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시집살이 VS 며느리살이 (78/114)


78화 시집살이 VS 며느리살이
2023.04.30.


다정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한 잔 따라 거실로 돌아와 쟁반째 내밀자 자기 집처럼 늘어져 있던 성자가 물잔을 받아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저기요.”

다정이 부르자 성자가 사납게 눈을 치뜨며 물컵을 탕 내려놓았다.


“얘! 호칭이 그게 뭐니? 그놈의 ‘저기요’ 소리 좀 어떻게 안 되겠니?”

“호칭 문제는 나중에 따지시고 일단 나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정의 단호한 목소리에 성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갈 데 없는 시애미를 이 야밤에 내쫓겠다는 거야?”

다정은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성자가 소파에 벌렁 몸을 눕혔다.


“아, 몰라! 일단 고단해서 난 좀 누워야겠다.”

“눕긴 어딜 눕는다는 거예요. 당장 나가세요.”

놀란 다정이 냉큼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하지만, 턱도 없었다. 거기다가 선심 쓰는 투로 던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안방은 내줄 것 없으니, 베개랑 덮고 잘 거나 다오. 어차피 바닥 체질이라 난 여기가 좋으니까.”

성자가 널찍한 자리를 탕탕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 다정은 점차 뜨거워지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나가지 않으시면 경찰 부르겠어요.”

“아이고. 시애미가 오갈 데가 없어서 손자네 집에 왔기로서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대. 애미가 손자 얼굴 좀 보러 왔다가 쫓겨났다는 거 알면, 우리 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아이고. 내 팔자야.”

억장이 무너진 얼굴로 허공에 대고 하소연을 쏟던 성자가 다정을 향해 팩 눈을 흘겼다.


“너! 행여나 애미 자식 간에 의 상하게 할 거 아니면, 우리 정혁이한테 꼰지를 생각 하지도 말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정은 한숨만 뱉었다.


“아, 뭐 하고 있어? 손님이 왔는데 과일 쪼가리라도 내올 것이지, 네 집에선 그렇게 가르치디?”

다정은 솟구치는 울분을 가까스로 눌러 삼킨 뒤 주방을 향해 돌아섰다. 잠시 후 사과를 깎아 돌아오자 어김없이 불평이 쏟아졌다.


“물 건너온 건 없니? 난 망고스댕인가 그게 좋던데.”

“제철이라 사과도 맛있어요.”

다정이 체념한 투로 말하자, 말대꾸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성자의 표정이 대번에 언짢아졌다.


“얘. 시애미가 그렇게 말을 하면, 아이고 어머니 제가 미처 몰라서 죄송해요. 내일 망소스댕 꼭 사다 놓을게요, 하면 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니?”

다정은 깊어진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

“어머머, 쟤 얼굴 좀 봐. 잡아먹겠네. 얘, 시애미가 무서워서 무슨 말이나 하겠니? 우리 땐 시어머니가 방귀만 뀌어도 네, 어머니~ 하고 뛰어가서 요강부터 대령했어. 나 같은 시어머니가 어딨니? 하여간 요즘 애들 시집살이 편하게 하는 줄을 몰라요.”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은 성자가 사과 접시를 툭 밀쳤다.


“어우, 입맛 없어. 이거 치우고 치킨이나 한 마리만 시켜 봐. 반반으로. 참, 생맥주도 한 병 가져오라고 해라.”

“…….”

다정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 교통사고나 낙뢰처럼 예상치도 못한 재해와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시집살이가 따로 없지.

다정은 혼란스러웠다. 제 인생에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며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다정은 탄식을 삼켰다. 밤을 꼴딱 새우고 나온 거실엔 먹다 남은 치킨과 맥주병이 나뒹굴고 TV에선 시끄러운 말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소파에 나부라져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게 제발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어쩌지 못할 현실이란 건 스스로가 가장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마침 시우가 눈을 비비며 방을 걸어 나왔다.


“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우리 시우 잘 잤어요?”

다정은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잠이 덜 깨 비틀거리는 시우를 욕실로 돌려세웠다.

쉬를 누이고 시우를 씻겨 나올 때까지도 성자는 쿨쿨 자고 있었다.

제집에서 보기 드문 낯선 광경에 시우가 궁금하단 듯이 고개를 젖혀 다정을 보지만, 그녀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아들의 젖은 머리와 몸의 물기를 닦는 데에만 전념했다.


“엄마, 저 아줌마, 아니 할머니…… 어?”

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처럼 젊진 않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아니야, 시우야. 감기 걸릴라. 빨리 옷 입자.”

다정은 시우를 수건으로 감싸 방으로 데려갔다. 로션을 발라 주고 옷을 입히자 꼬질꼬질하던 아들이 보송보송해졌다.

양말까지 신기고 통통한 뺨에 쪽 뽀뽀까지 한 뒤 다정이 말했다.


“시우, ‘굿모닝 룡룡이’ 보고 있을까. 그동안 엄마가 빨리 밥 차릴게요.”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는 준비 완료된 모습을 하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소파에 잠들어 있는 낯선 아줌마를 잠시 신기한 듯 바라보던 시우는 곧 리모컨을 조작해 TV 채널을 돌렸다. 마침 ‘굿모닝 룡룡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인간이 공룡 탈을 쓴 캐릭터였는데, 요즘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어제 보았던 어린이 뮤지컬의 주인공과 동일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으음, 알 수 없는 룡룡~ 룡룡~”

시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오프닝 노래를 따라 불렀다.

주방에선 물소리가 들리고 TV 소리와 시우의 노랫소리까지 어우러지자, 성자는 어쩌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던 그녀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타박을 쏟았다.


“아휴,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낯선 목소리에 시우가 휙 돌아보았다. 또랑또랑한 눈과 마주친 성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핀잔을 이었다.


“쪼꼬만 게 아침부터 왜 이렇게 부지런해?”

시우는 눈을 굴렸다. 여전히 할머니인지 아줌마인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그냥 배꼽 인사를 했다.


“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자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눈가를 접어 웃었다.


“그래, 잘 잤다. 어린 게 인사성 밝은 것 좀 봐.”

“근데, 어…… 할머니, 아니, 아줌마, 아니…… 누구세요?”

“나? 누구긴 누구야? 니 할머니지.”

 

 


“할머니? 어? 아닌데! 시우 할머니는…….”

“시우야!”

시우가 혼란해할 무렵, 다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시우, 밥 먹자. 빨리 먹고 유치원 가야죠.”

“네에!”

시우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시우가 기어오르다시피 식탁 의자에 앉자 다정이 볶음밥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제 전용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볶음밥을 떠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시우가 꿀꺽 삼키고 물었다.


“엄마, 저 할머니가 왜 시우 할머니예요?”

저 할머니의 정체가 몹시 궁금하단 투였다. 다정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원래 나이 든 여자한텐 다 할머니라고 하는 거야. 나이 든 남자한텐 할아버지라고 하는 거고.”

“아하.”

명쾌하게 궁금증이 해소된 시우가 다시 볶음밥을 떠먹었다.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성자는 가자미눈을 흘겼다. 순진한 얼굴로 여우가 따로 없다더니, 다 들리게 말하는 걸 보니 시집살이를 시키러 왔다가 며느리살이를 할지도 모를 판이다.


“얘, 아가. 얼음 동동 띄워서 나 냉수 한 잔 다오.”

거실 쪽에서 앓는 소리와 함께 성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다정은 안 들리는 척 시우의 입에 장조림을 밀어 넣었다.

엄마가 들은 체 만 체하자, 시우가 중간다리 역할로 나섰다.


“엄마! 할머니가 물 달래요.”

“애도 아니고 물은 알아서 따라 드실 거야. 시우 아― 해야지.”

이번에도 다 들리게 하는 말에 성자는 코웃음을 쳤다. 앓느니 죽는다며 구시렁거리던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몸소 주방 쪽으로 향했다.


“하여간 요즘 시애미들은 죄인이라니까.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니, 원.”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켠 성자가 물컵을 텅 내려놓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벌렁 누워 TV 리모컨 만지작거렸다.

다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우의 아침 식사에만 전념했다.

아침을 먹이고 양치까지 시키자 집을 나설 시간이었다. 다정은 시우의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 가니?”

성자의 질문에 다정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저녁 먹고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푹 쉬시다가 그 전에 나가 주세요.”

진중히 부탁하는 어조였지만, 성자는 껌을 쫙쫙 씹으며 딴전을 부렸다.


“아휴, 말복을 건너뛰어서 그런가. 여름 다 끝났는데 왜 이렇게 더워. 얘, 이따 들어올 때 소꼬리 좀 사다가 푹 고아라.”

마찬가지로 다정도 말 같지 않은 말은 흘려 넘겼다.


“시우야, 그만 가자.”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가 성자를 향해 꾸뻑 허리를 굽혔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오후 중으로 돌아가 주세요. 부탁드려요.”

다시 한번 당부하고 돌아서는 다정의 등을 향해 성자는 샐쭉 눈을 흘겼다. 곧이어 현관문이 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여우 같은 것. 내가 나가나 봐라. 어림도 없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성자는 슬금슬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생각에 턱을 끄덕거리고는 냉장고를 여는데 반찬들이 빼곡했다.


“친정엄마가 해다 준 반찬인가?”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성자가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반찬을 집어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자는 얼른 반찬 몇 가지를 꺼낸 뒤 밥통을 열어 솥째 꺼내 식탁 앞에 앉았다.

* * *



“우리 시우,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기!”

다정의 당부가 끝나기도 전에 시우가 선수를 쳤다. 다정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맞았어, 우리 아들. 오늘도 씩씩하게 놀고 엄마랑은 이따가 또 만나요.”

“네에! 엄마 사랑해요! 안녕!”

손을 흔들며 인계 요원과 함께 멀어지는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돌아보자 시우를 담당하는 교사가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다정도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머니, 다른 게 아니라요. 이번 달 말에 유치원에 큰 행사가 있다는 소식은 들으셨죠?”

“아, 네…….”

다정의 눈길이 선생의 뒤편에 떡하니 세워진 게시판으로 향했다. 새로 붙은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가을맞이 가족 체육대회를 홍보하는 포스터였는데, 게시판뿐 아니라 주차장과 유치원 진입로에도 커다란 현수막이 드리워져 있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체육대회 말씀이시죠? 알림장과 이메일로도 안내받았어요.”

“그래서 말씀인데, 어머니는 참석하실 거죠?”

“물론이죠. 우리 시우가 유치원 입학해서 처음 하는 체육대회인데 당연히 참석해야죠.”

“그럼 이것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선생이 방싯 웃으며 얇은 파일철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그게, 팀을 구분하는 조끼 제작에 필요해서요. 저희 토끼반은 아이들 투표를 통해 당근색으로 결정됐는데, 조끼에 프린트할 문구를 정리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윗줄에 시우네 가족이라고 새기고, 그 밑에 유시우, 그리고 엄마, 아빠, 식으로 가족 구성원의 관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프린트하기로 결정되었거든요. 주문이 들어가려면 미리 문구를 작성해 주셔야 해서요.”

“아…….”

“일단 아이당 보호자 두 분을 기본 제작할 건데 두 사람 명단을 적어 주셨으면 해서요.”

“두 사람이요? 엄마만 참석하면 안 되나요?”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곤혹스러움을 드러냈다. 그건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시우에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 네. 상관은 없지만, 그럼 아버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기도 있고 엄마 아빠 커플로 이인삼각 같은 경기는 참가를 못 하세요. 그렇게 되면 아이들 입장에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 엄마와 아빠가…….”

말꼬리를 늘이던 선생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뒷말을 이었다.


“아니면 어머니. 아빠를 대신할 다른 분이 오셔도 돼요. 부모님 한 분이 참석을 못 할 경우, 할아버지나 삼촌이 대신 참가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래서 미리 명단을 부탁드리는 거예요. 삼촌을 아빠라고 프린트할 순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인 줄 알겠어요, 선생님.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죠?”

“다음 주 주말 전까지 참가하실 분 정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문자나 메일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다정은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엄마만 참석했다가 그게 오히려 시우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행사 이름부터가 「가족과 함께하는 체육대회」 아닌가.

물론 다정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참가할 수 있지만, 분명 엄마가 하지 못하는 아빠만의 역할이 있을 거다.

아들과 처음으로 참석하는 체육대회인데 상심을 줄 순 없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시우한텐 과거 운동선수 전력이 있는 엄청난 이모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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