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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이제 말해요 (88/114)


88화 이제 말해요
2023.06.04.


원장실 문고리를 움켜쥔 선영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손을 멈칫하고 귀를 기울였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톱을 딱딱 물어뜯던 현아는 미칠 것 같은 낭패감에 머리 좌우를 움켜쥐었다. 뭔가 또 계획에도 없는 사고를 친 듯했다.

그 원망의 화살은 어김없이 영준에게 향했다.


“김영준, 미쳤어?! 내가 애만 처리하라고 했잖아! 정혁 오빠까지 다치게 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꼴 보기 싫어서 그랬어! 네가 그 자식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거칠게 내뱉는 영준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쩌다 보니 저지르긴 했는데 그 역시 두렵고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뭐에 씐 모양이었다. 영준은 아직도 제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상황을 보다 못한 선영이 다급히 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현아와 영준을 번갈아 보는 선영의 두 눈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금세 침착함을 되돌린 선영은 원장실 밖을 경계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곤 또각또각 걸어가 영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네 짓이란 말이야? 그럼 그게 사고가 아니란 소리냐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너 이거 범죄야, 이 자식아!”

영준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멱살을 움켜쥔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와! 이 아줌마 무섭네. 나한테 다 덮어씌우시겠다? 아줌마.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사주는 아줌마 딸이 했다고. 이런 걸 보통 공범이라고 하거든요. 아세요?”

“너……!”

선영은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 일을 시킨 현아도 속이 터지지만, 시킨다고 하는 녀석도 한심할 따름이었다.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고 다신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어느새 또 죽이 척척 맞아 이런 일을 벌였는지 기함할 노릇이었다.

그보다 이제 어째야 하나. 선영은 이마를 쥐고 시근덕거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 영준의 성미까지 돋울 필요는 없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공범이긴 하나, 이런 경우 잃을 게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선영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체육 선생은 그만 나가 봐. 입조심 하는 거 잊지 말고.”

주의를 주며 나가 보라 손짓하자 영준이 욕설을 뇌까려 뱉으며 돌아섰다.

현아와 둘만 남게 되자 침착하던 선영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그녀가 현아를 매섭게 몰아세웠다.


“오현아! 너 미쳤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내가 뭘! 난 애만 없애라고 했어. 근데 김영준 저 멍청한 새X가 오빠까지 다치게 한 거야!”

현아는 되레 엄마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자신을 항변했다.


“오현아!”

“애만 없으면 되잖아. 그 애만 없으면 오빠도 정신 차리고 다신 그 여자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

선영은 탄식을 삼키지 못했다. 도무지 똑똑지 못한 딸이 답답하기만 했다.


“오현아, 이 맹추야! 박 회장 그 할망구가 왜 너한테 기회를 준 것 같아? 그건 애가 있기 때문이야. 네가 살아남으려면 애를 없애는 게 아니라 애를 데려와야지!

“뭐?”

“할망구가 오늘 여기 왜 왔겠어? 자기 증손자 때문이잖아. 자기 핏줄이라면 벌벌 떠는 노인네야! 네가 그 애한테 손대려고 한 걸 할망구가 알면 널 가만둘 것 같아? 너뿐 아니라 나까지 망하는 건 한순간이야. 알아들어?”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떠올려 본 선영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혁이나 박 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빤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인명사고가 있었으니 형사적인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테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번 갑질 동영상 문제도 있으니 현아에겐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유치원 원장의 범법적 행위가 드러난다면 자리를 내놓아야 함은 물론 이사회에서도 제명될 건 불을 보듯 빤했다.

딸을 다그치기도 잠시, 선영은 냉정해지려 애를 썼다.


“엄마 말 잘 들어. 네가 해야 할 건 애를 없애는 게 아니라, 애를 데려오는 거야. 알겠니?”

 

 

* * *

뚜벅뚜벅. 로비를 향해 걸어 나가는 구두 굽 소리가 날카로웠다. 로비 중앙에 우뚝 멈춰 선 선영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귀에 붙였다.

신호음이 제법 길게 울리고 머지않아 휴대폰 너머에서 나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성자였다. 퍽 기대를 걸었더니, 감감무소식이라 직접 전화까지 걸게 하는 여자가 영 못마땅했지만, 선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호호, 하고 경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안녕하시죠? 사부인. 저예요. 별일 없으셨어요? 그나저나 오늘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글쎄 그 여자가 차 서방을 유치원에까지 끌어들였지 뭐예요? 이거 해결하신다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사부인?”

『해결? 뭘 해결해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발뺌하는 성자의 태도에 선영은 뒤통수를 맞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네? 아니…… 왜 지난번에 우리 차 서방한테서 그 여자 떼 내겠다고…….”

『이봐요.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요? 그리고 해결은 무슨 해결. 우리 아들이 알아서 하겠지.』

“네에? 아니, 사부인. 왜 얘기가 달라요? 이럼 곤란하죠. 받아먹었으면 받아먹은 만큼 결과를 내야 할 거 아니에요. 시끄럽고, 당장 해결해요.”

『엄마야? 이 여편네가 누구한테 명령이래? 그리고, 받아먹긴 뭘 받아먹어요? 아~ 꼴난 핸드백 하나 던져 주고 지금 생색내는 거예요?』

“꼴난 핸드……! 하, 이봐요. 그게 얼마짜린데.”

『어이구,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알랑방귀 뀔 땐 언제고. 잘됐네. 들어 보니까 무겁기만 하고 색깔도 칙칙해서 안 그래도 영 마음에 안 차더라고요. 그러니까 아까우면 와서 도로 갖고 가요.』

“어머머,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것 봐요!”

『뚝―』

선영은 황당한 얼굴이 되어 휴대폰 화면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쥐뿔도 없는 여자가 배짱을 부리니까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가만 보자. 정리를 하자면 정혁의 생모가 뒤통수를 때렸다는 건데. 이상하지.

그날 파전집을 찾아갔을 때만 하더라도 입 안의 혀처럼 굴며 사근사근하게 굴더니, 갑자기 태세를 바꿔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씨,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때 로비 저편으로 표 비서가 뛰어왔다.


“이사장님. 업체 관계자가 사고 원인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차, 찾았다고……?”

선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현아가 직접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범인으로 지목될 일은 없을 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곧장 사고가 난 장소로 이동하자, 경찰과 유치원 관계자, 그리고 시설 업체의 관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공 업체의 실수가 아니란 말입니까?”

경찰의 물음에 업체 관계자가 즉각 부인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업체가 사용하는 장비는 나사나 볼트가 일체형인 원터치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일체형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할 나사가 빠져 있잖습니까. 나사 구멍에 난 흠집들만 봐도 나사를 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가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결과가 우려하던 방향으로 흐르자 선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누가! 텐트를 무너트리려고 일부러 나사를 뽑았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뇨. 업체 쪽 말을 들어보니,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는데요.”

이번엔 경찰이 업체 관계자의 말에 동조했다. 업체 관계자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단순한 시공 실수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유치원도 유치원이지만, 우리 제품이나 시공의 신뢰가 달린 문제이니, 우리 쪽에서도 수사 의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침을 꿀떡 삼킨 선영은 덜덜 떨리는 손을 꼭 맞쥐었다.

* * *


 


“수고했어요. 민 실장은 들어가요.”

“전무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리를 뜨기가 영 걱정스러운 민 실장이었다.


“난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하시면 바로 연락주십시오.”

“주말인데, 그럴 일 없지. 다음 주에 봐요.”

정혁이 쿨하게 말하자 민 실장의 얼굴에도 안도가 어렸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민 실장이 목례하고 돌아섰다.

마음고생에 녹초가 되어 버린 솔이와 숙희도 준호가 에스코트해 집으로 모실 예정이었다.

차에 올라 안전띠를 채운 다정은 시동을 걸었다. 그 무렵 정혁은 조수석에서 뭔가와 씨름 중이었다.

부러진 팔이 왼팔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안전띠를 채우기엔 어딘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며 지켜보고 있자니 은연중에 눈이 마주친 정혁이 불만스럽게 한숨을 뱉는다. 왜 보고만 있냐고 따지는 얼굴이었다.


“아, 도와줄게요.”

다정은 냉큼 상체를 비틀어 안전띠 클립을 붙잡았다. 가까워진 그에게서 느껴지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낯설게 느껴졌다.

클립을 죽 당겨 고정한 뒤 살짝 웃어 보이자 정혁도 나쁘지 않다는 듯 눈으로 웃었다.

레지던스에 도착한 다정은 곧장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무지 큰 냉장고는 삭막하게 생수만 그득 채워져 있었다.

이따가 죽이라도 배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정은 이것저것 그에게 더 챙겨 줄 것이 없을까 고민했다.


“차정혁 씨. 정말 혼자 괜찮겠어요?”

다정이 못내 걱정스러워 묻자 정혁이 눈썹을 스윽 끌어 올렸다.


“혼자 괜찮냐니?”

“말 그대로예요. 혼자서 먹고 씻고 할 수 있냐고요.”

“왜 혼자야? 유다정도 있고 유시우도 있을 건데?”

“여기 있으라고요? 말도 안 돼요.”

다정이 대번에 거절하자 정혁의 미끈한 얼굴이 또 불만스럽게 굳어졌다.


“유다정. 네 아들 구한다고 내 팔이 이 지경인데 아무도 없는 집구석에 나 혼자 두고 간다고?”

다정의 눈이 뾰족해졌다. 어디 제 아들이기만 할까.


“혼자 안 두면요?”

“밥은 어떡해? 나 굶어 죽어?”

“오른손잡이 아니에요?”

“숟가락만 들면 배부르냐고. 밥은 누가 해?”

언젠 직접 밥을 만들어 먹은 사람처럼 말한다.


“씻고 싶을 땐 어떡해? 혼자 머리도 못 감고 타일 바닥에 미끄러져서 뇌진탕으로 죽으면? 발가벗겨져서 시체로 발견되기 싫어.”

“차정혁 씨. 너무 극단적이에요.”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만들지 마. 잔말 말고 주말 동안 돌봐 줘. 나 환자잖아.”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에 굴복하고 만 다정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팔이 부자연스러운 사람을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두는 건 너무 몰인정했다.

그렇지만 팔 부러진 사람을 병구완하자고 아들을 다른 데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약간 고민이 되었다.


“차정혁 씨. 그럼 우리 집으로 가는 건 어때요?”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지.”

 

* * *

정혁은 작은 캐리어에 옷가지 몇 벌을 챙겨 곧장 다정의 아파트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해는 넘어간 지 오래였고, 저녁때를 훌쩍 넘겨 다정은 또 달걀옷 없는 오므라이스로 저녁을 때우게 한 뒤 시우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꼬질꼬질하더니 한참 만에야 욕실을 나온 시우는 몰라보게 보얘진 모습이었다.

엄마가 로션을 가지러 간 사이, 시우가 발가벗은 몸에 커다란 수건을 망토처럼 두르고 소파로 뛰어왔다.


“어? 아저씨 우리 집에서 코해요?”

“응, 다쳤잖아. 아파서 혼자 못 있어.”

로봇 팔처럼 커다래진 팔뚝을 보며 시우가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였다.


“많이 아파요?”

“죽을 만큼.”

이제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제법 너스레도 떨 줄 안다.


“시우가 호― 해 줄까요? 그럼 빨리 낫는데!”

“많이 다쳐서 백번은 해야 될걸?”

“어…… 어! 그럼 지금 다섯 번 하고 내일 아침에 구십구 번 해 주면 안 돼요?”

“왜 안돼? 돼.”

아흔아홉 번이 아니라 아흔다섯 번이란 지적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정혁이 깁스한 팔을 내밀자 시우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조심조심 호를 해 줬다.

고개를 숙여 자그마한 뒤통수에 코를 가져가자 젖은 머리에서 달콤한 파우더 향이 물씬 풍겼다.

시우를 재우고 난 뒤에야 다정의 관심이 그에게 향했다.


“씻어야죠. 갈아입을 옷 챙겨왔죠?”

“저기.”

정혁이 자신의 캐리어를 눈짓했다. 다정은 캐리어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욕실로 가져다주었다. 그러곤 돌아서는데 팔이 붙잡혔다.


“어디가?”

“네?”

“씻겨 줘야지.”

정혁이 보란 듯이 깁스한 팔을 내비쳤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또또. 유다정. 우리가 애까지 만든 거 벌써 또 까먹었지?”

확 달아오른 다정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못살아 정말. 만세 해요.”

눈을 흐리게 뜬 다정이 못 이기는 척 말하자 정혁이 재깍 만세를 했다. 아침나절부터 입고 있던 그의 셔츠를 돌돌 말아 올리자 정혁이 몸을 꿈틀거리며 셔츠 밖으로 몸통을 빼냈다.


“나머지는 할 수 있죠?”

“봐줬다.”

라며 픽 웃음을 흘린 그가 마저 남은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다정은 최대한 흐린 눈을 한 채 정혁의 팔에 큰 수건을 감아 준 뒤 물이 닿지 않도록 욕조에 걸치게 했다.

샤워기를 내려 머리를 적시고 거품을 내어 보드랍게 샴푸를 하자 정혁의 눈이 편안하게 감겼다.


“차정혁 씨.”

은연중에 흘러든 목소리가 습윤한 공간을 울렸다. 정혁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채 응 하고 대답했다.


“있잖아요, 차정혁 씨. 우리 이제 시우한테 말해요.”

“뭘?”

“당신이 아빠라고요.”

그제야 정혁의 내리감은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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