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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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남자친구
2023.05.25.
미리 참가자와 참관인 명단을 넘겨준 대로 원탁엔 다섯 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치렁치렁 치마가 입혀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솔이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어후, 무슨 유치원 체육대회가 이렇게나 뻑적지근해?”
“그러게요. 저도 내로라하는 사립 유치원 출신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준호가 동조했고 숙희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다정도 혀를 내둘렀다. 옛날 같으면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는 게 정석일 텐데, 최고급 사립 유치원 아니랄까 봐 호화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려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하나둘 원아와 가족들이 모여들었고, 시우는 친구들과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기 바빴다.
그러는 동안 유니폼을 단정히 갖춰 입은 여자들이 테이블마다 오가며 음료와 간식을 서빙했다. 출장 외식업체에서 파견된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였다.
“기다리시는 동안 커피 준비해 드릴까요?”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물었다. 숙희가 마침 잘되었다며 반겼다.
“안 그래도 김밥 싸느라고 커피도 한잔 못 마셨지 뭐야. 아가씨, 다방 커피도 있어요?”
“믹스커피 준비되어 있습니다.”
숙희와 준호는 믹스커피를, 그리고 솔이와 다정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부탁했다.
“근데 저 차는 뭔데 저렇게 막 들이대?”
한가롭게 티타임을 나누던 중 솔이가 뭔가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차량 통제라던 운동장 중앙으로 검은 세단 서너 대가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다른 차량을 막아서던 요원들이 검은 세단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아이들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까지 치는 모습이 은근히 아니꼬운 솔이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눈길이 운동장 중앙으로 향했다. 다정도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한가운데 멈춰 선 차량에서 백발에 체구가 작은 노인이 내려서는 게 보였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박 회장이었다.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가 되어 걸음을 한 모양이었다.
“와, 회장님까지 오셨네.”
낮게 중얼거린 준호가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어깨를 옹송그렸다. 솔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준호 씨도 아는 할머니예요?”
“그럼요. 우리 아버지 첫사랑인걸요.”
“어머나! 정말요?”
어째선지 솔이의 얼굴에 놀람과 설렘이 동시에 스쳤다.
“예, 듣기론 한동네 살던 누나였다던데, 군대 전역하고 돌아와 보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더랍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께 아련한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분이라, 어머니 살아생전 부부싸움을 종종 하셨더랬죠.”
“아이고, 어머니가 많이 서운해했겠네, 그래.”
감정이입한 숙희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준호 씨도 인사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솔이의 말에 준호가 아서라 손을 저었다.
“굳이 들키지 않으면 안 그래도 됩니다. 마주쳐 봤자 괜히 한 소리 듣기나 하지 반가워도 안 하실 거예요.”
그즈음 차에서 내려 주위를 넓게 돌아보던 박 회장이 먼발치에 다정을 발견하고 눈길을 고정했다. 눈이 마주쳐서 다정은 얌전히 묵례해 보였다.
때마침 단상 쪽 천막을 차지하고 있던 재단 관계자들이 박 회장의 도착을 발견하고 그녀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이렇게 먼 걸음 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작위적으로 웃음을 띤 선영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자, 현아도 인사치레를 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
“고얀 것들. 늙은이 귀찮게 시시때때로 불러낼 것 같으면, 내년부터는 기부도 안 하련다.”
박 회장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투덜거렸다.
이렇게 기념할 만한 행사가 있을 때면 재단을 후원해 온 후원자들에게 초청장이 보내지기 마련이다.
박 회장도 큰 후원자였으니 당연히 그녀에게도 초청장이 보내졌지만, 지금껏 한 번도 초청에 응한 적이 없더랬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번엔 박 회장이 자발적으로 참석 의사를 밝혀 왔다. 선영을 비롯해 현아마저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고 싶은 아이가 있겠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더 눈에 밟힐 테다. 그래 놓고 늙은이를 귀찮게 한다며 괜히 타박이다.
시계가 9시 반을 향해가고 있을 때 토끼반 선생의 호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의를 불러들이자 원아와 가족들의 시선이 선생에게 주목되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토끼반 담당 교사인 김진아라고 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가족 여러분을 이렇게 한자리에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곧 경기가 진행될 건데요, 그 전에 경기 참가용 조끼를 나눠드릴 예정이에요. 참가 신청하신 가족분들 앞으로 나오셔서 수령해 가시면 됩니다.”
안내를 마친 선생이 커다란 상자에서 포장된 조끼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우르르 몰려든 가족들은 명단에 이름을 확인하고 자신의 조끼를 수령해 자리로 돌아갔다. 느지막이 줄을 선 다정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시우 어머님, 잠시만요.”
명단을 확인한 선생이 다정에게 당근색 조끼를 지급했다.
“여기 작은 게 시우 거고요. 이건 어머니 거예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다정은 조끼를 펼쳐 보았다. 농구 유니폼처럼 헐렁한 민소매 조끼의 가슴과 등 부분에 반 명칭과 원아의 이름, 그리고 그 밑에 원아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엄마’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다 좋은데 수량이 하나 부족했다.
“선생님, 시우 ‘이모’ 것도 있는데, 안 주셨어요.”
“이모요?”
선생이 명단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곧 확인이 되었는지 그녀가 눈길을 주었다.
“어머님. 나머지 하나는 아까 다른 분이 수령해 가셨어요.”
“다른 사람요?”
다정이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차량 통제라던 운동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번엔 새하얗고 광택이 도는 연예인 밴이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또 다른 초청 귀빈이겠지. 아니면 연예인이라도 초빙한 건가?
애들 체육대회 한번 요란하단 생각을 하며 무심코 눈길을 거두려던 그때, 밴의 뒷문이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다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육대회에 걸맞게 완벽한 복색을 갖춘 남자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새하얀 운동복 티셔츠에 반바지를 늘씬하게 빼입고, 하얀색 운동화와 손목밴드, 선바이저 캡까지 온통 새하얀 그는 마치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같은 자태로 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그보다 다정을 더 놀라게 한 건 그가 걸치고 있는 당근색 조끼였다.
일제히 몰려드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정혁은 곧장 당근색 텐트 아래로 걸어왔다.
“유다정.”
반가워 미소 짓는 그를 다정은 어안이 벙벙해 바라보았다.
“차, 차정혁 씨…… 이건……?”
다정은 숨이 턱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 너무도 당당히 이렇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남자친구」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역시나 운동복 차림인 민 실장이 해맑게 인사를 건네며 일행의 테이블 옆에 캠핑용 의자를 떡하니 펼쳤다.
의자의 등받이에도 역시 「엄마 남자친구」라는 문구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다정은 재빨리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은 다정의 몫이었다.
* * *
“여보. 아침 드세요.”
여자아이가 상냥한 투로 말했다. 그러자 얌, 하고 먹는 시늉을 한 시우가 요리조리 뺨을 부풀린 뒤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여보.”
“여보. 다 먹었으면 빨리 돈 벌어 오세요.”
여자아이가 이번엔 새침한 투로 말했다. 그러자 시우가 훅 한숨을 쉬며 돌아서더니 저만치까지 뛰어갔다가 되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여보.”
“여보, 돈 많이 벌어왔어요?”
기진맥진한 표정을 짓는 시우에게 여자아이가 앙칼지게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어요?”
다정이 퀭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와 한 방향을 바라보던 정혁은 무겁게 한숨을 뱉었다.
“있다는 말은 들었지, 그 애가 저 애인 줄은 몰랐지만.”
태권도 시범과 천하장사 씨름 대회가 끝났을 무렵, 시우가 여자친구라며 한 아이를 정식으로 소개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정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믿을 수 없어요. 우리 시우한테 벌써 여자친구가 생기다뇨?”
다정은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버렸다. 시우를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니,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조금만 더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다정과 달리 정혁은 다소 실망스러운 눈길로 여자친구와 엄마 아빠 놀이 중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내 아들이 여자 보는 눈이 저것밖에 안 된다는 게 몹시 실망스러워.”
“왜요? 귀여운데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지만, 아들의 여자친구는 몹시 귀여웠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만, 그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귀여워? 저렇게 눈이 쪽 찢어지고 까탈스럽게 생긴 게 뭐가 귀여워.”
“당신 여자친구가 아니라 우리 시우 여자친구라고요. 시우 취향이면 되는 거예요.”
“어쨌거나 난 반대야. 마음에 안 들어.”
정혁이 못을 박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들의 여자친구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첫 대면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시우 엄마.”
살가운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왔다.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밉상 트리오였다.
그녀들의 태도가 이전과 사뭇 달랐기에 다정도 온화한 태도로 인사를 돌려주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들.”
“어머나, 전무님도 계셨네요.”
영신모직 며느리가 좀 더 간드러진 목소리를 흘렸다. 아까부터 봐 놓고 이제 와 모른 척 묻는 투가 몹시 가식적이었다.
영신모직 며느리가 소꿉놀이 중인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우리 예림이랑 시우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 선남선녀가 따로 없죠?”
다섯 살 애들한테 선남선녀가 웬 말이람. 다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네…… 엄청 사이 좋은 친구처럼 보이네요.”
대충 얼버무리자 영신모직 며느리가 비식거렸다.
“어머? 친구요? 시우 엄마 너무 모른다. 요즘 애들 알 거 다 알아요.”
“…….”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뒤 영신모직 며느리가 호호호, 하고 얄밉게 웃는다.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다정은 심사 복잡한 얼굴로 한숨만 삼켰다.
그즈음 스피커를 통해 행사진행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어달리기 예선전에서는 총 여섯 바퀴를 도는 겁니다. 어린이 친구는 한 바퀴, 엄마들은 두 바퀴, 그리고 우리 아빠들은 세 바큅니다. 1등으로 들어오는 한 팀만 반 대표로 결승에 올라가는 거예요. 아셨죠?』
진행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열네 명의 토끼반 아이들이 옹기종기 출발선에 모여 섰다. 왁자지껄 떠드는 게 긴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 번째 레인에 선 시우를 보며 정혁이 킥 웃었다. 그러고는 다정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밀었다.
“저기 봐. 유시우가 젤 작아. 귀엽지?”
별걸 다 좋아하는 그를 다정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누구 염장 질러요? 키가 안 커서 속상해 죽겠단 말이에요. 누굴 닮아서 저렇게 안 크는지 몰라.”
“작은 건 유다정 닮았겠지.”
다정이 여상스레 지껄이는 그를 찌릿 쏘아보았다.
“괜찮아. 나도 어릴 땐 작았어. 학교 들어가면 쑥쑥 크니까, 걱정 마.”
팡!
출발 신호가 울리자 짹짹대던 것들이 몇 초간 멍하게 있더니, 한꺼번에 우르르 레인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앙증맞은 손으로 바통을 꼭 움켜쥐고 시우도 와다다 달려 나갔다. 다리도 짧은 주제에 스타트가 제법 날랬다.
텐트 아래에선 참관 가족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이 이어졌다.
“꺅! 시우 이겨라! 시우 이겨라!”
다음 주자 대기 칸을 지키는 다정의 응원은 거의 비명 수준이었다. 정혁은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인데, 표정만큼은 비장했다.
달리기 연습을 많이 했다더니, 시우는 제일 작은 것에 비해 놀랍게도 친구들을 제치고 나가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세 명의 아이들이 출발지점을 통과하자 함성이 쏟아졌다.
두 번째 주자인 엄마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엄마들도 승부욕이 만만치 않아 레인을 달음질해 나가는 속도가 번개처럼 빨랐다.
“시우야! 힘내!”
정면을 향한 채 뒤로 손을 뻗은 다정이 시우를 독려했다. 네 번째로 출발선에 도착한 시우의 손에서 바통을 넘겨받자마자 다정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숨이 찬 시우를 번쩍 들어 안고 정혁이 소리쳤다.
“유다정 파이팅!”
“엄마 이겨라! 엄마 이겨라!”
숨이 찬 와중에 시우도 소리쳐 응원했다.
그러나 목이 터지게 외치는 응원의 함성에 부응하지 못한 채 다정의 순위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열네 명이 달리는데, 채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열 번째로 밀려났으니 꼴찌그룹으로 봐도 무방했다.
한 바퀴를 돈 엄마가 출발선에 열 번째로 들어오는 걸 본 시우는 대번에 실망스러운 얼굴이 되고 말았다.
정혁이 그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네 엄만 틀렸어. 기대하지 마.”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