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렇게 번거로운 건 너한테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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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렇게 번거로운 건 너한테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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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렇게 번거로운 건 너한테만 하는 거야
2023.04.06.
툭, 투둑, 툭.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차분했다.
매섭게 쏟아붓던 장맛비는 기세가 한풀 꺾여 적당히 운치 있고 적당히 낭만적인 리듬으로 내리고 있었다.
“유시우 보고 싶다.”
파랗게 저물어 가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정혁이 중얼거렸다.
부지런히 핫초코를 마시던 다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어딘가 울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정은 그가 아이를 이렇게나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감상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빗소리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정혁 씨는 시우가 되게 좋은가 봐요.”
다정이 묻자 창을 바라보던 정혁이 눈길을 돌렸다.
“유시우 귀여워.”
그렇게 말하곤 그리워 애가 타듯 뱉는 한숨이 땅이 꺼지게 무거웠다. 갑자기 밀어닥치는 음울한 기운에 압사당하기 직전이라 다정은 재빨리 분위기 환기를 도모했다.
“하긴. 내가 낳았지만, 우리 시우가 좀 많이 귀엽긴 하죠.”
그녀가 우쭐한 투로 자만했다. 그러자 시무룩하던 그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다가와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유다정도 귀여워.”
장난스럽게 소곤대고 멀어지는 그를 보며 다정은 쿡 웃었다. 귀엽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왜 엉큼한 눈빛을 보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다정의 관자놀이며 귓바퀴, 귀밑을 따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허리와 허벅지를 강하게 끌어안는 손길과 야릇하게 돌변한 숨소리에 다정은 소름이 일었다.
이윽고 뺨을 따라 미끄러진 입술이 핫초코의 열감으로 발갛게 색이 오른 다정의 입술 주위를 맴돌았다.
숨결에서 밀려 나오는 초콜릿 냄새가 달콤했다. 입술을 머금으면 초콜릿처럼 달콤쌉싸름한 맛이 날 것 같았다.
닿을 듯 말 듯, 정혁은 달큼한 숨결을 따라 느리게 코끝을 덧그렸다.
사냥한 토끼 한 마리를 산 채로 눈앞에 두고 어떻게 잡아먹어야 만족스러울지를 고민하며 킁킁거리는 맹수처럼.
그러고는 한 입 거리인 양 단번에 머금어 삼켰다.
눈을 질끈 감은 다정은 바짝 오그라든 채 허공에 뜬 머그잔만 꼭 움켜쥐었다.
두 입술이 굴곡진 모양대로 맞물렸다. 진득하게 밀착하고 비벼지던 입술이 각도를 바꾸며 살짝 틈을 벌렸다. 다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자, 잠깐요, 쏟겠어요.”
다정이 머그잔을 들고 어쩌지 못해 버둥거렸다. 그러자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고 뭉그러트리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서 머그잔을 가로챘다.
그렇게 다 마시지 못한 핫초코는 버림받은 채 협탁 어딘가로 대충 떨려나고 말았다.
질척하고 야릇한 숨소리가 게스트룸 안에 낮게 깔렸다.
말랑한 입술이 젖어 들수록 애초에 누구의 것인 줄도 모를 초콜릿 냄새가 서로의 호흡에서 진하게 뒤섞였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점을 부드럽게 자극하자 다정이 어깨를 잘게 떨며 비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며 두 팔은 그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는다.
입술을 붙인 채로 정혁은 피식 웃었다. 고집스럽고 두터운 신념에 반해 유다정은 성직자처럼 따분하지 않아 좋았다. 욕망에 약한 타입이랄까.
이렇게 애정을 확인할 때마다 그에게 죽을 것처럼 안겨 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호흡이 버거워 틈만 나면 헐떡거리기 바쁘면서도 다정은 보채듯 그에게 더 꼭 매달려 왔다.
그런 허술한 점들이 그녀를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끼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집요하게 구속하던 입술을 놓자 다정의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양 뺨은 색스럽게 붉고 흐릿해진 눈동자는 갈구하듯 그를 향해 흔들렸다. 정혁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입술을 내렸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다정의 머리칼이 시트 위로 흩어졌다. 단번에 묵직한 체중이 덮쳐 오더니 허벅지쯤 아슬아슬하게 걸린 티셔츠 안으로 매끄러운 손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길이 부드럽고 섬세한 굴곡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또렷하게 전해질수록 그의 가슴 또한 격렬하게 고동쳤다.
정혁은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으로 딛고 서서 허리춤을 쥐어 셔츠를 뒤집어 벗고 다시 쓰러지듯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맞댄 체온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열띤 손길과 입술은 쉴 새 없이 서로를 탐했다.
그때 희미한 기계음이 귀에 스쳤다.
띠리리릭…….
맹렬히 입술을 빼앗기던 중 다정의 눈이 반짝 떠졌다. 그것이 도어락 해제음이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게스트룸이 현관 가까운 위치라 희미하게나마 귀에 잡혔지, 정혁의 침실 같으면 전혀 듣지 못했을 거다.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된 가운데 다정이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누, 누가 온 것 같아요. 방금 소리가…….”
“잘못 들은 걸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던지, 그는 모른 척 계속 입술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대놓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까지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똑똑.
“전무님.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그를 찾아 애타게 부르짖기까지 한다.
정혁은 모든 행위를 중단한 채 다정의 목덜미에 이마를 처박았다. 세상 끝을 맞이한 것 같은 절망 어린 한숨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거실과 침실을 한차례 훑고 온 민 실장은 마지막으로 게스트룸을 노크하고 잠시 문 앞을 서성였다.
엄마가 보고 싶을 거라며 아들 걱정을 하기에 부리나케 돌아와 봤더니 차 전무가 보이지 않았다.
똑똑.
민 실장이 재차 노크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한 그가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그때 철컥, 하고 안쪽에서 먼저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문으로 나온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민 실장은 왜인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습니다.”
“…….”
서슬이 퍼렇게 스민 눈빛에 치여 뒷걸음친 그는 억지웃음을 띤 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하신 임무는 정확히 40분 만에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
험악하다 못해 살벌한 기류가 흐르고, 민 실장은 자포자기한 투로 물었다.
“전무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 * *
왜 남의 집을 함부로 드나드냐며, 민 실장에게 당분간 레지던스 출입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부르면 재깍재깍 오라며 원치도 않던 사람에게 던져 준 카드키 역시 압수당했다.
그러고도 갖은 욕을 먹은 뒤에야 민 실장은 우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측은한 어깨를 하고 의기소침해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야 거실로 나온 다정은 테이블 위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갖가지 명품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과 상자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유다정 입을 거.”
정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상자를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란제리부터 시작해 원피스와 구두, 그리고 가방에 손수건까지. 정말 세심하게 준비했다.
이것들을 한 시간 안에 심부름시켜 놓고 눈앞의 남자는 민 실장에게 그렇게 욕을 퍼부은 거다.
잔인한 사람 보듯 하는 다정의 눈초리에도 정혁은 아랑곳없이 길고 납작한 상자에서 원피스를 꺼내 다정의 몸에 덧대어 보았다.
“어울릴 줄 알았어.”
그가 말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올리브색 바탕에 몬스테라 잎사귀 패턴이 큼직하게 들어간 원피스였는데, 한눈에 봐도 다정이 평소 선호하는 차분한 스타일이지만, 브랜드 차이는 엄청났다.
다정은 약간 불편한 웃음을 지었다.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건 맞지만, 너무 고가의 물건들이라 숨이 턱 막혔다.
“고마워요, 차정혁 씨. 얼만지 말해 줘요. 지난번 그 계좌로 입금할게요.”
지난번, 휴대폰 값을 입금했던 계좌를 말하는 거였다. 계좌를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다음 날 칼같이 휴대폰 값을 입금했다는 문자를 받긴 했었다.
그땐 그냥저냥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유다정, 애인이 주는 건데 돈으로 되갚는 무정한 여자가 어딨어?”
“아니, 난…….”
그의 예민한 반응에 다정은 멋쩍은 얼굴이 되어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녀도 고민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 연인이고, 이런 계산법이 그에게 불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인끼리 주고받기에도 다정에게 이것들은 너무 고가였다.
“그래도 차정혁 씨…….”
“유다정. 연애 한번 안 해 본 티 좀 내지 마.”
그 말에 다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순간 부인도 부정도 하지 못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그러는 차정혁 씨는 엄청 많이 해 봐서 익숙한가 보죠? 와, 자랑스럽겠다. 어? 이렇게 비싼 걸 여자들한테 척척 사 주고! 카사노바가 어딨나 했더니, 여기 계셨네!”
“내가 원래 처음 하는 것도 처음 같지 않게 잘하는 측면이 있긴 해.”
“아하, 처음이시다? 치, 거짓말.”
다정이 신소리 집어치우라며 콧방귀를 뀐다. 발끈하는 유다정이 귀여워서 정혁은 피식 웃었다.
“남녀를 통틀어 누군가에게 뭘 줘야 한다면 난 돈을 줄 거야. 그게 젤 간단하고 편하잖아. 이렇게 번거로운 건 너한테만 하는 거야. 유다정은 내 여자친구니까.”
중얼중얼 말하며 정혁이 중간 크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여자……친구요?”
시근대기도 잠시 다정이 입술을 말아 물고 눈알을 굴렸다. 여자친구. 어딘가 색다른 어감이었다.
“상황에 따라, 여자친구도 됐다가 애인도 됐다가 내 아들 엄마도 됐다가, 뭐 그런 거지.”
그게 뭐가 중요해, 라며 그가 상자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보라색 브래지어를 골몰히 바라보았다.
정형적인 속옷은 너저분한 레이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실용성보다 다른 것에 더 치중한 디자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브래지어와 다정의 어깨 아래를 번갈아 비교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유다정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
순간 다정의 얼굴에 또다시 불이 확 번졌다. 다정은 쓸데없이 예쁜 속옷이 담긴 상자를 재빨리 낚아채고 항변했다.
“아, 아니거든요! 내 사이즈 맞거든요! 딱 보면 몰라요?! 완전 딱 맞아!”
정혁은 킥킥 웃었다. 매번 비슷한 걸로 놀려도 진심으로 반응을 하니, 유다정은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흥분해서 방방 뛰는 다정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정혁은 소파에 등을 대고 벌렁 누웠다. 다정이 휙 몸을 떼자 그가 도로 붙잡아 제 가슴에 밀착시켰다.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보면 몰라? 생·활·밀·착 중이잖아.”
* * *
딱딱, 불편한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 왔다. 나른하게 베개에 파묻혀 있던 영준은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보았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현아가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딱딱 물어뜯고 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인 현아가 시근덕거렸다.
“왜 안 받는 거야!”
옆자리에서 그녀의 이상 행동을 지켜보던 영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보나 마나 절 퇴짜 놓은 그 남자에게 전화하는 걸 테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걸 알면서 1분마다 통화를 시도하는 걸 보면 저것도 병이었다.
“뭐가 그렇게 초조해?”
영준이 달래 보려 하지만 지금 현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현아.”
불러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래도 방금까진 여느 연인들처럼 살을 맞대고 있었는데,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기분이 상한 영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현아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오현아. 내 말 안 들려?”
휴대폰을 빼앗긴 현아는 심사 복잡한 얼굴로 영준을 쏘아보았다.
“야, 김영준. 당장 내놔.”
“바빠서 못 받겠지. 대체 누군데 그래?”
영준이 현아의 휴대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기분이 상한 투로 중얼거린다.
“뭐야, 이거. 차 뭐시기가 아니잖아.”
통화목록을 가득 채운 이름은 영준이 예상하던 이름이 아니었다.
“야, 오현아. 지승훈이 누구야? 너 그새 또 딴 새끼 생겼냐?”
“뭐라는 거야? 당장 내놓지 못해?”
“너 똑바로 말해. 그새를 못 참고 또 바람피웠냐고. 내가 결혼할 새끼 딱 한 놈만 봐준다고 했지?”
현아는 영준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기가 차서 말이 다 안 나왔다.
“야, 김영준. 애초에 세컨드 하겠다고 자처한 게 너야. 그리고 세컨드 주제에 네깟 게 봐주긴 뭘 봐줘?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당장 휴대폰 내놔.”
현아가 손을 뻗지만, 돌려줄 생각이 없던 영준은 아예 침대 밖으로 몸을 피했다.
“내놔! 이 X신 X끼야!”
현아가 욕설을 지껄이며 침대를 차고 내려갔다. 전직 축구선수의 날랜 몸을 뽐내듯 영준은 빈 술병이 나뒹구는 테이블을 빙글빙글 돌며 현아의 약을 올렸다.
“말할 때까지 못 준댔지.”
“야, 김영준. 미쳤냐? 퇴물 X끼가 같이 좀 놀아 주니까 영 주제 파악이 안 되지? 응?”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장난기가 섞여 있던 영준의 얼굴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퇴물……. 내가 그 말 하지 말랬지.”
“퇴물 X끼를 퇴물 X끼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휴대폰 내놓으라고!”
현아가 다가오자 영준이 휴대폰을 쥔 손을 높게 쳐들었다. 껑충껑충 뛰지만, 장신의 남자를 상대로 닿을 턱이 없다.
“꺄아아아악! XX! 당장 내놔!”
현아가 악에 받쳐 비명을 질러 댔다. 반쯤 실성한 듯한 모습을 보며 영준은 코웃음을 쳤다.
“야, 오현아. 같은 처지끼리 고고한 척하지 마, 아무리 발악해도 내가 퇴물인 것처럼 너도 첩X 딸인 건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뭐?”
경악으로 굳은 현아의 눈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떨리는 손끝이 빈 술병을 낚아챈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