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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감정의 정체 (84/114)


84화 감정의 정체
2023.05.21.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래, 우리 솔이랑 결혼하면 뭘 가지고 먹여 살릴 생각인가?”

경제력을 짚고 넘어가려는 숙희의 목소리가 비장했다. 준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작은 김치공장을 운영하십니다. 그래서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입니다.”

정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대한민국 식품업계 1위인 삼손푸드가 작은 김치공장은 아니지.

옛날부터 그랬다. 홍준호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저렇게 속 보이는 말을 할 때가 잦았다. 저러고 나중에 밝혀지면 지나치게 겸손한 척 겉멋을 떨 거면서.

딸애 커피숍에서 죽치고 있기에 혹여 놀고먹는 놈팡이는 아닌가 걱정했던 숙희가 화색을 띠었다.


“세상에. 김치공장을 하셔? 가만있어 보자. 우리 반찬가게선 한 달에 배추를 50포기쯤 담는데, 자네 아버지 공장에선 몇 포기나 담그나?”

“하하, 50포기보단 조금 더 많습니다.”

“그래, 그럴 거야. 아무래도 공장이니까. 아니 근데 형들은 뭐하고 자네가 김치공장을 물려받나?”

“큰형님은 IT 관련 본인 회사 운영 중이고, 둘째 형님은 식당 체인을 운영하십니다. 그리고 셋째 형님은 태권도 국가대표셨는데, 경영엔 뜻이 없어 지금은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준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숙희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흡족해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머니. 제가 솔이 씨만큼은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게끔 호강시켜 줄 수 있습니다.”

정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장모 될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선 있는 헛소리, 없는 헛소리 죄다 갖다 지껄여야 할 모양이다.


“우리 홍 서방. 이렇게 잘생기고 듬직해서 너무 좋다. 내가 우리 솔이 시집 안 보내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 그래. 고맙네, 고마워.”

연신 고맙다며 어깨를 도닥이는 숙희를 보며 정혁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마울 거면 오작교 노릇을 한 제게 고마워야 할 게 아닌가.

한창 웃고 떠드는 사이 시우가 부스럭대며 일어났다. 정혁은 곧장 시우에게 다가갔다.


“유시우 엄마한테 가.”

그러자 시우가 안으라며 팔을 뻗는다. 정혁은 시우를 품에 안아 들었다. 아직 몽롱한지 고사리 같은 손이 반쯤 감긴 눈을 비비적거렸다.

* * *

거실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은 정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러그에 늘어놓은 공룡 모형을 보는데 고만고만한 것들이 늘어서 있는 걸 보려니 눈앞이 조금 어질했다.


“시우 공룡, 어…… 시우 공룡은 티라노사우르스인데, 세상에서 젤 커요.”

시우가 말하며 앙증맞은 손으로 티라노사우르스 모형을 쪼물거렸다. 정혁은 즉각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틀렸어. 현재 공식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공룡은 아르젠티노사우르스야. 추정하기로 티라노사우르스가 약 7톤 정도 되는 것에 비해 아르젠티노사우르스는 몸길이만 30미터이고 무게는 80톤에 달해. 아르젠티노사우르스 두 마리면 축구장 크기라는 거지. 그러니까 세상에서 젤 큰 공룡은 티라노사우르스가 아니야. 차라리 턱 힘이 가장 센 공룡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해. 악력이 1,400Kg으로 공룡 중에 무는 힘이 가장 세거든. 아니면 난폭한 공룡이라고 하든가. 티라노사우르스란 이름이 폭군 도마뱀이란 뜻이니까.”

“어…….”

시우가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주방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다정은 눈높이 대화에 실패한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왕! 나는 티라노사우르스다. 사람들을 다 잡아먹을 거다.”

정혁은 피식, 하고 실소했다.


“유시우, 말도 안 돼. 공룡이 멸망한 건 지금으로부터 6천5백만 년 전이야. 인류가 태어난 건 고작 5백만 년 전이고. 두 종족은 마주칠 일이 없단 뜻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을 잡아먹고 싶어도 잡아먹을 수가 없어.”

“…….”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시우가 훅 한숨을 쉰다.


“거기 두 남자. 그만들 하고 오셔서 식사하세요. 우리 시우도 밥 먹자.”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가 티라노사우르스를 팩 내던지곤 식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혁도 어슬렁어슬렁 소파를 벗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이게 뭐야?”

정혁이 정체불명의 접시를 골몰히 보았다.


“보면 몰라요? 사랑의 하트잖아요.”

다정이 말하곤 배시시 웃는다.


“아니, 뻘겋게 뿌려 놓은 그림 말고 음식의 정체를 묻는 거야.”

“오므라이스잖아요.”

“오므라이스라고? 이게?”

정혁은 의심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아는 오므라이스는 보얀 달걀옷을 입고 있지, 이렇게 발가벗은 채로 케첩에 비벼져 있지 않았다.


“달걀 지단이 찢어져서 그냥 밥하고 섞었어요. 밥알 사이에 잘 섞여 있을 거예요.”

어딘지 탐탁지 않았지만, 정혁은 달걀 없는 오므라이스를 한술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턱을 움직이는데, 입 안에서 뭔가가 사과처럼 씹히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다소 충격에 굳은 정혁의 눈이 옆으로 돌았다. 유시우의 뺨이 우물우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정이 시우에게 물었다.


“우리 시우 맛있어요?”

“네에!”

시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거짓말. 정혁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도 뱉는 다섯 살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우가 왠지 흠칫 어깨를 떠는 듯도 보였다.

맛대가리 없는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고 대답해 주는 기특한 아들. 유시우는 세상에 둘도 없을 효자였다.

문제라면 제 아들에게 덜 익힌 감자가 들어 있는 케첩 밥을 먹이며 맛있냐고 묻는 저 여자였다.

배솔이가 다정의 저녁 초대를 경계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그래, 요리는 못할 수도 있지. 이까짓 걸로 좋은 것보다 더 좋은 마음이 변하진 않아…….


  

* * *

가평 모처에 자리한 3층짜리 카페 건물은 전면에 커다란 창이 배치되어 있었다. 호반이 펼쳐져 있고 전망이 좋은 위치였다.

공사는 80% 정도 진척을 보였다.

현장에 도착한 도준은 안전모를 손에 든 채로 현장 소장에게 다가갔다.


“소장님. 별일 없으시죠?”

“오! 권 대표 왔구만. 여긴 보다시피 착착 잘 돌아가고 있어.”

현장 소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장은 성격이 호탕했다.


“다행이네요. 참, 그리고 앞으로 이 친구가 현장 담당할 겁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직원이에요.”

도준이 함께 온 남자를 소개하자 현장 소장이 눈을 키웠다.


“유 팀장 관두고 새로 들어왔다는 친구구만.”

도준은 말없이 입가만 늘려 웃었다. 어딜 가나 다정의 흔적들이었다. 그것들이 지워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진국 팀장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소장님.”

“나 여기 현장 소장 오정석이요. 잘 부탁해요.”

현장 소장과 새 직원은 통성명을 하며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옹벽 쪽은 보수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여기 균열 보이지? 이러다가 비 한번 왕창 쏟아지면 난리 난다고! 이제는 기후 변화 때문에 매년 여름만 되면 물난리가 당연한 듯이 나잖아. 소도 떠내려가고, 집도 떠내려가고. 옛날처럼 대충하던 시절이랑은 달라.”

관리소장이 열변을 토했다. 고개를 절레 저으며 현장 상황을 전하는 중에도 도준은 손에 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권 대표? 이봐, 권 대표?”

“……네?”

혼이 쏙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어리둥절한 도준을 보며 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이. 정신이 가출을 했나? 방금 들었어?”

“아…… 네. 어디까지 했죠?”

도준은 자조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요 며칠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주 팀장 잘 가르쳐 주시고요.”

도준의 당부에 현장 소장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뭐 가르칠 게 있나. 암튼 낼모레 마감재 들어올 때 다시 보자고.”

현장 소장이 다시 한번 주 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사 마무리를 지을 때까지 파트너가 되었으니 결속을 다지자는 의미였다.

차에 오른 도준은 몸을 틀어 뒷좌석에 안전모를 놓다가 멈칫했다. 며칠째 뒷좌석에 방치된 쇼핑백이 눈에 담겼다.


“서울 현장에서 뵀던 소장님들도 다 좋은 분들이신데, 오 소장님도 인품이 좋으시네요.”

핸들을 돌려 현장을 벗어나며 주 팀장이 말했다. 도준은 다시 몸을 틀어 차창 밖으로 펼쳐진 호반을 바라보았다.


“네, 성실하시고 책임감도 강하세요.”

중얼중얼 대꾸하며 도준은 방금 봤던 쇼핑백을 떠올렸다.

쇼핑백 안엔 정성스레 포장된 다크블랙 피규어가 들어 있었다. 그날 미처 전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후 수경에게선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끝인가. 그날 그게 마지막이었던가…….

알지 못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뭔지.

* * *

퇴근이 머지않았을 때 도준은 한잔하자는 성우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허름하게 연출한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자 잘 아는 남자의 등판이 보였다.

인기척에 돌아선 성우가 어묵을 물고 오물거리며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도준은 빼곡하게 놓인 테이블 탓에 미로 같은 공간을 헤치고 털레털레 성우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일찍 왔네?”

“네가 늦게 온 거지. 우리 약속은 7시고, 지금은 7시 40분이고. 일단 앉아.”

핀잔을 주던 성우가 바텐 식으로 되어 있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일은 무슨.”

이제는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 뜨끈한 어묵 국물이 더 일품으로 느껴졌다.


“이번 백화점 본점 착공 들어가면 경기지역 순차적으로 돌 계획이야.”

“…….”

“야, 듣고 있냐?”

도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듣고 있냐는 말을 오늘만 여기저기서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자식이, 술 마시는데, 일 얘기는.”

통박을 날린 도준은 생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이어서 나란히 술잔을 기울이던 성우가 말했다.


“참, 이번 달에 동문 모임 있는 거 알지?”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이번엔 부부나 커플 동반이니까, 꼭 파트너랑 함께 오라는 전갈이시다.”

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누가 그래?”

“누구긴. 동문회장님이시지.”

“이혼한 사람이 무슨 파트너 타령이야?”

도준의 말에 성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몰라? 그 형 곧 재혼하잖아. 청첩장 못 받았어?”

도준은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스팸처럼 날아온 모바일 청첩장을 받은 것도 같다.

성우가 쩝하고 떫게 입맛을 다셨다.


“암튼 건축하다가, 인테리어로 전향해서 방송도 몇 번 타고 하더니 사람이 조금 변했어. 여자가 뷰티 크리에이터라는데 너튜브에서 유명한가 봐. 거기다 14살이나 연하지, 얼마나 자랑하고 싶겠냐?”

도준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14살 연하에 잘 나가는 뷰티 크리에이터가 왜 바람피워서 이혼당한 남자랑 결혼을 하지?”

“그야, 바람피운 여자가 자기니까 그렇지.”

“아…….”

그제야 수긍된다는 듯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튼 파트너 꼭 데리고 와라. 안 그럼 벌금 때린다니까.”

“자랑하고 싶으면 혼자 하지, 왜 남들까지 끌어들이고 그래.”

“그게 그 형 특기잖아. 다 티 나는데 티 안 내는 척하는 거. 참, 이번엔 다정이도 오려나? 지난번엔 온다고 했는데.”

지난번 명한유통에서 마주쳤을 때 나누었던 내용을 상기하며 성우가 눈을 빛냈다.


“다정이는…… 아마 못 올 거야.”

 

 

* * *

대망의 체육대회 날이 밝았다.

유치원으로 향하는 길, 다정은 룸미러 안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시우는 어떤 게 제일 기대돼요?”

시우가 발을 통통 구르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우는 이어달리기요. 시우 달리기 연습 많이 했어요!”

“그래? 그럼 시우랑 엄마랑 꼭 1등 하자.”

“네에!”

유치원에 도착해 차를 세우는데, 뒤따라 들어온 고급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저만치에 멈춰 선 자동차의 조수석 유리가 내려가고 그곳으로 솔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시우야!”

“어! 이모다! 이모오!”

차에서 내려 주자 시우가 폴짝폴짝 뛰며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운전석 유리창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홍준호가 보였고, 뒷좌석에 앉은 숙희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내려선 숙희의 손에는 커다란 찬합이 들려 있었다. 다정이 물었다.


“엄마 이게 다 뭐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김밥 좀 쌌다.”

휑한 자리나 메꿔 달란 의미로 참관 해 달랬더니 김밥까지 잔뜩 싸 가지고 왔다.

다정은 미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이참, 유치원에서 뷔페로 점심 제공되는데 뭐 하러?”

“얘! 엄마가 싼 김밥이랑 뷔페랑 같니? 뷔페는 뷔페고 뭐니 뭐니 해도 소풍이나 체육대회엔 엄마표 김밥이야.”

솔이가 쏘아붙이는 말에 다정은 찌푸려 웃었다. 뒤이어 준호는 트렁크에서 묵직한 아이스박스를 챙겨 따라왔다.


“준호 씨도 와 줬네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어릴 때 기억나고 좋은데요? 근데 정혁이는 아직입니까?”

“글쎄요. 한가하면 와서 응원하라고 말은 해 뒀는데…… 다른 연락은 못 받았어요.”

큰 행사인 만큼 유치원은 원아의 가족들과 진행 요원들로 몹시 복닥거렸다.

현관 앞에는 긴 텐트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재단 이사장과 주요 초청자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청과 지역 방송사에서 나온 취재 인파도 보였다.

모든 경기의 중심이 되는 운동장의 가장자리마다 길게 텐트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반별로 정해진 텐트 색깔로 참가자와 참관인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당근색 텐트 아래엔 흡사 연회장에서나 볼 법한 원탁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정아, 우리 자리 여기다!”

뭔가를 발견한 솔이가 외쳤다. 원탁 위에 세워진 푯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토끼반 / 유시우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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