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그런 사람 (87/114)


87화 그런 사람
2023.06.01.



『한송 사립 유치원의 가족과 함께하는 체육대회! 2부의 막이 올랐습니다!』

운동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진행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이어서 2부 개막을 축하하는 꾀꼬리반 아이들의 합창 공연이 있겠습니다!』

꾀꼬리 같은 아이들의 맑고 청량한 노랫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점심을 든든히 먹은 탓에 나른해진 솔이는 식곤증을 물리치기 위해 행사 진행 일정이 담긴 책자를 펼쳤다.


“2부 첫 경기가 이인삼각이에요. 두 사람 연습은 한 거예요?”

넌지시 눈길을 보내는 솔이의 목소리에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정혁의 눈가가 살그머니 일그러졌다. 이인삼각 경기는 예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듣고 보니 정혁도 약간 걱정이 되긴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시간에 물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이인삼각 연습을 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합을 맞춰 볼까?

그런 의미로 정혁이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지만.


“연습할 짬이 어딨었니? 아침에 알았는데.”

다정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엄마 남자친구의 시선을 외면했다.


『곧이어 이인삼각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경기 순서를 말씀드리자면, 우선 우리 어린이 친구들이 예선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본선에 진출하면 그다음엔 엄마 아빠들이 사활을 걸고 결승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시우와 이인삼각 경기를 함께 할 친구는 예림이었다. 다정은 예림 엄마인 영신모직 며느리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가 시작되는 트랙으로 향했다.

출전을 앞두고 두 아이의 발목을 옭아맨 끈을 느슨하면서도 튼튼하게 손봐 주며 다정이 물었다.


“우리 시우, 넘어지지 않고 잘할 수 있죠?”

“네에! 시우 연습 많이 했어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시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정의 눈길이 이번엔 예림이에게 향했다.


“예림이도 다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요.”

“네! 예림이랑 시우랑 1등 할 거예요!”

새침하기 짝이 없더니 어느샌가 씩씩한 말투가 시우를 닮아 가는 예림이였다. 다정은 싱긋 웃어 보인 뒤 예림 엄마와 함께 레인에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올망졸망 손을 잡은 두 아이가 장난스럽게 웃다가 엄마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엄마도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화답했다.


“시우 파이팅!”

“안예림, 파이팅!”

경기 진행자가 출발 신호용 총의 총구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파앙!

* * *



『이어서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 아빠들의 자존심과 각반의 명예가 달린 이어달리기! 이어달리기 결선이 15분 뒤 시작될 예정입니다. 경기 방식은 예선과 동일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학부형 출전자들은 자리를 이탈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이어달리기 결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후로는 폐회식과 아이들의 율동 공연을 마지막으로 행사도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다.

지정석을 에워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던 중 작은 손이 다정의 팔을 붙잡았다. 눈길을 돌리자 예림이가 도움이 필요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림아, 왜?”

“아줌마, 예림이 쉬 마려워요.”

“쉬? 잠깐만 예림아.”

다정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예림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저 멀리 다른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는 게 눈에 잡혔다.

뻐꾸기도 아니고, 남의 지정석에 애를 맡겨 놓고 저렇게나 천하태평이었다.


“예림아, 아줌마랑 화장실 가자.”

다정이 예림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솔이가 따라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엄마도 갈텨?”

솔이가 묻지만 반쯤 수면 상태인 숙희는 꾸뻑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시우도 쉬하러 갈래요?”

초코우유를 쭉 빨아 삼킨 시우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러다가 경기 중에 쉬가 마렵다고 화장실로 뛰면 어쩌나 걱정이지만, 안 마렵다니 할 수 없었다.


“시우야, 엄마 예림이랑 화장실 다녀올게요. 시우는 아저씨랑 여기서 기다려요.”

“예에!”

“준호 씨, 다녀올게요.”

고작 화장실에 다녀올 거면서 솔이는 애틋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주 손을 흔드는 준호의 얼굴이 흐뭇한 웃음을 띠었다.

약간 밥맛 없다는 눈길로 친구의 면상을 노려보던 정혁이 테이블 위에 수북한 접시들을 눈짓했다.


“네 여자친군 쉬지 않고 먹네?”

신기하단 듯이 말하자 준호가 여자친구의 역성을 들었다.


“원래 여자들은 밥 배랑 디저트 배랑 따로 있는 거 모르냐?”

“네가 여자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지 몰랐다.”

“너네 할머니는 안 그러시냐? 우리 엄만 그렇던데.”

“몰라.”

관심 없다는 듯 정혁은 에너지 음료를 한 모금 더 삼켰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로 돌아오던 다정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하늘이 높고 화창했다. 가을볕도 한풀 꺾여 은은한 햇살을 흩뿌리는 오후 세 시였다.

누가 알았으랴. 이날 이곳에 불운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하기엔 날이 너무 화창했는데.

끼이익.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파묻혀 대개는 알아채지 못했고, 예민한 몇몇만이 알아챘지만, 뭔가를 하기엔 너무도 한순간이었다.

거대한 천막을 지지하던 철제 프레임이 기우뚱 옆으로 스러지는가 싶더니,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흙먼지를 일으킨 근원지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당근색 텐트는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 나열되어 있던 원탁과 원탁을 지키던 사람들의 모습도 순식간에 천막 밑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고요한 정적 뒤에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장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바로 앞에서 텐트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았고,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시우야…… 차정혁 씨…….”

도무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장면에 다정은 어리벙벙한 눈만 깜빡였다. 방금까지 텐트 아래에 있던 두 사람을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꺅! 어떡해! 엄마아―!”

솔이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 * *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해 대대적으로 준비된 행사는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바탕 소동이 인 뒤, 원아와 학부형들은 거의 다 귀가한 상태였다. 부상자들도 모두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유치원 관계자와 시설 업체 관계자만이 남아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행사에 초청된 이들 역시 돌아가고 없었지만, 박 회장만은 귀빈석을 지키며 사고가 수습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윤 비서가 다가와 박 회장의 귀에 몇 마디를 소곤거리고 떨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박 회장이 마침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 병원이냐?”

“한강 병원입니다. 모실까요?”

“가자.”

박 회장이 방향을 틀 때 선영이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기, 회장님……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불미스럽게 이런 사고가 나다니. 송구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하필이면 박 회장이 처음 참석한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선영은 민망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행사가 중도에 막을 내린 것도 망신스러운데, 금쪽같은 손자와 증손자가 제 유치원에서 구급차를 타고 나란히 실려 나갔으니, 싫어도 죄스러운 얼굴을 해야 할 판이었다.

박 회장은 선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무너진 텐트로 눈길을 돌렸다. 다리 중간이 뚝 끊긴 것처럼 튼튼하게 시공된 천막 중간에 당근색 천막만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윤 비서. 조사 결과 나오면 즉각 보고해. 불미스러운 사고인지, 사고가 아닌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윤 비서가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박 회장의 어감이 심상치 않자 선영의 입가가 비릿하게 휘었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고가 아니라뇨? 그럼 누가 일부러 천막을 넘어뜨렸다는 말씀이세요?”

“그야 조사해 보면 알겠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박 회장은 돌아섰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 선영은 이마를 쥔 채 분통을 터뜨렸다.


“현아 얘는 어딨는 거야? 유치원 원장이라는 애가 이럴 때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 * *

한강 병원.

일행과 함께 응급실의 대기석 한편을 차지한 솔이는 연신 훌쩍거렸다.


“엄마. 정말 괜찮은 거야?”

“아이고. 네 애미 죽었냐? 고만 울어!”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채 숙희가 타박했다. 숙희는 이마에 작은 찰과상을 입었다. CT 검사까지 마쳤지만, 그 밖에는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었다.


“나 엄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에―!”

“요란법석은! 너 때문에 더 아픈 것 같아. 그나저나 우리 강아지는 괜찮은 거야?”

숙희가 무릎에 앉힌 시우를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숙희에 비하면 시우는 털끝 하나 상한 곳 없이 멀쩡했지만, 그걸 묻는 게 아니었다.


“우리 강아지. 많이 놀랐지?”

“어…….”

시우는 입술만 감쳐물었다. 한참 운 탓에 눈시울과 콧잔등이 열감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족히 100Kg이 넘는 철제 프레임 안에 갇힌 사람들이 살려달라며 긴박하게 내지르는 비명과 눈앞에서 다친 사람들을 본 터라 시우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어머님, 정말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에요. 저도 솔이 씨처럼 어찌나 놀랐던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뒤늦게 회장실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원래 있던 것들이 깡그리 사라져서 준호 역시 순간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했더랬다.


“난 이만해서 다행인데, 저짝은 어쩔까나?”

숙희가 푸념하며 멀찍이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안절부절 처치실 앞을 서성이던 다정은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비비며 애타게 닫힌 문 너머를 기웃거렸다.

사고가 있던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고 눈앞이 하얗게 지워졌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심장이 다 으깨져 버렸을 테다.


“유다정 씨?”

제 이름이 불리자 다정이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눈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박 회장과 윤 비서,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박 회장의 건장한 남성 수행원 두 사람도 함께였다.

다정은 냉큼 처치실 문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안녕…… 하세요.”

머리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손자가 다쳐 병원에 온 사람이 안녕할 리는 없으니까.

다정을 바라보는 박 회장의 눈빛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아니,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는 게 정확할지도.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못마땅’ 그 자체였다.

어쨌거나 다정은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손자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달려왔을 걸 생각하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왜 밖에서 일하는 애를 유치원으로 불러들여서 이 사달이야!”

버럭 내지르는 호통에 다정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그 애가 얼마나 귀한 애인지, 네까짓 게 알기나 해!”

“그걸 아는 양반이 왜 남의 집 귀한 딸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별안간 끼어든 목소리에 눈길을 돌리자, 열린 처치실 문으로 정혁과 민 실장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팔에 깁스가 된 걸 보며 다정은 퍼뜩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석고 덩어리 밖으로 조금 드러난 손가락을 보는데 마음이 미어졌다.

마찬가지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던 박 회장이 손자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팔이 이게……. 다른 덴? 다른 덴 괜찮은 게야?”

그 밖에도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이 보였지만 깁스된 팔을 빼면 다른 덴 이상이 없어 보였다.


“나 괜찮아. 그러니까 유다정한테 뭐라고 하지 마.”

대놓고 역성을 들자 박 회장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지금 할미 앞에서 저 애 역성을 드는 게야?”

“할머니는 할머니 편 많잖아. 유다정은 편 먹은 사람 나밖에 없단 말이야.”

“정혁아!”

“나 어디 다쳤는지 알고 싶으면 들어가서 의사한테 물어봐. 그게 빨라.”

방금 자신이 걸어 나온 방을 턱으로 가리키며 정혁은 곧장 등을 돌렸다.

냉큼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다정이 조심조심 걸음을 디뎠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다정을 보며 정혁이 피식 웃었다.


“유다정, 다리에 깁스한 거 아니야. 부러진 건 팔인데 부축까지 해야 해?”

“어쨌든 환자잖아요.”

다정이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눈시울이 눈에 띄게 붉은 게 조금만 더 했다간 울겠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다른 덴 이상 없대요?”

“응.”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정혁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괜찮아요?”

깁스가 된 그의 팔을 보며 숙희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무거운 철근이 쓰러진 순간, 그가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숙희와 시우가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진 못했을 거다.


“괜찮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정혁의 눈길이 곧장 아래쪽으로 향했다. 숙희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시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콧등이 빨개져서는 선뜻 다가오지도 못한 채 시우는 젖은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사고가 있을 당시의 기억이나 감정들로 인한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혁은 한쪽 무릎을 굽혀 시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유시우. 괜찮아?”

“어…….”

뭐라 대꾸하지도 못한 채 울먹거리던 시우의 눈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흐아아아앙! 시우가 잘못해쩌여―! 시우 때문에 아저씨 다쳐써여어! 아아아앙.”

조마조마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시우였다.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던 정혁은 피식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난 원래 유시우 대신 아프고 유시우 대신 다쳐도 되는 사람이야.”

그러자 갑자기 뚝 그친 시우가 코를 들이마셨다.


“왜요……?”

“그냥, 유시우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으로 정해졌으니까.”

“어……? 왜요?”

“유시우가 좋은가 봐. 유시우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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