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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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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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시어머니
2023.04.27.
서둘러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수경은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도준의 그림자가 어둑한 길 위를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향하는 게 눈에 잡혔다.
“도준 씨! 권도준 씨!”
간신히 그를 붙잡자 도준이 다소 화난 몸짓으로 멈춰 섰다.
“왜 그래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묻지만 도준의 성난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혹시, 결혼식 때 화동 얘기해서 그래요? 그건 그러니까…… 그냥 로망이에요. 꼭 권도준 씨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순간 수경은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준 씨, 화내지 말아요.”
더 자존심이 상하는 건 그것들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레스토랑에선 시우와 다정의 대치가 한창이었다.
싫다며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시우의 입에 버섯을 강제로 밀어 넣으며 다정이 물었다.
“그런데 수경 씨를 왜 호박 마녀라고 불러요?”
“오래된 얘기야. 그날이 핼러윈 당일이었지, 아마.”
무심코 대꾸하던 정혁은 버섯을 씹느라 끔찍한 얼굴이 된 시우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핼러윈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동기 중에 제임스 슐터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엘리트 집안 출신에 유명 정치인의 외아들이었어. 핼러윈 때 녀석이 소위 상류층 애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거든.”
“어머, 재밌었겠어요.”
핼러윈 파티라니. 영화에서나 보던 얘기에 다정은 동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재미있었지. 그날 호박 마녀가 잭오랜턴으로 제임스 슐터의 머리통을 깨부쉈거든. 유혈 낭자한 밤이었어. 그놈 머리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 아무도 진짜라고 의심을 안 했다니까. 핼러윈 분장이 리얼하다고 극찬만 했지.”
다정의 눈이 땡그래졌다.
“잭오랜턴……? 핼러윈 때 만드는 호박 등이요? 어떻게 하면 속 빈 호박으로 사람 머리를 깰 수 있는 건데요?”
“글쎄, 그건 호박 마녀만 알겠지.”
고개를 절레 흔드는 그를 보며 다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하필 마녀 분장을 하고 있어서 그때부터 호박 마녀라고 불렸어. 모르긴 몰라도 그날 그쪽 애들한테 한국 여자의 포악성에 대해 제대로 일깨워 줬을걸.”
재미있다는 듯이 정혁이 킥킥 웃었다. 이쯤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수경 씨는 왜 그런 거래요?”
“제임스 슐터가 관심 있다고 말했다나 봐.”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좀 웃기지 않아요? 고백했다고 사람 머리를 깨트려요?”
“그치. 걔가 그 정도로 또라이는 아니야. 문제는 제임스 슐터한테 4년이나 된 공식적인 여자친구가 있었거든.”
“아.”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이 다정이 탄식을 뱉었다.
“수경 씨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겠어요.”
“대단했지. 똑똑하고 객관적으로 예쁘고, 졸업하곤 기업 인수나 합병과 관련된 법률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성과가 제법 좋아서 탐내는 데가 많아. 근데 어쩌다가 권도준이랑…….”
“어쩌다가?”
그의 말을 반복하며 다정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치떴다. 눈이 마주치자 정혁이 눈썹을 슥 끌어올렸다.
“권도준이 감당할 깜냥이 아니라고.”
다정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선배를 모욕하는 발언은 듣기 거북해요.”
“모욕하는 거 아니야. 사실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유다정이 왜 거북해?”
“도준 선배는 좋은 사람이고, 난 그런 선배를 좋아하니까요.”
정혁의 얼굴이 대번에 뚱하게 굳지만, 다정은 모른 척 시우의 입에 새로운 버섯을 물려 주었다. 그러며 도준을 바라보던 수경의 눈빛을 상기했다.
어쩌면 사랑은 사람의 원초적인 기질과 근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 약인지도 모르겠다.
유일한 처방 약인 동시에 효과도 좋았다. 자신감 넘치고 주도적인 성향이 강한 여자를 저렇게 하루아침에 말랑말랑하게 변화시킨 걸 보면.
그것이 도준에게도 특효약이 되길 바라며 다정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웃었다.
다정의 바람과 달리 당사자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어둑한 주차장에 원망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이수경 씨 멋대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떠벌리느냐 그겁니다!”
“도준 씨. 우리 좀 더 솔직해져 보죠. 도준 씨가 화난 이유가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경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한결 무겁게 목소리를 깔았다.
“도준 씨 마음에 있다는 사람, 유다정 씨잖아요.”
처음부터 알았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 아무리 둔하다 한들 모를 수가 없었다.
“도준 씨가 화가 난 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유다정 씨이기 때문이잖아요. 아닌가요?”
도준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잠시간 감정을 추스른 수경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럴 건데요? 죽을 때까지요? 그렇게 자기한테 관심 없는 여자한테 목을 매면서 시간을 허비할 거예요?”
도준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목을 매는 건 이수경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수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여자의 말꼬리나 물고 늘어지는 치졸한 남자란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 혼자 일방적인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정말…… 그래요?”
“그럼 뭐라도 있을 줄 알았습니까? 내가 이수경 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단지 그날 일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걸 느끼며 수경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단언컨대 일생 남자 앞에서 이토록 자존심 없이 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제게 관심 없는 남자에게 매달려 본 일도 없었다.
남자들이란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마련이고, 상품을 고르듯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고르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마음을 얻는 건 그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차오르는 모멸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권도준이라면 항상 발동되던 너그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수경은 차분하게 감정을 추스른 뒤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권도준 씨,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 * *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에 멈춰선 다정은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도준의 역성을 들었다며 토라진 뒤통수를 하고도 정혁은 운전 중인 여자친구의 손을 깍지 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에 다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은근히 치근덕거리는 거 알아요?”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치근덕거리는 건데.”
“하여간, 뻔뻔해.”
야경을 이정표 삼아 달리던 차가 멈춰 선 곳은 정혁의 레지던스가 있는 초고층 빌딩의 입구였다.
“다 왔어요. 어서 올라가요.”
“벌써?”
“벌써라뇨. 10시가 다 됐어요.”
아쉬움을 드러내며 하는 수 없이 안전띠를 끄른 그는 습관처럼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시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누가 훔쳐 가도 모르겠어.”
“모처럼 신났잖아요. 낮잠도 안 자고 피곤했을 거예요.”
허리를 비틀어 돌아보며 다정도 살풋 웃었다.
정혁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를 빙 돌아 반대편으로 향하자 다정이 운전석 쪽 창문을 모두 활짝 내렸다.
시우의 머리통에 살금살금 입을 맞춘 뒤 운전석으로 온 그가 다정의 뺨에도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조심해서 가. 도착하면 문자 해.”
“그럴게요.”
정혁이 한 걸음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어를 바꾼 다정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 * *
“시우야. 집에 다 왔어요.”
집에 도착해 안전띠를 풀며 말하자, 시우가 비몽사몽간에 팔을 뻗어 왔다.
다정은 시우를 등에 업고 유치원 가방과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아파트 현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라 그런지 승강기는 대기 없이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승강기에 오른 다정은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벽면에 시우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정말 피곤했던지, 뺨이 눌려서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해 도어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띠릭, 문이 열리고 문고리를 쥐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뻗어온 손이 문고리를 휙 가로챘다.
헉, 하고 놀란 숨을 삼킨 다정은 갑자기 튀어나온 중년의 여자를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왔는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시우를 떨어트릴 뻔했다.
짙게 화장한 여자는 대체로 화려한 소품과 색감의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명품 백을 들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자 중년의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 잡겠네. 뭔 놈의 집을 이렇게 오래 비워?”
다짜고짜 타박을 던진 여자가 껌을 쫙쫙 씹으며 다정의 등에 업힌 시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머, 얘가 내 손자구나. 아이고, 깜찍해라. 붕어빵이 따로 없네.”
다정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그녀와 시우 사이를 떨어트렸다.
“손자라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지금 영어로 했니? 왜 못 알아듣는 척이야?”
“누구시냐고 묻잖아요.”
“나?”
여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굴곡을 그리며 휘어졌다.
“나, 네 시어머니.”
“시……어머니요?”
다정은 커다래진 눈만 깜빡였다.
남편도 없는데 무슨 시어머니?
“얘! 근데 넌 애까지 데리고 이 시간에 어딜 싸돌아댕기다 온 거니?”
“저기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기다리게 한 거야? 어후, 그나저나 오줌보 터지겠네.”
호들갑을 떨던 여자가 현관 안으로 몸을 쏙 밀고 들어갔다. 아연한 다정이 얼른 뒤를 쫓았다.
“저기요! 지금 어딜 들어가시는 거예요?”
“어디긴? 내가 며느리 집에도 못 들어오니?”
“대체 무슨 말을! 며느리는 누가 며느리란 거예요?”
“얘, 그것보다 변소 어딨니? 아오, 이러다 싸겠네, 싸겠어!”
여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덩달아 다급해진 다정이 화장실을 가리켰다.
“화, 화장실, 저기…….”
화장실로 뛰어 들어온 성자는 오늘 새로 장만한 투피스 정장의 치마를 다급히 걷어 올렸다. 변기에 앉자 수심 가득하던 얼굴이 금세 편안해졌다.
“휴, 살겠네.”
그러기도 잠시 성자가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이왕 밀고 들어올 거 저녁 밥상이나 차리게 할 요량으로 시간 맞춰 왔더니, 날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벨을 서너 번이나 눌러도 기척이 없어서 문밖에서 꼬빡 네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 덕에 저녁을 걸러 허기져 죽을 맛이었다.
성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듣던 대로 생긴 건 순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실제로 얼마만큼 여우인지는 조금 더 간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두고 보자. 정이 뚝 떨어져서 제 발로 내빼게 해 줄 테니까.
낯선 사람을 집에 들여놓고 갈팡질팡하던 다정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시우를 방에 눕혔다.
일면식도 없지만, 관계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우를 손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을 시어머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럴까. 분명 진통도 했을 거고 많이 아팠어도 감내하고 낳았을 텐데. 그렇게 낳자마자 버릴 수 있었을까.
문득 그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다정은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그분이구나. 낳자마자 버렸다던 그 사람의 어머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양 아찔한 기분을 느끼기도 잠시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자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아직 도착 전? 왜 연락이 없어?」
정혁이었다. 전화라도 걸려 올까 싶어 다정은 재빨리 답장을 입력했다.
「이것저것 하느라 조금 정신이 없었어요. 내일 통화해요. 잘 자요.」
생각을 추스르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시우의 방을 나서자, 마침 성자도 치마 춤을 추스르며 화장실을 나서고 있었다.
성자가 껌을 쫙쫙 씹으며 집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얘, 여긴 몇 평이나 되니? 전세니? 아님, 자가? 이 동네 집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우리 정혁이가 해 줬니?”
“저기요…….”
성자가 눈을 흘겼다.
“얘, 말버릇 좀 봐. 저기요가 뭐니? 어머님~ 하고 곰살맞게 부르지 못하고.”
다정은 쏘아붙이는 성자의 얼굴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언행에 다소 상스러워 그렇지, 본 바탕은 제법 미인이었다.
게다가 날카로운 듯 시원스러운 눈매나 표정에서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다정은 호흡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차정혁 씨 어머니 되시죠?”
이제야 알아보냐는 듯이 성자가 다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알았으면 깍듯하게 모셔.”
“여긴 왜? 아니,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어떻게 알긴. 물어물어 왔지.”
대충 얼버무린 성자가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짐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냐고요.”
“내가 사정이 있어서 오갈 데가 없게 됐지 뭐니? 그래서 당분간 여기 있을 테니까 그리 알아. 아고고, 다리야.”
소파에 늘어진 성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양말을 벗어 던졌다.
“얘, 그러고 장승처럼 서 있지 말고 나 물 한잔 다오. 너 기다린다고 몇 시간을 서 있었더니, 아주 삭신이 다 쑤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