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엄마한테 남자친구가 있으면 (75/114)


75화 엄마한테 남자친구가 있으면
2023.04.20.



 
시우를 안고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민 실장이 대기 중인 자동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민 실장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를 발견하고 시우가 두 손 모아 배꼽 인사를 했다.

차 전무에게 안겨서도 인사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밝았다. 기특하지 않을 수 없어 민 실장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시우 군도 안녕. 와, 그새 더 큰 것 같아.”

“네에! 시우 이마―안큼 컸어요!”

자랑하듯 소리친 시우가 두 팔을 하늘로 쭉 뻗었다.

시우를 뒷좌석에 앉힌 정혁은 안전띠를 채우다가 문득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유다정과 함께 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뭔가 달랐다.

뭐가 다른지를 곰곰 떠올려 보던 그는 이내 원인을 생각해 내곤 민 실장에게 말했다.


“민 실장. 이 차에도 카시트 하나 준비해 놓죠.”

조수석에 올라 막 안전띠를 채우던 민 실장이 뒷좌석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자주 태우는 차에 안전 문제가 허술하긴 했다.


“알겠습니다, 전무님. 시우 군에게 알맞은 물건으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차가 천천히 구르자 시우가 대각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시우랑 우리 집에 가요?”

“아니. 엄마 집에 없어. 돈 벌러 갔어. 그래서 기다렸다가 엄마 돈 벌어 오면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하려고.”

“엄마 돈 언제 다 벌어요?”

시우의 물음에 정혁이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유시우가 직접 물어봐.”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시우의 한쪽 얼굴에 대 주었다. 잠시 후.


“엄마!”

엄마를 부르는 시우의 두 발이 경쾌하게 퉁 튀어 올랐다.


“시우, 시우는, 어…… 아저씨랑 가고 있어요. 네에! 엄마는요?”

정혁은 피식 웃으며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얼굴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네에! 엄마 안녕! 이따가 만나요!”

마치 엄마가 앞에 있는 것처럼 시우가 팔랑팔랑 손을 흔든다. 그러고는 뒤로 몸을 빼더니 휴대폰과 거리를 벌렸다.

통화가 끝났다는 사인에 정혁은 곧장 휴대폰을 제 귀에 붙였다.


“유다정, 언제…….”

『뚜― 뚜― 뚜―』

상처받은 얼굴로 끊어진 휴대폰을 쏘아보던 정혁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유시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유시우.”

“어! 네에!”

휙 돌아온 눈이 천진하게 반짝였다.


“엄마 언제 온대?”

“엄마…… 어, 이따 약속 시간까지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시우한테 아저씨랑 같이 놀고 있으라고 했어요.”

알았다는 듯이 턱을 주억거리고 있자, 시우의 앙증맞은 손이 그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아저씨. 그런데 있잖아요. 시우 야옹팡 하면 안 돼요?”

천진한 눈이 그의 휴대폰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혁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야옹팡이 뭔데?”

“게임을 말하는 겁니다, 전무님.”

민 실장이 넌지시 힌트를 주었다.


“게임?”

“네, 야옹팡이라고 남녀노소를 가라지 않고 요즘 제일 인기 있는 게임입니다. 저도 하는걸요. 시우 군, 아저씨 휴대폰에 야옹팡 있는데 이걸로 할까?”

야옹팡이 뭔지도 모르는 차 전무의 휴대폰에 어플이 깔렸을 리 없고, 민 실장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시우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시우가 고개를 휙 젖혀 정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엄마가 없을 땐 그를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는 게 여실했다.

올망졸망 허락을 구하는 눈망울을 보며 정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20분만 하는 거야.”

“네에! 민 실장 아저씨. 고맙습니다!”

시우가 방싯 웃으며 휴대폰을 받아 쥐었다.

야옹! 야옹야옹! 야옹! 야야옹!

정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차내를 가득 채우는 야옹 소리에 정신 착란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들의 여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바닥까지 끌어모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사이 차는 서초동 모처에 다다라 커다랗다 못해 웅장한 건물의 진입로로 들어섰다.

진입로 정면에 세워진 커다란 조형물에 「그랜드 아트센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차는 곧장 아트센터의 외부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차는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한 채로 시간을 지체했다.

야옹! 야옹야옹! 야옹! 야옹!

시우가 화면을 톡톡 건드릴 때마다 망할 고양이들이 시끄럽게 울어 댔다. 그 모습을 잠잠한 눈길로 지켜보던 정혁이 문득 입을 뗐다.


“유시우.”

“네에!”

대답은 씩씩한데 초롱초롱 빛나는 눈은 휴대폰 화면만 뚫을 듯이 주시했다.


“유시우 여자친구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도 의외였다.


“네에!”

정혁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있다고?”

“어, 네에! 시우도 있고, 경준이랑 수원이도 있어요. 경준이 여자친구는 윤서연! 수원이 여자친구는 조안나!”

정혁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나름 치밀한 계획이 있어 던진 질문은 맞지만,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유시우, 지금이 여자친구나 사귀고 그럴 때야?”

“어? 음…….”

휙 눈길을 돌린 시우가 잔소리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꼰대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하란 공부는 안 하고 여자친구나 사귀고 말이야. 영어도 마이 드림 이즈 타이거밖에 모르는 게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야. 엄마도 알아? 엄마가 뭐래?”

그쯤 되자 앞자리에 있던 민 실장이 귀엽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전무님. 요샌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남자친구 여자친구 없는 아이들이 없답니다.”

그러자 정혁이 반격하듯 말을 뱉었다.


“말이 돼요? 얘 고작 다섯 살이에요. 지가 여자에 대해 뭘 알아?”

“그게 꼭 이성적인 관계를 맺는다기보다 하나의 트랜드인 거죠. 성별이 같은 친구와 다른 친구를 엄연히 구분하게 되면서 여자친구라는 개념이 특별하다는 걸 조금 일찍 배워나갈 수도 있고 전문가들은 나쁘게만 보지 않더라고요.”

“나 참. 별……. 나 다섯 살 땐 영어 단어 외우느라 여자 쪽으론 눈길도 안 줬어요.”

정혁이 기막혀하자 민 실장이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세상이 빨라져서 그런가. 우리 때랑 다르게 뭐든 다 빠릅니다. 저희 둘째만 하더라도 유치원에 들어가서 여자친구가 벌써 세 번이나 바뀌었다지 뭡니까. 하하하.”

민 실장이 속 좋게 웃는다. 정혁은 한숨을 뱉었다. 할 말은 많지만, 그냥 삼켰다.

어쩐지 개나 소나 다 있는 느낌인데 내 아들만 없으면 그건 그거대로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이쯤 하기로 하고,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본질을 되새겼다.


“여하튼, 여자친구도 있고 다 컸네.”

“고맙습니다!”

“다 컸으면 유시우도 사나이야.”

“어, 맞아요! 시우, 싸나이예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유시우.”

“네에!”

“엄마한테 남자친구 있으면 어떨 것 같아?”

“…….”

갑자기 차내에 시린 정적이 깔렸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씩씩하게 돌려주던 대답이 이번만큼은 들려오지 않았다. 요란하게 울어 대던 고양이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야옹팡 삼매경이던 시우가 정혁을 향해 고개를 휙 젖혔다. 의구심과 혼란이 동시에 떠오른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정혁은 움찔 몸을 굳혔다.

역시, 시기상조였을까.

그렇지. 아직은 엄마에게 애착이 강할 나이였다. 그런데 엄마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충격과 배신감이 오죽할까.

괜한 짓을 했나, 후회하던 찰나 시우가 반짝 눈을 빛내며 짹 입을 벌렸다.


“우와! 엄마도 남자친구 있어요?!”

우와! 라니. 이건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은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긴장으로 목을 태우던 정혁은 한시름 놓고 입꼬리를 어색하게 말아 올렸다.


“글쎄, 유시우가 좋다고 하면 엄마도 남자친구가 금방 생기지 않을까? 엄만 예쁘잖아.”

“하긴…….”

중얼거리곤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정혁은 실소를 흘렸다. 쪼그만 게 뭘 안다고 ‘하긴’이란다.

어쨌거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뜸 자신감마저 솟구쳤다.


“유시우. 나 어때?”

“뭐가요?”

“엄마 남자친구로 나 어떠냐고?”

“…….”

다시 야옹팡에 정신이 팔렸던 시우의 고개가 휙 돌았다. 이번엔 쪼그만 혀를 내밀더니 눈동자가 반원으로 도르르 구른다.


“그렇게 고민될 정도로 별로야?”

“음…… 아니!”

시우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시우는 괜찮은데, 엄마는, 음…… 잘 모르겠어요.”

“뭘 몰라?”

“엄마는, 어……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왕빈 형아 나오면 막 소리 질러요.”

“왕빈?”

‘왕빈’이라면 명실상부 한류의 주역이라 불리며 명품 마스크라는 찬사를 받는 그 남자 배우?

명한전자의 시그니처 가전 라인인 「dé classe」와 명한건설의 고품격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인 「The Queens」의 전속 모델로 발탁된 그 ‘왕빈’?

어쨌거나 맥락을 확 벗어나는 말에 정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그냥요. 엄마는 왕빈 형아 좋아한다고요. 잘생겼으니까…….”

“…….”

잠시 할 말을 잃은 정혁은 피식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지금 유시우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얼굴이 왕빈에 못 미친다? 그래서 엄마의 남자친구로 별로다? 잘생김의 정도가 왕빈에 못 미쳐서?”

정혁은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유시우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데, 왕빈 실물로 보면 되게 느끼해. TV에 나오는 얼굴? 그거 다 성형발, 뽀샵발이야. 나처럼 담백하면서 조각처럼 잘생기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왕빈 아들로 안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알아. 만약 유시우가 왕빈 아들이었으면 다섯 살 중에 유시우가 제일 느끼했어. 알지도 못하면서.”

한바탕 쏟아 낸 정혁은 씩씩 흥분된 호흡을 몰아쉬며 눈길을 돌렸다. 열변을 토했건만, 그의 아들은 어느새 야옹팡에 정신이 팔린 지 오래였다.

껄끄러운 눈초리로 시우의 정수리를 쏘아보던 그가 휴대폰을 팩 낚아챘다.


“유시우, 그만해. 20분 지났어.”

“…….”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흘끔거리던 시우가 핑그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시우는 좋은데, 엄마가…….”

“엄마도 좋으면?”

“엄마가 좋으면, 시우도 좋아요!”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정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정말?”

“정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의 두 눈이 정혁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향해 초롱초롱 빛났다.


“10분 더 할래?”

“네!”

기쁘게 휴대폰을 받아 든 시우는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 시우를 정혁은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차장으로 흰색 SUV가 들어섰다. 낯익은 차를 알아본 민 실장이 말했다.


“전무님, 유다정 씨 도착했습니다.”

그의 말에 정혁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그만 들어가 보세요.”

시우를 안아 들며 말하자 민 실장이 머뭇거렸다.


“일단 대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하러요. 저기도 차 있는데.”

정혁이 다정의 흰색 SUV를 턱으로 가리켰다. 민 실장은 마지못해 묵례한 뒤 다시 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차가 떠나고 저만치로 눈길을 돌리자, 주차를 마친 다정이 앞유리창 밖으로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엄마다!”

다정을 발견하고 시우가 마주 손을 흔드는 동안 정혁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시우야!”

다정이 종종걸음쳐 달려왔다. 시우도 기다렸다는 듯이 제 엄마를 향해 달렸다.


“엄마아!”

와락 끌어안은 모자는 한동안 요란법석이었다. 다정이 뽀뽀를 퍼붓자 시우가 꺄륵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그래서 시우가 야옹팡 백 판, 아니 2백 판 깼어요.”

“우와, 우리 시우 엄청 잘했네.”

조잘조잘 떠드는 시우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다정이 한참 만에야 눈길을 들었다.


“기다리게 한 거 아니죠?”

“딱 맞게 왔어.”

“들어가요. 공연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시우를 가운데 끼워 넣고 세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공연장을 향해 걸었다.


“어! 룡룡이의 모험!”

시우가 공연장 벽면을 장식한 어린이 뮤지컬의 대형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대로 일렁이는 얼굴을 보며 다정은 푸스스 웃었다.


“맞아요. 우리 지금 룡룡이 만나러 가는 거예요.”

“우와!”

신이 나 폴짝거리는 시우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데, 공연 입장이 임박해서인지 엘리베이터로 밀려드는 인원수가 상당했다.

완전히 벽 쪽으로 밀려날 만큼 인원이 빼곡히 들어차자 정혁이 아예 시우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다정의 손도 깍지 끼어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다 놓는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와 눈을 맞추며 다정은 엷게 웃었다. 어떨 땐 철딱서니가 없다가도 이럴 땐 은근히 듬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리는 시우는 룡룡이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몹시 들뜬 얼굴이었다.

다정은 눈높이가 한참 높아진 아들의 뺨에 쪽, 뽀뽀를 했다. 그런 다정의 뺨에 정혁도 쪽, 뽀뽀를 했다.

불시에 당한 기습 뽀뽀에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눈이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 쪽, 소리에 웅성거리며 돌아보는 사람들을 훑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뒤늦게야 시우의 눈치를 살피는데, 약간 놀라 굳어 있는가 싶던 시우가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엄마랑 아저씨랑 뽀뽀했대요! 뽀뽀했대요!”

“시, 시우야!”

다정이 화들짝 놀라 시우의 입을 틀어막자 이번엔 다른 남자의 입이 열렸다.

정혁의 입꼬리가 우쭐하게 미끄러졌다.


“유시우, 봤지? 엄마도 좋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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