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아빠가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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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아빠가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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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아빠가 생기면
2023.05.04.
한가로운 카페에 앉아 다정은 노트북의 까만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상념에 잠긴 것도 아니고, 애매한 행동을 지켜보던 솔이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넌 왜 집 놔두고 여기 와서 이래?”
“그냥…….”
솔이의 날카로운 눈이 도리질을 치며 얼버무리는 얼굴을 미심쩍게 훑었다.
“뭐야? 뭔데 그래?”
“뭐가?”
“기집애가. 내가 널 몰라? 거울 좀 봐. 나 걱정이 태산이에요, 하는 얼굴인데, 누가 널 잘생긴 남자랑 연애하는 앤 줄 알겠어?”
영혼의 단짝 아니랄까 봐 솔이는 다정의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들킨 양 눈을 피하자 솔이가 채근했다.
“뭐냐고. 빨리 말 안 해?”
“그게…….”
다정은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본래 솔이에게 시시콜콜 다 일러바치고 위로라도 받기 마련인데, 어젯밤 있는 줄도 몰랐던 시어머니와 맞닥뜨렸다는 말은 차마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정혁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이가 알면 단번에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있잖아 사실은…….”
그걸 알면서도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미친! 결혼도 안 했는데, 며느리는 누가 며느리야! 웃기는 아줌마네, 정말.”
사연을 듣게 된 솔이는 예상대로 분개했다.
“와, 정혁이 자식이 이거 알면 반응이 거의 핵폭탄급이겠는데요.”
어김없이 카페로 출근한 준호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솔이가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자기 왜? 시우 아버님한테 민감한 문제예요?”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정혁이 앞에서 부모 얘기 안 하는 건 친구들 사이에서 거의 불문율이었어요.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거의 상종도 안 하는 모양인데, 다정 씨네 집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두 사람 관계는 또 어떻게 알고.”
어찌 알았든 그게 뭐 중하랴. 하루아침에 시어머니라 주장하는 사람이 제집에 들어앉아 거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길게 한숨을 내쉰 다정이 두 사람에게 부탁조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 차정혁 씨한텐 비밀로 해 줘요.”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일을 해결해야 할 당사자가 시우 아버님인데, 당연히 말해야지! 자기 버린 생모가 일면식도 없는 집에 쳐들어가서 뻔뻔하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데, 듣고 가만있겠어? 당장 쫓아가서 내쫓든 끌어내든 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 사람, 그런 사람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라는 걸 나랑 시우한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때론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도 있을 테니까.
이 여자가 날 버린 사람이라는 걸 떠올릴 때마다 파편으로 둔갑한 그 명확한 사실이 어딘가에 박혀 그 부위가 욱신거릴 테니까.
다정이 참고 있는 이유를 수긍하면서도 솔이는 답답함에 탄식만 쏟았다.
미련해 보일지라도 다정은 견뎌 보기로 했다. 이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 * *
시간 맞춰 기다리고 있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폴짝 현관을 뛰어나왔다.
다정은 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우야.”
“엄마!”
엄마를 발견하고 반갑게 달려온 시우가 꾸뻑 허리 접어 인사했다.
“시우 유치원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들. 오늘도 재미있게 노느라 고생했어요.”
여섯 시간 만에 아들과 재회한 다정은 시우를 터트릴 듯이 끌어안고 뺨을 맞대고 비비며 요란법석 반가움을 나누었다.
“시우야. 엄마랑 오랜만에 금동이 보러 갈까?”
“어? 금동이?”
커다래진 시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제 막 오후 3시를 넘긴 시각. 성자에게 저녁을 먹고 돌아간다고 했으니, 어디서든 시간을 채워야만 했다.
금동이를 보러 가자는 엄마의 제안에, 시우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어제도 놀았는데 오늘 또? 이렇게 자주 놀아도 되는 건가 잠시 의문이 스치는 듯했으나, 시우는 기쁜 듯이 소리쳤다.
“금동이! 시우도 금동이 보고 싶어요!”
다정이 시우와 함께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애견 카페였다. 잔디 운동장까지 갖춰져 있어 규모도 제법 되었다.
주말에는 애견을 동반한 견주들로 바글바글한데 평일이라 그런지 카페는 제법 한산했다.
“금동아!”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주자 시우가 먼저 와다다 달려간다.
마침 입구를 비질하고 있던 카페 사장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으며 울타리 모양으로 된 안전문의 고리를 열어 주었다.
“어! 싸장님! 안녕하세요!”
시우가 꾸뻑 배꼽 인사를 하자 젊은 사장이 시우를 알아보고 인자하게 웃었다.
“꼬마야. 오랜만에 왔구나.”
“네! 바빠서…… 바쁘니까 오랜만에 왔어요!”
씩씩하게 대답하면서도 시우의 눈이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뒤따른 다정도 사장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아이 유치원 입학하기 전에 왔으니까, 정말 오랜만이네요.”
“싸장님! 금동이 어딨어요?”
마음이 급했던지 시우가 인사를 나누는 엄마와 사장님 사이에 끼어들었다.
“글쎄, 금동이가 어딨더라. 금동아! 손님 왔다!”
사장님이 울타리 너머로 크게 외쳤다. 그러자 잠시 뒤 입구 저편의 잔디 위로 슬라이딩한 개 한 마리가 귀를 펄럭거리며 달려왔다.
카페의 마스코트이자 사장님이 기르는 골든레트리버 금동이였다.
커다란 대형견이 왕! 하고 짖으며 반갑다고 달려오자 시우의 어깨가 흠칫 들썩였다.
애타게 찾을 땐 언제고 덩치 큰 개가 덤빌 듯하자 순간 겁을 먹은 시우는 꺅, 소리를 지르며 금동이를 피해 잔디 운동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좋아죽겠다는 듯이 까르르 웃는 시우를 금동이가 맹추격하기 시작했다.
시우와 금동이의 쫓고 쫓기는 맹렬한 추격전을 감상하며 다정은 못 말린다는 듯 찌푸려 웃었다.
대개는 시우가 큰 개의 덩치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풀썩풀썩 넘어지는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시우는 이마가 벌게진 채 웃기 바빴다.
애견 카페에 오게 된 계기는 어느 날 강아지가 갖고 싶다며 조르는 시우 때문이었다.
다정은 강아지 같은 생명은 가지고 싶다고 함부로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걸 시우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찾게 된 애견 카페에서 강아지를 보여 주고 만지게 해 주자 뒤로는 기르자는 말이 쏙 들어가고 가끔 놀러 와 실컷 노는 선에서 만족하는 듯 보였다.
여건이 안 되어 기르지 못할 뿐, 다정과 시우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정은 문득 정혁도 동물을 좋아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식성도 조사해 숙지해야 하는데, 아직도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에게 엄청난 할머니가 있다는 것과 잘생겼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털어 무거운 기분을 떨친 다정은 휴대폰을 쥐었다. 그리고 금동이에게 헤드락을 거는 시우의 동영상을 촬영했다.
1분 정도 촬영한 영상을 첨부해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만 보기 아까워서.」
전송 버튼을 누르고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다정은 피식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냥 영상만 보여 주려던 건데, 웬 전화예요?”
『물어볼 거 있어서.』
“물어볼 거요?”
다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큰 개한테 내 아들 잡아먹을 건지 좀 물어봐 줄래?』
다정은 푸스스 웃었다. 덩치 차이가 나는 데다 시우가 자지러지게 웃어서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잡아먹는다면요?”
『구하러 가야지.』
“구하러 오는 동안 다 잡아먹고 없겠네.”
다정이 핀잔처럼 말했다. 곧장 으스대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내 차가 괜히 비싼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안 바빠요?”
『바쁘지. 유다정 예쁜 옷 사 주고, 유시우 피자도 사 먹이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해.』
“그럼 돈이나 벌어요.”
『내 아들이 큰 개한테 잡아먹히고 없으면, 돈 벌어서 뭐 해?』
“너무 작아서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안 잡아먹는대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일해요.”
휴대폰 너머에서 울리는 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번 주 바빠.』
또 뜬금없다.
“그래서요?”
『보고 싶어도 참으라고. 금요일에 유시우랑 같이 놀러 가.』
“알겠어요.”
『잘 지켜봐. 큰 개가 마음 바뀔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통화를 마친 다정은 점원에게 와플을 주문하고 시우를 그만 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이제 기온도 선선한데 어찌나 뛰놀았는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었다. 주문한 와플이 나오고 열심히 먹는 입을 보며 다정은 내내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시우야. 시우는 아빠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빠? 아빠 하늘나라 있는데!”
“그래, 참 그랬지.”
방싯 웃어 보인 다정은 음, 하고 목을 울리며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있는 아빠가 다시 오면 어떨 것 같아?”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날름 핥은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늘나라 가면 못 오는데!”
“누가 그래?”
“말자! 하늘나라 갔는데, 어…… 경준이네 엄마가 하늘나라 가면 인제 못 만나는 거라고 해서 경준이가 막 울었어요.”
“말자가 누군데?”
“경준이네 멍멍이요. 말티즈!”
다정은 한숨을 삼켰다. 두피에서 땀이 삐질 흐르는 느낌이 선명했다.
“시우야. 만약에 경준이네 엄마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던 거면? 그래서 경준이한테 말자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말해야 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시우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말자 하늘나라 안 갔어요?”
“아니,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사정이 있어서 말자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경준이네 엄마가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
다정의 한숨이 깊어졌다. 대체 누굴 닮은 거야? 제 아들이지만, 누굴 닮았는지 애가 참 융통성이 없었다.
다정은 생긋 눈을 구부려 웃었다.
“많이 먹어. 우리 아들.”
* * *
똑똑,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선 민 실장의 눈길이 차 전무의 등 뒤로 펼쳐진 너른 야경으로 향했다.
자정을 코앞에 둔 시각. 도로를 빼곡하게 채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도 이제는 드문드문해져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정혁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골몰했다. 소매는 걷어 올리고 넥타이도 풀어헤친 지 한참이었다.
각종 보고서와 연구 자료를 검토하는 그의 시야로 검은 파일철이 내려앉았다.
“전무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계열사의 보유 지분 내역과 주주들의 보유 현황까지 정리되어 있습니다.”
말없이 서류철을 열어 본 정혁은 다소 나른한 눈길로 서류를 검토해 나갔다. 그러곤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물밑 작업 좀 해서 매수자들 대기시켜 놓으세요. 필요할 때 곧장 팔아넘길 수 있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쪽은 노출시키지 말아야겠죠?”
민 실장의 물음에 정혁의 눈길이 생각하듯 잠시 허공을 배회했다.
“시멘트, 제약, 코스메틱, 미디어……. 이만한 지분을 내놓는데 노출 안 하면 믿겠어요?”
“그럼 신분을 밝히란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민 실장의 목소리에 우려가 담겼다.
이만한 물량이 한꺼번에 풀리면 아무래도 잡음이 나돌 건 피할 수 없었다.
명한 후계자가 계열사 지분 매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 지라시에 나돌기라도 해 보라. 그날부로 주가가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마누라 몰래 사 놓은 명한 계열 주식을 싹 다 처분해야 하나?
민 실장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차 전무가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지주사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신중하긴 해야 할 거예요.”
잠시 고심하며 주주 명단을 훑던 정혁의 눈길이 문득 한 지점에 고정된 채 살짝 커졌다.
지승훈이 보유하고 있는 코스메틱 지분이 15%나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불과 얼마 전까진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사이 얍삽하게 많이도 사 모았다.
하고많은 계열사 중에 지승훈이 코스메틱을 선택한 건 경영권을 손에 쥐기에 가장 만만하기 때문일 거다.
뭐 하나라도 손에 넣고 보자는 심산인 듯한데, 원하는 대로 독자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한류 열풍을 타고 코스메틱이 재미를 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룹 차원의 실리를 따져 셈을 맞춰 보면 코스메틱은 더 이상 비전이 없었다.
“30%만 밀어주면 될 것 같은데.”
“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민 실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승훈 말이에요. 30%만 밀어주면 경영권 먹겠다고요.”
정혁이 보유한 코스메틱 지분이 32.52%였다. 쓸데없이 뭐 하러 이렇게 긁어모았나 싶겠지만, 그도 이유가 있었다.
수년 전 한국 유명 화장품에서 중금속이 검출되었다는 가짜 뉴스 때문에 일어난 화장품 파동 때 주가가 휘청하자 방어 차원에서 박 회장이 손자 앞으로 사 모은 것들이었다.
박 회장은 냉철한 결단력을 지닌 경영자이나, 좀처럼 버릴 줄 모르는 성정이었다.
경영권도 마찬가지였다. 생판 남이면 모를까. 하나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눈이 벌게서 덤비는 일가의 곁가지들에게 뭔가를 빼앗기게 된다면 되게 열받을 테다.
정혁은 서류철을 덮었다.
“코스메틱 쪽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둬요. 그리고 나머지는 외국인 투자자 쪽으로 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