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저 애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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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저 애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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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저 애만 없으면
2023.05.28.
두 바퀴에 접어든 엄마들이 하나둘 출발지점을 통과하는 동안 정혁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저 멀리서 뒤뚱거리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 번째더니 어느새 열두 번째까지 밀려났다. 이젠 14등만은 면하자며 자기들끼리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헉헉거리며 나름 용을 쓰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저렇게나 운동신경이 없다는 데 놀랄 지경이다.
정혁은 두 손을 오므려 입가에 붙였다. 그리고 소리쳤다.
“유다정! 넘어져. 천천히 와!”
『엄마 남자친구분! 같은 편에게 야유를 퍼붓습니다!』
진행자의 생생한 중계와 함께 시우의 눈길이 대각선 위로 올라섰다. 천천히 오라고 하면 어떡하냐는 눈이다. 정혁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눈을 맞췄다.
“포기해. 어차피 꼴등이야.”
『말씀드리는 순간 유시우 군의 어머님께서 13등으로 출발선을 통과했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차, 차정혁 씨……!”
새하얗게 질려 바통을 넘겨주는 얼굴엔 꼴찌를 면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희열이 들어차 있었다.
고개를 절레 내저은 정혁은 다정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러곤 설렁설렁 레인 위를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꼴찌로 들어온 마지막 주자에게 추월까지 당하자 진행자가 혀를 찼다.
『엄마 남자친구분! 이대로 경기를 포기한 걸까요?!』
저렇게 천천히 뛰어도 되나 싶던 찰나, 그의 긴 다리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와아아아아아!!
역전의 묘미는 짜릿한 법.
정혁이 눈 깜짝할 새 앞선 아빠들을 제치고 나가자 경기장을 에워싸고 흥분된 환호성이 퍼져나갔다.
『어어어? 뭐죠? 엄마 남자친구! 단숨에 6위로 올라섭니다! 적토마가 따로 없습니다!』
“차정혁 씨! 힘내요!”
그 광경에 놀란 다정도 꺅! 하고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시우도 지지 않고 껑충거리며 열심히 응원을 했다.
“아저씨 이겨라! 아저씨 이겨라!”
『한 바퀴! 한 바퀴 남겨두고 있습니다! 현재 승아 아빠가 1등! 경준이 삼촌이 2등! 그리고 시우 군 엄마의 남자친구가 3등! 과연 더 이상의 이변은 없는 걸까요? 아니면 마지막까지 역전을 노려볼 수 있을까요? 손에 땀을 쥐는 경기! 마지막, 한 바퀴! 과연 결과는!』
우와와와!
함성이 거세지는 사이 정혁이 선두권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경준이 삼촌을 따돌리고 승아 아빠까지 제친 그는 가뿐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남자친구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정혁이 열띤 환호성에 휩싸인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양팔을 쭉 뻗고 관중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는 등 요란한 세리머니만 봐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줄 알겠다.
귀빈석 앞을 지나던 정혁이 뭔가를 발견하고 골반깨나 오는 펜스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펜스에 매달려 입가에 손을 대고 야호 하듯 소리쳤다.
“할머니이! 나 1등 한 거 봤어?!”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얼굴을 보며 박 회장은 주책이라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평생토록 밥 먹듯이 1등만 해 오던 녀석이 이깟 게 뭐라고 저렇게 좋을까.
* * *
『체육대회 1부가 끝났습니다. 곧 점심시간을 앞두고 막간을 이용해 보너스 게임을 진행해 볼까 합니다. 과자 먹기 게임인데요, 남녀노소 반 구분 없이 참가하고 싶은 아빠 엄마들은 짝을 지어서 앞으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정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유다정, 우리도 해.”
“차정혁 씨는 힘들지도 않아요?”
다정이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이어달리기 예선에서 체력을 모두 소진해서 결승전을 어떻게 치를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안 한다고?”
“난 됐으니까…….”
『보너스 게임인만큼! 우승하는 팀에게는 백만 원의 상금이…….』
“차정혁 씨. 뭐 해요? 빨리 와요.”
어느새 팔팔해진 다정은 경기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게임 방법은 아빠가 엄마를 등에 업고 눈을 가린 채 목표지점을 찍고 돌아오는 겁니다. 』
커플들은 진행자의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여기서 관건은 등에 업힌 엄마가 아빠에게 얼마만큼 길을 잘 안내해 주느냐 하는 거였다.
『도착지점에서 엄마가 안대를 벗겨 주면 아빠는 엄마를 업고 재빨리 출발선으로 되돌아 와 막대 과자를 서로 입에 물고 가장 짧게 베어 먹는 겁니다. 가장 짧은 시간 안에 해낸 팀이 우승이고요. 만약 동점이 나오면 남은 과자의 길이가 짧은 팀이 이기는 겁니다.』
출발 레인에 선 커플들이 상당했다. 대개 부유층이기에 재미나 승부욕이 발동해 참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정처럼 상금에 눈이 먼 참가자들은 드물었다.
다정은 안대를 쓴 정혁의 등에 업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차정혁 씨, 잘할 수 있죠?”
“유다정이 하기 나름이지.”
파앙!
출발 신호가 울렸다. 평소라면 쏜살같이 달려 나갔겠지만, 눈을 가린 채 파트너까지 등에 업은 남자들은 한발 한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차정혁 씨, 거기 아니에요! 11시 방향으로 살짝 틀어요. 잘하고 있어요!”
좀비처럼 삐거덕거리며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는데, 다른 참가자들과 부딪쳐 넘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럴 때마다 관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다행히 이번 경기는 두 사람의 합이 순조로웠다. 목표지점을 찍고 돌아와 진행자 앞에 도착한 커플들이 막대 과자를 먹는 동안 요원들은 초시계로 시간을 쟀다.
최초 출발지점에 도착한 정혁과 다정은 도우미가 건네는 막대 과자를 재빨리 입에 물었다.
“츠증흑 씨. 뱅마너니 걸려허여!!”
“백만 원은 유다정 거야.”
확답을 던진 정혁이 다정의 뒷머리를 훅 끌어당겼다. 그 장면에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던 진행자의 입이 순간 조용해졌다.
『이, 이게……무슨 일입니까? 엄마 남자친구분. 우리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구는 커플의 모습에 진행자가 당황하기도 잠시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혁이 쭈압, 소리를 내며 박력 있게 입술을 뗐을 때, 다정은 그저 얼이 나간 얼굴이었다.
“1분 29초!”
초시계를 든 요원이 외쳤다.
『1분 29초! 이게 웬일입니까. 1분 29초! 현재 1등입니다!』
“1분 36초!”
“1분 55초!”
연달아 다른 팀의 성공 소식이 전해졌지만, 우승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다정은 꺅, 하고 환호를 지르며 정혁의 목을 끌어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차정혁 씨. 우리가 해냈어요! 꺄아악!!!”
대박. 등에 업혔다가 과자 좀 먹은 걸로 백만 원을 벌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다정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자, 이렇게 되면 토끼반 학부형의 우승이…….』
“잠깐!”
그때 누군가가 진행자의 말을 차고 들며 이의를 제기했다. 노란 바탕에 갈색 점무늬가 들어간 조끼를 입은 걸로 보아 기린반 학부형이었다.
손을 든 기린반 아빠가 발언했다.
“게임 규칙은 목표지점을 돌고 와서 마지막에 막대 과자를 가장 짧게 먹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그럼 토끼반 팀 과자는 어딨습니까?”
그제야 마이크를 든 채 진행자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아…… 그러고 보니…….』
그의 눈길이 향하자 정혁과 다정은 흠칫 눈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을 요리조리 염탐한 진행 요원이 재빨리 사회자를 향해 X자로 팔을 교차해 보였다.
『이런, 과자가…… 없습니다. 어쩐지 너무 열정적이더니, 다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럼 실격 아닙니까?”
기린반 아빠가 승부의 재판정을 요구했다. 눈앞에서 백만 원을 빼앗기게 생긴 다정은 다급히 항변이라는 걸 해 보았다.
“저기…… 과자를 다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잖아요.”
『그렇죠. 그런 규칙은 없었지만, 과자를 가장 짧게 먹은 팀이라는 규칙이 있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형체는 남아 있어야겠죠?』
다정의 두 눈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정말 이에 낀 거라도 파내서 내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승은! 1분 36초를 기록한 기린팀 학부형에게 돌아갔습니다!』
진행자가 선언하자 우승팀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게 다 차정혁 씨 때문이에요! 백만 원만 날렸잖아요!”
울 것 같은 얼굴로 쏘아붙인 다정은 지정 자리를 향해 팩 돌아섰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정혁은 조금 맥 빠진 얼굴로 그 뒤를 쫓아갔다.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나름 변명해 보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막대 과자 먹기 게임이잖아요! 막대 과자를 그렇게 과격하게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처음이라 몰랐어. 다음엔 살살 먹을게.”
“하씨, 됐어요……!”
* * *
출장 뷔페를 마음껏 즐기라는 의미인지, 점심시간은 무려 두 시간 동안 넉넉하게 주어졌다.
뷔페 음식이 화려하긴 해도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숙희가 손수 싸 온 김밥이었다.
어딘가를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온 시우가 테이블을 붙잡고 입을 벌렸다. 다정이 김밥 하나를 넣어 주자 시우는 우걱우걱 김밥을 씹으며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유치원 체육대회는 호사스러움의 극치였다.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주는 카트가 있는가 하면 피에로 분장을 한 배우들이 아이들에게 마술이나 간단한 서커스 공연을 보여 주기도 했다.
“유다정 아직도 기분 안 풀렸어?”
백만 원의 골은 깊었다. 토라진 다정의 기분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자 정혁은 안절부절 몹시도 마음이 불편했다.
“백만 원 줄게.”
“그거랑 그거랑 같아요?”
톡 쏘아붙이는 말투가 따갑기 그지없다.
“백만 원이면 백만 원이지 뭐가 달라?”
고전을 면치 못하는 정혁을 보다 못한 솔이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건 공짜라도 정혁 씨 주머니에서 나오는 건 공짜가 아니란 거죠. 저렇게 공짜 좋아하는데 쟨 왜 대머리가 안 되나 몰라?”
핀잔 같은 한마디에 입을 툭 내민 다정은 딴전을 부렸다.
“어머, 시우야, 시우 입이 이게 뭐야?”
어디서 스파게티를 먹고 왔는지, 시우의 입가에 토마토소스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안 되겠다, 시우. 엄마랑 씻고 오자.”
곧 점심시간도 끝날 무렵이라 다정은 시우와 함께 운동장 뒤편에 있는 야외 수돗가로 향했다. 정혁도 모자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세 사람이 길목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웃는 이유야 뻔해 다정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수돗가에 다다라서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참다못한 다정이 팩 돌아섰다.
“차정혁 씨, 제발 그것 좀 벗을 수 없어요?”
다정이 당근색 조끼를 가리켜 말했다. 그러자 정혁은 되레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한 팀인데 벗으면 어떡해?”
“그럼 경기 안 할 때만이라도 벗고 있던가요. 창피해 죽겠어, 정말.”
정혁의 표정 빳빳하게 굳는다. 그의 눈길이 곧장 아들에게 향했다.
“유시우, 나 창피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시우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유시우는 괜찮다는데 유다정은 왜 그래? 유다정은 내가 창피해?”
“…….”
말을 말자, 싶어 다정은 수돗물을 틀고 시우의 얼굴을 닦였다. 그러자 정혁이 가늘어진 눈으로 쏘아보다가 다정의 얼굴을 향해 수돗물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꺅, 뭐 하는 거예요?”
“창피하냐고 묻잖아.”
슬슬 약이 오른 다정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성난 얼굴로 정혁을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수도꼭지를 틀어막아 그에게 물줄기를 쏘아 날렸다.
예상 못 한 반격에 당한 정혁은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쫄딱 젖은 그를 보며 시우가 까르르 웃는다. 다정도 통쾌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
정혁은 기막힌 듯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정이 방심한 틈을 노려 수도꼭지를 틀어쥐었다. 곧장 복수의 물줄기가 날아올랐다.
사방팔방 물줄기가 치솟았다. 꺄악, 하고 다정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시우도 배꼽이 빠질 듯이 까르르거리다가 이내 엄마랑 한편을 먹고 아저씨를 공격했다.
한낮의 물장난 속으로 웃음이 뒤섞였다.
화목한 세 가족을 곱지 않게 노려보는 눈이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어느새 다가온 영준이 층계 위에서 수돗가 쪽을 내려다보는 현아의 주의를 불러들였다. 영준이 현아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장면으로 눈길을 옮겼다.
“오~ 쟤가 그 애하고, 애 엄마야?”
“…….”
“야, 오현아. 너 질투하냐?”
“저 애만 없으면 될 것 같은데…….”
해맑게 웃는 시우의 얼굴을 주시하던 현아가 돌연 영준에게 애원하듯 매달렸다.
“김영준! 너만은 날 이해한다고 했지?”
“어? 그, 그랬지…….”
당황한 영준이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한때 좋을 때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긴 했다.
“날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고도 했잖아. 그렇지?”
“어…… 그게…….”
“김영준. 이번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줘. 응?”
애원하는 현아의 두 눈이 불길함으로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