 호, 구십구 번 해 줄 거예요!”

“착해, 우리 아들.”

방싯 웃으며 돌아선 다정은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주택 설계에 옥탑방 구조를 집어넣을 생각이라 다양한 지붕 구조와 아치형 발코니에 관련된 전문 서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대여한 책을 빠르게 정독하고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다가 시계를 보자,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3시를 막 넘겨 있었다.

다정은 배를 쥐었다. 그러고 보니 시장한 줄도 모르게 거의 네댓 시간을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두어 시간이면 될 거라고 말해 놨는데, 두 남자는 점심을 먹었으려나.

다정은 재빨리 자리를 갈무리하고 도서관을 나서며 휴대폰을 보았다. 어쩐 일로 정혁에게선 문자 메시지 한 통 온 게 없었다.

딱히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어 느긋하게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 때였다. 저만치 제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헬멧을 쓴 배달 라이더가 철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게 보였다.

철가방에 붉게 각인된 「풍향(風響)」이라는 상호처럼 스쳐 간 라이더에게서 고소한 자장면 냄새가 풍겼다.

어련히 자장면을 배달시켰겠거니 했다.

그나저나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밥을 먹는다고?


“우리 시우 자장면…….”

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로 접어들던 다정은 순간 말을 잊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민 실장님? 주말에 어쩐 일로…….”

“하하, 그게…….”

한 상 먹음직스레 펼쳐 놓고 막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른 민 실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요일 날, 민 실장도 있고 싶어 여기 있는 건 아니다. 주말에 볼 일 뭐 있냐며 쿨하게 다음 주에 보자던 차 전무의 긴급 호출에 불려 왔을 뿐이다.


“이사한 날은 자장면이래서 자장면 시켰어. 유다정도 먹을래? 유시우 다 못 먹어.”

정혁이 말하며 민 실장이 잘 비벼 놓은 자장면 그릇을 빼앗아 시우의 앞에 놓아주었다.

시우를 포함해 세 사람은 거실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막 자장면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정이 기막힌 건 그게 아니었다.


“대체 이게 다 뭐냐고요?”

다정은 발 디딜 틈 없는 제집 거실을 어처구니없게 돌아보았다.

엄마의 반응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시우가 탕수육을 물고 오물거리다가 정혁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아저씨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아 심히 우려스러운 얼굴이었다.


“말했잖아. 이사한 날은 자장면이라고. 그치, 민 실장?”

“아, 예…… 그렇죠. 근데 전무님. 집주인과 협의가 이뤄진 사항은 아닌가 봅니다. 하하.”

민 실장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저도 감쪽같이 속아 일을 진행시키고 말았다.


“협의가 왜 필요해. 유다정 게 내 거고, 내 게 유다정 건데.”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예요!”

버럭 소리친 다정은 미어터질 듯 거실을 채운 대형 소파와 확장한 베란다 앞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러닝머신과 실내용 사이클을 쏘아보았다.

주방엔 못 보던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고 코너마다 배치되어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공기청정기도 서너 대나 보였다.

이걸로 끝일 리 없다. 성큼 돌아서서 침실 문을 열어젖힌 다정은 제 방에 욱여넣다시피 한 라지킹사이즈 침대를 보며 기함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차정혁 씨. 나 좀 봐요.”

기껏 잘 비빈 자장면은 입에도 대 보지 못한 채 정혁은 곧장 침실로 불려 들어갔다.


“묻잖아요. 이게 다 뭐예요?”

“보면 몰라? 내가 애용하는 침대잖아. 어제 허리 아파 죽는 줄 알았어.”

“…….”

“운동도 해야지. 체력은 국력. 몰라?”

“…….”

“매일 아침 60기압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잠이 깨.”

“…….”

“공기청정기는 피톤치드 발산 기능이 있는 거 아니면 안 돼. 비염 있어.”

욕실 쪽으로 돌아선 다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최고급 필터를 장착한 샤워기와 보도 듣도 못 한 욕실용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찌릿 눈을 흘기자.


“나 민감해서 아무거나 못 써. 아토피 있어.”

“…….”

“집구석이 코딱지만 해서 내가 이것들을 다 욱여넣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차정혁 씨만 없으면 넉넉하거든요?”

도저히 대화가 안 된다는 듯 정혁이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안 되겠어. 내일 여기 아파트 단지에서 제일 큰 평수부터 알아봐야지.”

“차정혁 씨. 이럴 거면 그냥 당신 집으로 가요.”

다정이 말하자 정혁이 기발하다는 듯 눈을 키웠다.


“잘 생각했어. 짐 쌀 것 없어. 다 버리고 유다정은 몸만 와. 참, 내 아들은 꼭 챙겨야 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잘 들어요. 차정혁 씨. 몸이 안 좋아서 주말 동안 돌봐 주기로 한 거지, 우리가 동거를 하기로 한 건 아니잖아요? 자꾸 이럴 거면 차정혁 씨 집으로 가세요.”

빤히 보던 정혁 고개를 까딱 기울인다.


“할 수 없지. 여기가 그렇게 좋다는데.”

결국 발 디딜 틈 없는 물건들은 내일 돌려보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자장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민 실장도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다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결전의 그날이기 때문이었다.

빽빽한 물건들로 몹시 비좁고 답답해진 거실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은 저만치서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노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요? 나 너무 겁나요. 시우가 충격받고 울기라도 하면 어쩌죠?”

다정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그러자 정혁도 고개를 기울이며 소리를 낮췄다.


“걱정 마. ‘룡룡이의 모험2’ S석으로 예매해 두라고 했어. 충격받을 겨를도 없을 거야.”

제가 얼마나 준비성 철저한 아빠인지를 보란 듯이 그의 입꼬리가 우쭐하게 미끄러졌다. 그러자 다정의 눈초리가 실망스럽게 가늘어졌다.


“시우 요즘 공룡 식었단 말이에요. 호랑이로 갈아탄 지 조금 됐어요. 아빠가 돼서 그것도 몰라요?”

“애가, 변덕이 심하네.”

제법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마에 핏대를 세운 그가 휴대폰을 쥐었다.


“나야, 민 실장. 그때 공룡 말고 호랑이 쪽 후보군에 있던 거 뭐였지?”

『어린이 실사 애니메이션 ‘호랑이 형’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내일 자로 S석 세 장 구해 놔요.”

『알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른 그가 봤지? 란 투로 다정을 흘끔 보았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경건한 자세로 시우와 마주했다.


“시우야. 그동안 엄마가 시우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어?”

고개를 갸웃하는 시우의 먹빛 눈동자가 무구하게 일렁였다.

말을 하다 말고 다정이 힐긋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정혁이 부드러운 눈길로 다정을 독려하고 있었다.

다정은 식탁 밑으로 꼼지락거리던 두 손을 힘껏 맞쥐었다.


“사실은…… 엄마가 시우한테 거짓말했어.”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맞아, 엄마가 나빠. 거짓말했으니까…… 근데 시우야. 엄마가 전에 꽃분이 할머니는 착한 거짓말쟁이라고 했던 말 기억해?”

“어…… 네에!”

“엄마가 한 거짓말도 착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시우가 나중에 판단해 줬으면 좋겠어…….”

“음?”

시우가 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잖아, 시우야…… 아빠 하늘나라 간 거 아니야.”

“어……?”

“사실은, 여기 아저씨가…… 시우 아빠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