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보고 싶다고 해 봐 (72/114)


72화 보고 싶다고 해 봐
2023.04.09.


자정이 머지않은 시각.

현아의 오피스텔로 들어선 선영은 영문 모를 광경에 주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방에 깨진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고, 피 묻은 발자국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소파 중앙에 앉은 반라의 남자는 바지만 대충 꿰입은 차림이었는데, 얼굴 반쪽과 상반신에 피 얼룩이 낭자했다. 치료가 끝났는지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아픈 듯 머리를 쥐고 앓는 남자는 선영이 기억하기로 최근까지 현아가 데리고 놀던 그 녀석이었다.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게 틀림없다.

선영이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쥐자, 미리 이곳으로 와 사고를 수습하던 표 비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난…… 난, 괜찮아.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표 비서는 사고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했다.

현아와 김영준이란 남자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현아가 술병으로 영준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거다.

은밀히 달려온 주치의가 영준의 응급처치를 끝냈지만,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렸다고 한다.


“현아는? 우리 현아는 왜 안 보여?”

“아가씨께서는 몹시 흥분한 상태라 침실로 격리를 해 뒀습니다. 지금은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뭐?! 우리 현아가 다쳤단 말이야?!”

표 비서의 말에 선영은 아연하게 질려 침실로 내달렸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주치의의 등이 보였고, 그 뒤로 현아의 모습이 잡혔다.


“현아, 현아야! 우리 딸!”

슬립 차림으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현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치료받고 있었다. 선영이 나타나자 현아는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어흐흑, 우리 딸 어떡해! 흉 지겠네. 박 원장. 우리 현아 괜찮은 거예요?”

소독과 지혈을 끝내고 붕대를 감는 과정에서 선영은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고작 40대 초반이나 된 젊은 의사를 닦달하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큰 부상은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꿰맬 정도도 아니라 흉이 남더라도 레이저 시술 몇 번이면 다 없앨 수 있습니다.”

치료를 마친 주치의가 가지고 온 도구들을 챙겨 일어나며 당부했다.


“일단 안정을 취하시고 내일쯤 한번 내원해서 경과를 보죠.”

“수고했어, 박 원장. 참, 이 일 우리 회장님 귀에 안 들어가도록 조심해 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장님. 그럼.”

주치의가 돌아가고 선영은 측은한 딸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다독였다.


“현아야, 우리 딸. 엄마가 다 해결할 테니까 넌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 * *

툭, 소리와 함께 내던져진 봉투가 테이블 위로 미끄러졌다.

아픈 머리를 쥐던 영준이 제법 묵직한 모양의 봉투를 바라보다가 불만스럽게 눈을 치떴다.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선영이 도도한 자태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 사람 머리를 깨트렸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없으시고.”

“네가 바라는 게 진정한 사과야? 그럼 내가 이 돈 봉투 도로 챙겨 넣고 너한테 진정으로 사과하고.”

영준은 의외로 강적이란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 딸에 그 엄마 아니랄까 봐 돈 몇 푼 가지고 사람 자존심을 긁어 대는 건 똑같았다.


“와, 아줌마 추진력 짱이네요.”

“이사장님이라고 불러, 이 자식아. 너 내 유치원 밥 먹고 살잖아.”

따끔히 꾸짖는 말에 킥킥 웃던 영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에, 그럽죠. 이사장님.”

빈정거리는 태도를 귀엽다는 듯이 흘려 넘긴 선영이 돈 봉투를 눈짓했다.


“그 정도면 섭섭하진 않을 거야. 병원에 말해 뒀으니까 정밀 검사도 받아 봐. 아니, 이참에 건강검진까지 싹 받으면 되겠네. 휴가도 줄 테니까 며칠 입원해서 푹 쉬다 나와. 너 공짜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돈 걱정은 말고.”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지?”

영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너 그동안 순진한 우리 현아한테 빌붙어서 재미 좀 봤잖아. 욕심도 적당히 부려야지. 젊은 애가 그렇게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 너?”

쾅! 테이블을 내리친 영준이 눈을 부라렸다.


“아줌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누굴 거지로 알아? 내가 이번 일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오늘 있었던 일 인터넷에 확 다 뿌려 봐? 앙?”

“야이 자식아. 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박이야? 그래, 뿌리고 싶으면 뿌려. 너 내가 아직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맘만 먹으면 너 한국 땅에서 아주 매장시킬 수 있어. 알긴 해? 퇴물 주제에. 지금처럼 유치원에서 애들하고 공놀이라도 하려면 감지덕지하란 말이야. 알겠니?”

모욕성 짙은 충고를 콧방귀로 마무리 지은 선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딸이 갖고 놀던 장난감이라 귀엽게 봐줬다. 돈 챙겨서 꺼져, 자식아.”

 

 

* * *

예약제로 운영되는 유명 호텔 bar의 프라이빗룸. 그곳에서 은밀한 접선이 이뤄지고 있었다.

명품 라이터의 뚜껑을 열자 퐁,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담뱃불을 붙이는 승훈의 눈길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너 손은 왜 그러냐?”

가볍게 드레싱을 해 놓은 손을 가리켜 묻지만, 현아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다.


“됐고, 말한 건?”

“아, 잠깐만.”

현아가 독촉하자 승훈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조작한 뒤 그녀에게 내밀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현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승훈은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정말…… 이 여자야?”

“재밌지?”

“이 여자라고?!”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현아가 의심스러운 투로 재차 확인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어쩌랴. 사실인걸.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이젠 대답하기도 지친다는 듯 승훈은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여자가…….”

휴대폰으로 보는 사진 속 여자는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여러 장의 사진 속 배경이 되는 곳은 주로 「원조 파전」이라는 구멍가게 앞에 좁다란 평상이었다.

누런 장판이 깔린 평상에 퍼질러 앉은 중년의 여자는 껌을 씹거나, 부채질을 하며 한가롭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일상처럼 보였다.

보라색 고무 슬리퍼와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소위 ‘몸빼 바지’라 부르는 펑퍼짐한 바지를 즐겨 입었고 몇몇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여자가 정혁 오빠 엄마일 수가 있어!”

현아가 진저리를 치며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사진 속 여자는 세상 본 적 없는 상스러움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제 휴대폰이 벽을 퉁 때리고 소파 위로 떨어지자 승훈이 탄식하며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야아, 조심해. 네 거냐! 그리고 오빠가 그거 알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승훈이 투덜거리며 버번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털어 넣었다.

명한가의 후계자인 차정혁의 출생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가 있었다.

박종순 회장의 외아들인 차재성은 일찍이 일가를 꾸렸는데, 아내는 같은 대학 출신인 미모의 재원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재성의 아내가 출산 중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지 뭔가.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상 빛을 보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가엾은 아이는 몇 년 후 아버지까지 병으로 잃고 만다.

여기까지가 대중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건 박종순 회장이 쓴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박 회장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해서 그렇지, 정혁의 생모에 대해선 집안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차츰 잊히는가 싶었는데, 최근에는 회사까지 드나든 모양이었다.

요란한 차림을 하고선 내 아들을 만나러 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의 동영상과 사진이 인트라넷을 떠돌고, 그 일로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한참 떠들썩하게 시끄러웠던 모양인데 그조차도 머지않아 내부 차원에서 정리가 된 듯했다.

어쨌든 집안일이라 승훈은 알고 있어도 어디 가서 써먹지도 못할 거라 현아에게 토스했더니 의외로 현아는 그 일에 흥미를 보였다.


“주소랑 자료랑 나한테 다 보내.”

“그래, 그런데 그건 어디다 쓰려고?”

승훈이 현아의 잔에 버번을 따라 주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스트레이트로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현아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엄마가 알아 오래.”

 

 

* * *



『병원에 더 다니셔야 하는 거 아니야?』

휴대폰 너머로 솔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추밭 때문에 기어이 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어떡해.”

정애와 함께 시우를 데리고 청주 집으로 내려온 다정은 해가 저물 즈음 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고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오게 된 건 다 저녁때 갑자기 집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정애 때문이었다.

한바탕 폭우가 내렸으니 고추밭이 걱정스러워 밤잠을 설칠 게 분명했다.

쇠심줄 같은 고집을 어떻게 이기나. 마침 금요일이라 시우 유치원도 걱정 없고 해서 급작스럽게 내려오고 보니, 솔이에게 언질 없이 온 게 신경 쓰였다.


“저녁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일요일에 점심 먹고 올라가려고. 일주일만 여기 계셨다가 다음 주에는 다시 우리 집에 와 계시기로 했어.”

『그럼 됐고. 내려간 김에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응, 올라가서 전화할게.”

솔이와 통화를 마친 다정은 대청마루 아래로 내려가 신을 신고 마당 한가운데 있는 평상으로 건너갔다.

피곤했던지 느지막이 저녁을 먹은 시우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생처음 외갓집에 내려온 것도 신기한데 저녁을 먹기 전까지 잠자리를 쫓아다니느라 피곤할 만도 했다.

평상 아래에선 모깃불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평상 위엔 먹다 남긴 수박과 잠든 손자에게 부채질을 해 주는 정애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내 손자 팔다리에 모기라도 붙을까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하는 정애의 눈길이 흐뭇했다.


“엄마 그렇게 예뻐?”

피식 웃으며 다정이 묻자 정애가 정색하고 표정을 굳혔다.


“안 예뻐. 그냥 그려.”

부러 더 뚱한 얼굴을 해 보인 정애는 손자에게 내주던 살가운 무릎 대신 베개를 끼워 넣고 돌아앉았다.

속마음을 들킨 게 멋쩍었던지 정애는 부채만 퍽퍽 부쳤다. 그런 엄마를 보며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쁘면 예쁘다고 해. 사람이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해? 사실은 시우보다 내가 더 예쁘지, 응?”

다정이 돌아앉은 정애의 허리를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정애는 몸을 흔들며 역정을 냈다.


“아이고, 얘가 징그럽게 왜 이랴?”

“에이, 좋으면서.”

“좋긴, 하나도 안 좋아. 더워 죽겄어, 절루 가!”

날아드는 면박에도 굴하지 않고 다정은 엄마의 등을 더 꼭 끌어안았다. 엄마 냄새가 났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엄마, 더 자주 올게. 엄마가 아예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도 좋고.”

“그 닭장 같은 데서 난 답답혀서 못 산다.”

딱 잘라 선을 그은 정애가 갑자기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어디가?”

“광에 가서 모기장 좀 꺼내 올란다. 내 새끼 모기 물릴라.”

그저 앉으나 서나 손자 걱정인 모양이다. 다정은 입을 쭉 내밀고 핀잔을 던졌다.


“시우가 내 새끼지 어떻게 엄마 새끼야!”

“망할 년.”

 

* * *

시우는 안방에서 할머니와 꼭 붙어 잠이 들었다. 모기장을 쳐 주자 그조차도 신기해서 한동안 그 안을 정신 없이 뛰어다녔었다.

시우를 재우고 마루로 나왔을 때 마루 위에 둔 휴대폰이 징징 몸을 떨었다. 마루를 때려 대는 진동소리가 요란해 다정은 얼른 휴대폰을 쥐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했더니, 차정혁 그 남자였다. 다정은 얼른 평상 위로 올라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야?』

“그걸 차정혁 씨가 왜 물어요?”

장난스레 받아치자 너머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벌써 꽁했다.


『유다정. 우리 연애하기로 했잖아.』

“그런데요?”

『그런데 남자친구한테 말도 없이 막 어디 가고 그럼 어떡해? 내 아들까지 데리고.』

다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어디 간 건 어떻게 알아요?”

『내가 모르는 게 별로 없어.』

뻔하지 뭐. 솔이가 일러바쳤을 거다. 피, 하고 입바람 소리를 낸 다정이 새침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면 남자친구지. 어디 갈 때마다 보고 해야 해요?”

『그런가?』

또 쉽게 수긍하니까 다정은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푸스스 웃음이 터진 다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너무 급하게 출발해서 미리 말 못했어요. 엄마 집에 와 있어요. 청주요. 주말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올라가려고요.”

『그래, 벌써 보고 싶네.』

다정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정혁이 살그머니 뒷말을 이었다.


『보고 싶다고 해 봐.』

“보고 싶어요…….”

『별수 없네.』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가로등도 없고 풀벌레 소리만 무성한 시골 마을에 갑자기 부아아앙! 하는 엔진 소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다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선가 들어 본 소리에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유다정. 빨리 와. 여기 좀 무서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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