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뜻밖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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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뜻밖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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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뜻밖의 조우
2023.04.23.
단란하게 어린이 뮤지컬 관람을 마치고 나온 가족은 강변의 한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한강의 야경이 바라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펼쳐 든 정혁이 제 무릎에 앉힌 아들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뭐 먹을래?”
“어…….”
시우가 메뉴판의 빼곡한 글자들을 빠르게 훑더니 커다란 눈을 위로 홉떴다.
“참고로 오늘의 추천 메인은 생파슬리와 샬롯을 곁들인 프랑스식 에스까르고래. 그걸로 할래?”
“음……”
시우가 입술을 말고 오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빈티지 치즈로 감싼 유기농 가지구이와 신선한 굴 요리 어때?”
“어, 음…….”
“그것도 별로야?”
눈가를 슬며시 일그러트린 정혁이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들자 메뉴판을 덮은 다정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까다롭네. 나 닮았나 봐.”
다정은 한숨을 삼켰다. 다섯 살 아이한테 에스까르고가 웬 말이며, 빈티지 치즈가 웬 말인지.
“차정혁 씨. 시우한테 메인 코스는 너무 양이 많아요. 키즈밀 세트가 적당할 것 같아요.”
“키즈밀…….”
그런 게 있었나. 중얼거리던 그가 가볍게 턱을 끄덕여 수긍했다.
“그럼 유다정은?”
“아무거나 적당히 시켜 줘요.”
다정이 말하자 그가 점원에게 물었다.
“오늘 해산물은 뭐가 좋죠?”
“오늘은 독도 새우가 싱싱합니다. 디너 A세트에 독도 새우 파스타가 포함되어 있고 메인으로는 관자와 대구 요리가 있습니다.”
“그걸로 하죠. 그리고…….”
다정은 간결하게 주문을 이어가는 그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그가 자신의 식성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동안, 정작 자신은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기반성이 되었다.
기회가 되면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정혁이 주문을 끝마쳤다. 그때 돌아서려던 점원의 발길을 다정이 다시 붙잡아 세웠다.
식성은 몰라도 한 가지는 알았다.
“참, 이쪽 손님은 땅콩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
점원이 정중히 대답하고 돌아섰다.
눈이 마주치자 정혁이 눈썹을 슥 끌어 올렸다. 약간 감동한 듯한 얼굴이었다.
시우에게 식전 빵을 작게 뜯어 먹이던 정혁이 문득 물었다.
“일은?”
다정은 흡족하게 웃었다.
“클라이언트가 마음에 드는지 단번에 오케이 했어요.”
마침 오늘 홍 회장과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의뢰받은 주택의 디자인 초안을 보내고 그에 대해 구체적인 설계안을 브리핑하고 온 길이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설계 작업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급한 거 아니니까, 쉬엄쉬엄해.”
그의 당부에 다정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클라이언트도 아니면서 쉬엄쉬엄하란다.
“클라이언트들이 다 차정혁 씨 같으면 참 좋겠네. 돈은 돈대로 주고 쉬엄쉬엄하라고 말해 주면 얼마나 좋아?”
“그깟 거 안 하면 어때? 맨날 손목도 아프잖아.”
“손목은 고질병이고요.”
다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려 웃었다.
그때 빵을 물고 오물거리던 시우가 갑자기 홀 너머를 향해 소리쳤다.
“어! 대표 삼촌이다아! 삼초온!”
그것은 정말 뜻밖의 조우였다.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 여자와 입구 쪽에 나란히 서 있던 도준의 눈길이 그들 테이블로 향했다.
단란한 가족을 보는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 * *
얼렁뚱땅 합석하게 된 식탁 위로 긴장한 침묵이 흘렀다.
다정은 으레 정혁과 도준의 사이가 껄끄러울 것으로 짐작하고 걱정을 했는데, 의외롭게도 정혁과 허공에서 시선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사람은 도준이 아닌 수경이었다.
어찌나 앙숙처럼 서로에게 열렬히 으르렁거리는지, 도준과 다정의 어색함도 무색해져 버릴 지경이었다.
이럴 거면 왜 합석하자는 제안을 한 건지 모르겠다.
수경이 제안했고, 정혁이 수락했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시우는 그저 신이 났다.
정혁은 잔뜩 구긴 미간에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담아 쏘아 날렸다.
이수경과 권도준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을 딱 한 번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총명 아트 갤러리에서 비싼 그림을 여러 점 구입했던 그날이었지, 아마.
당시 정혁은 노형숙 관장에게 던져 줄 미끼가 필요했고, 그녀가 며느릿감으로 욕심낼 만한 조건의 인물로 고심했다.
그때 이수경을 떠올리며 권도준과 나란히 있는 그림을 설핏 상상해 보긴 했지만, 설마 두 사람이 현실에서 나란히 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굳이 관계를 정의하자면, 두 사람은 Y일대 동문이며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였다.
정혁이 하X드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한 뒤 다음 해에 Y일에 입학했으니, 알게 된 건 대략 7-8년이 넘었다 할 수 있겠다.
학연만이 아니었다. 억지스럽지만 지연 쪽으로도 관계가 있었다. 한강병원 병원장인 수경의 외삼촌이 박 회장의 주치의이기 때문이었다.
명한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한강병원 이사장의 막내딸.
두 사람도 서로의 완벽한 정체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명한유통 신사업 추진 기념행사 때 행사장에서 맞닥뜨리고 알게 된 사실이니 불과 두어 달쯤 됐으려나.
여하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이런 극적인 우연이 또 있을까.
“내 비서실장이 제안서 들고 찾아갔을 텐데.”
정혁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던지면.
“어, 왔더라.”
받아치는 목소리 역시 새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절했다던데.”
“그랬지. 단칼에.”
삭막한 분위기가 두텁게 조성되던 차에 구세주가 등장했다.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수경이 눈길을 내리자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섯 살! 토끼 반! 유시우! 입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한 시우가 또박또박 자기소개까지 하자 서릿발이 날리던 수경의 얼굴이 순간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어머나, 세상에! 얘가 언니 아들이에요?”
무심코 묻던 수경이 아차, 하더니 다정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요. 다정 씨라고 하면 건방져 보이니까 그냥 언니라고 할게요.”
“그래요, 수경 씨 편한 대로 하세요.”
다정이 너그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수경의 눈길이 나란히 앉은 정혁에게 날아들었다.
“근데, 차정혁하고는 어떻게 아세요? 혹시 이 아이가…….”
“복잡하고 필연적인 사이니까 더 묻지 마. 애 들어.”
말을 차고 든 정혁이 시우를 눈짓하며 주의를 주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수경은 눈치껏 입을 다물고 화제를 돌렸다.
“암튼, 꼬마야. 참, 시우라고 했지? 시우야. 얼굴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하고 똑 닮았는데, 넌 어쩜 이렇게 귀엽니?”
“고맙습니다. 누나!”
“누나? 에이, 이모면 몰라도 누나는 너무 심했다. 근데 듣기 나쁘지 않은데?”
수경이 기분 좋게 웃자 제자리로 쪼르르 달려간 시우가 다정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렸다.
귓속말을 하고 수줍어하는 시우를 보며 다정이 웃었다.
“시우가 누나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어…….”
그 말에 시우가 부끄러운 듯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배시시 웃은 다정이 수경에게 말했다.
“수경 씨 너무 예쁘대요. 대표 삼촌이랑 결혼하는 거냐고…….”
말끝을 줄이며 다정이 도준 쪽을 흘끔 살폈다. 도준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화에도 참여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여자들 등쌀이 영 쉽지 않은지, 그건 정혁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예쁘게 봐 줘서 고맙다. 그리고 누나는 대표 삼촌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지금 노력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시우가 응원해 줄래?”
“수경 씨, 사적인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내내 잠자코 있던 도준이 입을 열었다. 그가 던진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듯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권도준 씨, 난…….”
당황한 수경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되레 분위기가 삭막하게 흐를까 다정이 재빨리 화제를 바꿔 던졌다.
“참! 수경 씨는 차정혁 씨하고 친하신가 봐요.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네요.”
“스스럼없다기보다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거예요.”
“받은 대로요?”
“Y일대 동문이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 반말을 찍찍하잖아요. 어찌나 재수가 없던지. 왜 반말을 하느냐, 기분 나쁘다고 했더니, 꼬우면 너도 하래요. 그래서 그때부터 반말로 하기 시작했어요.”
다정의 눈이 정혁의 옆얼굴로 빙 돌았다.
5년 전 제게만 그런 줄 알았더니, 원래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그러고 다녔나 보다. 하긴,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선 멀쩡할까마는.
“그런데 언니 아들이 권도준 씨한테 삼촌이라고 하던데,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예요?”
“우리도 대학 선후배 사이예요. 얼마 전까진 선배 회사에서 월급 받고 일도 했어요.”
“그럼 언니도 S대 건축학과 졸업했어요? 건축사?”
“그렇죠.”
깊은 얘기는 자제하며 다정은 상냥하게 웃었다. 수경이 턱을 괴며 푸념처럼 말했다. 눈길은 도준의 옆얼굴을 바라본 채였다.
“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건축이나 전공할걸. 그럼 권도준 씨하고 같이 일했을지도 모르는데요.”
수경을 눈여겨보던 다정은 진심으로 기뻐 미소 지었다. 도준의 곁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혼자 애쓰는 수경이 안쓰러워 다정이 거들었다.
“선배,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 보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 너랑 시우도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도준의 입가에 아스라한 미소가 번졌다.
“수경 씨는 도준 선배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글쎄요. 제 이상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집 식구들이 다 외과의사거든요. 하나같이 사이코패스들이죠.”
“네? 사이코패스……요?”
다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잖아요. 사람 배 가르고 내장 도려내는 일을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해요? 사이코 기질이 좋은 쪽으로 발현돼서 그나마 의사 노릇을 하는 거지. 아니었으면 죄다 연쇄살인마들이었을 거예요.”
수경의 거침없는 입담에 다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 될래? 변호사 될래? 부모님이 딱 양자 간에 택일을 하라는 거죠. 의사? 죽어도 난 못 해. 그래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변호사 된 거예요. 어쨌든, 책이나 파고 음침한 사람들만 봐서 그런지 책상 앞에 앉아서 펜대 굴리며 먹고 사는 남자들은 영 시시하더라고요.”
라며, 수경이 책상 앞에 앉아서 펜대 굴리며 먹고 사는 정혁을 영 시시하게 쳐다봤다.
“전 땀 흘리고 역동적으로 일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요.”
이번엔 방싯 웃으며 곁에 있는 도준을 바라보는데 방금과는 눈빛이 확연히 달랐다.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 보면 스패너 들고 차 고치고 하는 남자들. 너무 섹시하지 않아요? 근데 도준 씨는 본질적으로 섹시해서 귓바퀴에 연필 하나만 꽂고 있어도 완벽하다는 거죠.”
아, 다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상형이 참 확고하기도 했다.
“수경 씨. 도준 선배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우리가 만약 결혼하게 되면 시우가 화동 해 주면 좋겠다.”
약간의 와인과 다정의 응원 때문인지 수경이 조금 앞서간 듯한 발언을 쏟았다. 그 순간 탕,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수경 씨. 왜 그렇게 제멋대롭니까? 내가 언제 이수경 씨랑 결혼한다고 했습니까!”
평소와 달리 언성을 높이는 도준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선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에 다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긴 한숨을 뱉은 도준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다정아. 먼저 일어날게.”
“선배…….”
다정이 붙잡아 보려 했지만 험악한 분위기만 남긴 채 도준은 야멸차게 등을 보였다.
정혁은 떨떠름하게 관망했고, 다정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으며 수경은 화끈거림을 애써 웃음으로 덮었다.
“뭘 잘못 건드린 모양이네요. 먼저 일어날게요. 오늘 반가웠어요. 기회 되면 또 봐요. 시우야, 안녕, 또 보자.”
“누나, 안녕히 가세요!”
시우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수경은 다급히 도준을 뒤쫓아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없는 방향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다정은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정혁이 빤히 눈을 맞춰 왔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요?”
“했지.”
그걸 몰라서 묻냐는 듯 정혁이 툭 뱉었다. 다정은 쭈뼛거렸다.
“난…… 수경 씨하고 도준 선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실수라는 거야. 오늘 우리 데이트잖아. 유다정은 나한테만 집중해야지. 호박 마녀랑 아무것도 아닌 권도준이 어울리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혁의 목소리에 제법 역정이 묻어났다. 아, 하고 짧게 신음한 다정은 더 언짢은 소리가 나올까 싶어 얼른 그의 팔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요. 미안해요.”
헤헤 웃으며 사과하자 차갑게 굳은 듯한 인상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럼 말해 봐.”
“뭘요?”
“권도준하고 나하고 둘 중에 누가 더 섹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