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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자랑스러운 아빠 (80/114)


80화 자랑스러운 아빠
2023.05.07.


오후 8시. 어둑한 주차장에 차를 멈춘 다정은 앞 유리 밖을 올려다보았다.

제집 베란다를 보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무겁게 한숨을 쉰 다정은 핸들에 이마를 묻었다.

돌아가 달라는 부탁에 성자가 쉽게 물러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것 같으면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이처럼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이 불편한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한 모양이다. 이렇게나 집에 들어가기 싫은 걸 보면.

한숨을 삼킨 다정은 룸미러로 눈길을 돌렸다. 잠이 밀려드는지 시우가 연신 하품을 쏟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계속 뭉그적거리는 건 의미가 없었다. 차에서 내린 다정은 비몽사몽인 채로 눈을 비비는 시우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요란한 음악 소리가 TV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거실로 들어선 시우가 낯선 광경에 눈을 깜빡이다가 냉큼 허리를 굽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 왔니? 헉헉.”

시우의 인사에 짧게 대꾸한 성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거실 한가운데 선 그녀는 건강 채널에서 방영 중인 에어로빅을 열심히 따라 추고 있었다.

시우가 고개를 휙 젖히고 다정을 보았다. 저렇게 뛰면 안 되는데, 라는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쿵쿵, 발을 구르는 성자를 보면 층간소음으로 항의가 들어올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정은 말없이 고개만 절레 저었다. 뭔가를 말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시우의 할머니인 데다가 정혁의 생모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배려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양반이었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눕자마자 시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금동이와의 치열한 몸싸움이 한몫한 것 같다.

시우를 재우고 방을 나오자 헥헥거리며 소파에 늘어진 성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타박을 쏟았다.


“얘, 넌 도대체 뭐 하는 애니?”

다정은 무미건조하게 받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왔으면 시애미 저녁상부터 봐야지, 네 눈엔 네 새끼만 보이니?”

“이 시간까지 식사를 안 하셨다고요?”

“그럼 차려 주는 사람이 없는데 밥을 어떻게 먹니?”

다정은 눈길을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아이고, 며느리라고 하나 있는 게 시애미를 굶겨 죽일라고 하네.”

걱정이 되기도 잠시 다정의 눈에 주방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기 옆엔 한번 쓰고 그대로 방치된 컵들이 쌓여 있고, 커피믹스 껍질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식탁 위엔 숙희가 해다 준 반찬들이 널려 있고 주걱으로 긁어먹은 것 같은 밥솥엔 밥풀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큰 반찬통을 꺼내 덜어 먹지도 않고 다 먹은 뒤에는 뚜껑도 닫지 않은 채였다.

순간 저녁을 굶었다는 말에 싹트려던 동정심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얘, 칼칼한 거 땡기지 않니? 아귀찜 잘하는 데 있으면 하나 시켜 봐라. 소주도 한 병 가지고 오라고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다정은 거칠게 몸을 돌려 거실로 나왔다.


“대체 원하시는 게 뭐예요?”

“아귀찜 대짜하고 소주라니까.”

“말장난 마시고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셨을 땐 목적이 있으셨을 거잖아요.”

캐묻는 다정의 음성에 흥분한 기색이 여실했다. 그런 다정을 빤히 쳐다보던 성자가 언짢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머! 쟤, 눈깔 뜨는 것 좀 봐? 좋다. 말 나온 김에 결판을 내자. 너 시애미로 나 마음에 안 들지? 나도 너 같은 며느리 싫어. 그럼 하는 수 없네. 네가 우리 정혁이한테서 떨어져 나가야지, 별수 있어?”

다정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제가 뭘 했다고 떨어져 나가요?”

“얘 시치미 떼는 것 좀 봐. 네가 애 핑계로 우리 정혁이 불러들이고 발목 잡고 있는 거 모를 줄 알아? 꿈도 꾸지 마. 이 나성자가 눈 뜨고 있는 한 턱도 없지. 우리 정혁이가 누구 혈육인데 너처럼 시시한 애한테 갖다 붙여, 갖다 붙이긴!”

“뭔가 대단한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요, 저 아이 핑계로 차정혁 씨 발목 잡은 적 없고요. 뭣보다 차정혁 씨랑 결혼 안 해요. 누구 며느리 될 생각은 더더욱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시고 그만 돌아가 주세요.”

“오호라, 결혼을 안 하시겠다?”

다정이 사실 여부를 명확히 밝히고 확인시켰지만 성자는 피식피식 코웃음만 쳤다. 그녀의 상식선에서 제 아들의 아이까지 낳고 결혼 생각이 없다는 다정의 말이 진실로 들리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얘, 정 그러면 행동으로 보여야지. 말로는 누가 못 하니?”

“무슨 행동요?”

“우리 정혁이 눈에 안 띄게 몇 년 어디 가서 숨어 살아. 참, 내 손자는 두고 가고.”

“하…….”

다정은 기가 차서 그저 웃었다.

불현듯 성자의 얼굴 위로 박 회장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박 회장의 사주를 받고 온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해 봤지만, 그건 조금 이상했다.

준호에게 들은바 성자는 자기 아들은 고사하고 박 회장에게까지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고 했는데, 설마 이 일을 사주하기 위해 상종도 안 하던 성자를 불러 대면까지 했을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정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어째선지 슬금슬금 오기가 밀려 나왔다.


“좋아요. 어차피 난 내 아이 내놓고 떠날 생각 죽어도 없고, 차정혁 씨랑도 계속 만날 거예요. 그러니까 끝까지 해 보세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섣불리 아빠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마세요. 만약 그랬다간 당장 경찰한테 끌려 나가게 될 거예요. 아셨어요?!”

 

* * *

어김없이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다정은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밤잠을 설쳐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에 빠진 까닭이었다.

시간을 보고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시우는 이미 깨서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문제라면 같이 노는 사람이 문제였다.


“아휴, 고스톱 치는 사람 어디 갔나? 나이도 어린 애가 왜 경로당 고스톱을 치고 있어?”

“어…….”

고개를 갸웃한 시우는 앙증맞은 고사리손에 다 들기에도 벅찬 화투패를 골라 내밀었다. 어린 게 멋도 모르고 내키는 대로 내민 패에 성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똥이구나, 똥이야.”

신나게 흥얼거리며 손에 든 화투패를 짝 내리친 성자는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아이, 쌌네, 쌌어! 어떡해엥! 얘, 너 계획적이었어? 똥 두 장 들었니? 어린 게 타짜가 따로 없네.”

“어? 타짜……. 똥이…….”

시우가 손에 든 패의 그림을 골똘히 보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우야!”

눈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장면에 아연실색한 다정은 얼른 달려가 시우의 손에 있던 화투패를 빼앗아 내팽개쳤다.


“미쳤어요? 지금 애 데리고 뭐 하시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험한 말들이 튀어 나갔다. 성자가 인상을 쓰며 귀를 후비적댄다.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니? 모닝 고스톱이 집중력 향상되고 얼마나 좋은 건데. 너 화투 무시하지 마라. 이래 봬도 화투패에 인생이 담겼다 이 소리야. 그리고 고스톱은 일찍 배워 둬야지, 안 그럼 살면서 뒤통수 맞기 십상이야. 조기교육이란 말도 못 들어 봤니?”

“하…….”

뭐라 말할 기운도 없었다. 다정은 그저 헛숨만 흘렸다.

아침부터 가르칠 게 없어서 다섯 살 애를 붙잡아 놓고 고스톱을 가르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더할까.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다정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기 싸움에 시우를 끼워 넣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방으로 간 다정은 시우의 전용 캐리어에 옷가지 몇 벌과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엄마. 시우 어디 가요?”

어려도 짐을 싸는 의미 정도는 알았다.


“엄마가 이따가 말해 줄게요. 시우는 유치원 가게 가서 세수부터 하자. 혼자 할 수 있죠? 그리고 아침은 이모네 가서 샌드위치 주세요, 하자.”

“네에!”

등원 준비를 마친 다정은 짐을 챙겨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렀다. 도중에 시우가 움찔하며 성자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다정이 현관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간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뭘 어쨌다고 저러나 몰라. 말도 없이 사라지는 다정을 보며 성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솔이의 카페로 향하는 길에 다정은 룸미러로 시우와 눈을 맞췄다.


“시우야. 오늘부터 당분간 우리 집 말고 솔이 이모네 집에서 잘 거야.”

“어…… 왜요?”

“그게…….”

거기까진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다정은 빠르게 이유를 떠올렸다.


“집에 엄청 큰 벌레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벌레 잡고 소독하느라 며칠 집에 안 갈 거예요. 그러니까 시우 이모네서 지낼 수 있죠?”

“네에! 꼬뿐이 할머니랑 잘 거예요!”

시우의 대답이 씩씩했다.

다정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승부욕이 제대로 발동했다.

성자는 지문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 집을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감옥살이를 자처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시간은 다정의 편이었다.

그래, 언제까지 안 나가고 버티나 두고 보자.


  

* * *

정혁은 흥미가 돋는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가족과 함께하는 체육대회라…….”

목요일 오후. 주말까진 정신없을 걸로 생각했더니, 오전 중으로 일정들이 말끔히 정리가 되었다.

덕분에 눈에 밟히는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현관 앞에 세워진 커다란 게시판에 도배된 포스터에 눈길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민 실장. 나 이거 참가 욕구가 마구 샘솟는데.”

그의 말에 민 실장이 정혁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렸다.


“오, 벌써 가을 체육대회 기간이네요. 저도 몇 년째 참가하고 있는데, 아빠들 승부욕이 장난 아닙니다. 아빠라면 모름지기 자기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죠. 올해는 무슨 게임이든 저도 꼭 일등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일등. 그거 내가 잘하는 거긴 한데…….”

정혁이 중얼거렸다. 눈길은 포스터에 박힌 채였다.


“와! VIP로 선정된 가족한테 상품도 있네요. 원아는 체라리 8F 스나이퍼 미니어져 전동차나 바바리에서 출시된 유모차와 아기인형 키트 중에 선택. 그리고 부모에게는 오키나와 오션XXX 골프클럽 회원권. 역시 럭셔리 사립유치원 아니랄까 봐 엄청나네요.”

민 실장이 호화로운 상품에 감탄하는 동안, 정혁은 포스트의 글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정독하고 있었다.


“참가 신청…… 각반 선생님들한테 문의해 주세요.”

중얼중얼 문구를 읊조릴 때였다. 고요하던 현관이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눈길을 돌리자 아이들이 짐승 새끼들처럼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유시우.”

이름을 부르자 와다다 달려 나오던 시우의 고개가 휙 돌았다. 저만치까지 갔던 시우가 유턴 해 현관 바로 앞에 있는 게시판으로 달려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유시우도, 안녕.”

“엄마는요?”

시우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몰라, 엄마 바쁜가 봐.”

가만 보니 유시우도 제 엄마의 행방을 모르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출발하기 전에 유다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치원에 들러 유시우를 찾아다가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정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솔이에게 전화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다정이 시우의 하원을 부탁했다는 거다.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혁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시우를 포스터 쪽으로 돌려세웠다.


“유시우, 이거 알아? 체육대회 한대.”

“어! 맞아요. 시우도 그래서 맨날 달리기 연습해요.”

“달리기? 달리기라면 내가 일가견이 있는데. 암튼 유시우, 여기 봐봐. 여기 그림 보이지?”

“네!”

“갖고 싶은 거 있어?”

시우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고민할 것 없다는 듯 정렬의 붉은 색 체라리 8F 스나이퍼 미니어져 전동차를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빠방이!”

역시 남자애는 남자애였다.

입꼬리를 미끄러트린 정혁은 시우를 팔에 안고 일어났다. 정수리에 코끝을 문질러 아기 냄새를 맡은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유시우, 토끼반 선생님 어딨어?!”

그의 물음에 시우가 좌우를 돌아보다가 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생님! 저기!”

정혁은 표적을 확인하고 곧장 걸을음 떼었다.


“기다려, 유시우. 새 차 뽑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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