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생활 밀착형 로맨스 (70/114)


70화 생활 밀착형 로맨스
2023.04.02.


정혁은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 비를 쫄딱 맞았으니 평소라면 느긋하게 입욕이라도 했을 테지만, 유다정이 제집에 있는데 샤워가 느긋하게 될 리 없었다.

검은색 슬랙스 위에 헐렁한 니트 티셔츠를 대충 꿰어 입고 거실로 나가자 민 실장이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5분쯤 됐습니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 소파 중앙에 몸을 파묻자 민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태블릿 PC를 내보였다.

비정상적으로 길고 늘씬한 모델들이 화면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 보시는 디자인들이 F/W 신상입니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화면을 톡톡 넘겨 보던 정혁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난해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 그는 제법 긴 시간 심사숙고해 몇 가지 물건들을 선택했다.


“여기 체크한 것들로 준비해 줘요.”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습관적으로 왼팔을 들어 올린 정혁은 뒤늦게야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얼마나 걸릴까?”

“급하십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내 아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울까 봐.”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인데 민 실장은 되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팔불출쯤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나쁘지 않아 정혁도 입꼬리를 슬쩍 미끄러트렸다.


“가능하면 한 시간 안에 준비해 보겠습니다.”

“좋네. 알았어요.”

흔연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민 실장은 짧은 묵례를 남기고 돌아섰다.

주방으로 향한 정혁은 수납장을 열었다. 고민 끝에 광택이 없는 새하얀 머그잔을 꺼내 들고 아일랜드 식탁 끝에 배치된 캡슐 머신을 마주 보았다.

다양한 종류 안에서 그에게 선택받은 캡슐이 기기에 삽입되고 추출 버튼이 눌러졌다.

지이이이잉.

온기가 낯선 공간에 달콤한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 * *

그 무렵 샤워를 마친 다정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목욕이라기엔 짧고, 샤워라기엔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 정도만 자각하고 있었다.

정혁과 각자 씻고 이따 만나기로 했는데, 그 이따가 언제인지 몰라 뒤늦게야 신경이 쓰였다.

다정은 서둘러 젖은 몸에 바스타월을 두르고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바디워시의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잔향이 기분 좋게 코끝을 감돌았다.

이윽고 파우더룸의 붙박이 화장대 앞에 선 다정은 잠시 넋이 나가고 말았다. 뭔가를 깨달은 순간 아, 하고 탄식이 흘렀다.

생각해 보니 입을 옷이 없었다. 또 생각해 보니 그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막 씻고 나와 보얀 얼굴로 거울 속에서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는 여자를 보며 해결책을 떠올리려 애쓰던 그때, 무언가 슥슥 끌리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짐작이 맞다면,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였다. 그걸 알아채기 무섭게 시커먼 그림자가 파우더룸 안으로 불쑥 들이닥쳤다.


“히익!”

거울에 비친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돌아선 다정은 저도 모르게 후다닥 뒷걸음치며 가슴 앞으로 팔을 교차했다.


“차, 차정혁 씨! 뭐예요? 당장 나가요!”

마치 골목에서 변태라도 만난 듯한 반응에 정혁은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유다정, 넌 가만 보면 나랑 애까지 만든 사이라는 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그가 잘 개켜진 티셔츠를 펼쳐 들며 다가왔다.

흠칫 놀란 다정이 어깨를 웅크리지만, 큼직한 손은 개의치 않고 다정의 겨드랑이 아래를 기습적으로 파고들었다.


“꺄악!”

순간 다정은 너무 놀라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덩달아 놀란 팔다리가 허공을 버둥거렸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편편한 것이 닿았다.

다정을 화장대 위에 앉힌 뒤 정혁은 가지고 온 티셔츠의 맞물린 곳을 벌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게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난리 발광을 췄냐며 시침을 뚝 떼고 앉아 있자 정혁이 킥킥 웃었다.


“무슨 상상 했어?”

“아무 상상도요.”

새침하게 잡아떼는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정혁이 티셔츠를 벌려 다정의 머리에 쏙 끼워 넣었다. 그러곤 좌우를 슥슥 당겨 티셔츠를 끌어 내렸다.


“아무리 찾아도 너한테 입힐만한 게 이것뿐이라. 입어 봐. 마음에 안 들면 안 입어도 좋고.”

“무조건 마음에 들어요.”

화장대 아래로 폴짝 뛰어내린 다정은 냉큼 티셔츠 안으로 팔을 끼워 넣었다. 하얀색 티셔츠에서 보드라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엉덩이쯤 걸친 아랫단을 슥슥 끌어내리고 나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헐거워진 바스타월이 발등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이렇게 큰 것밖에 없어요?”

다정이 손가락 끝에서 한 뼘이나 아래로 늘어진 긴 소맷자락을 펄렁거리며 불평했다. 그러자 정혁이 눈썹 근처를 긁적이며 반문했다.


“유다정한테 맞는 옷이 내 집에 있으면 이상한 거 아닌가?”

이번엔 다정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그가 다시금 다정을 아이처럼 안아 화장대 위에 앉혔다. 그러곤 머리에 동그랗게 말려 있던 수건을 풀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확 붉어진 다정이 얼른 수건을 가로챘다.


“하지 마요.”

“있어 봐.”

“내, 내가 할 수 있어요.”

“유다정이 할 수 있어도. 그래도 내가 해 줄게.”

“번거롭게…….”

“번거로운 것도 사서 하고 그러는 게 연애 아니야?”

“…….”

다정이 말이 없자 그가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숙여 빤히 눈을 맞췄다.


“연애하자며. 아냐?”

“아뇨, 맞아요.”

다정이 수긍하며 작게 웃었다. 이런 말을 묻고 확인하는 매 순간이 민망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녀가 실없이 웃자 정혁의 입꼬리도 느슨하게 올라갔다.


 
집사에게 몸을 맡긴 고양이들은 다 이런 느낌일까. 두피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는 손길이 좋아서 다정은 그에게 몸을 내맡긴 채 고롱고롱 숨만 쉬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정의 눈이 반짝 떠졌다.


“참, 시우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내 휴대폰…….”

“어딨어?”

정혁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들어오다가 침대 옆 협탁에…….”

그 말에 정혁이 그녀의 양 팔꿈치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러자 다정의 두 팔이 자연스레 그의 목에 감겼다.


“잘 매달려.”

당부한 그가 어미 코알라처럼 다정을 안고 파우더룸을 나갔다. 가슴을 바짝 밀착하고 껴안은 그에게서 샤워할 때 맡았던 바디워시의 향이 진하게 밀려 나왔다.

번거로운 걸 사서 한다는 게 이런 걸까. 내 다리로 걸을 수 있지만, 굳이 상대방에게 매달려서 운반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까지 간 정혁은 다정을 제 다리에 앉힌 채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곤 협탁에서 휴대폰을 쥐어 건네었다.


“유시우한테 전화해.”

다정은 또다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맨 허벅지 아래 검은 슬랙스의 매끄러운 감촉과 또 그 아래 감춰진 탄탄한 근육의 씰룩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상태로요?”

“번거로워도 이 상태로 해.”

아까 뭘 들었냔 식으로 그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머뭇거리자 그가 다정의 팔을 약하게 깨물었다. 아, 소리를 낸 다정이 깜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빨리하라며 협박하듯 연신 깨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다정은 하는 수 없이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목록에서 솔이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엄마!』

신호가 세 번 울렸을 때 시우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전화라며 솔이가 곧장 시우에게 받게 한 모양이었다.


“우리 시우. 유치원 잘 다녀왔어요?”

다정의 목소리 톤이 180도 달라지자 정혁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네에! 시우 유치원 잘 다녀왔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냈어요!』

시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리자 정혁이 휴대폰 바깥면으로 귀를 붙여 왔다. 다정이 떨어지라며 사인을 보내지만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 시우 뭐 하고 있어요?”

『어…… 있잖아요, 시우랑 이모랑, 자기 아저씨랑 젱가! 젱가 하고 있어요.』

자기 아저씨는 오늘도 카페에서 사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하고 다정이 대꾸를 하는 사이 누군가가 탑을 무너뜨렸는지 아쉬운 탄식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 시우야. 이모랑 자기 아저씨랑 재미있게 놀고 있으면 엄마가 이따 데리러 갈게요. 아이 착해라, 엄마 아들. 네에. 이따 봐요.”

시우와 통화를 마치자 바짝 닿아 있던 정혁의 얼굴도 멀어졌다.


“나도 바꿔 주지.”

다정이 주책이라는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라고 하고 바꿔 줘요?”

“그런가.”

핀잔을 주고 보니 또 미안해지고 말았다. 다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점에 있어선 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차정혁 씨.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조만간 시우한테도 차정혁 씨가 아빠란 말을 해 줄 생각이에요.”

“와, 거기까진 기대 안 했는데.”

“근데, 아직은 각오가 안 섰어요. 그래서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그래. 그럴게. 기다릴 수 있어.”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려서 다정은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어색해진 다정이 뺨을 긁적이고 있자 이번엔 정혁이 물었다.


“핫초코 줄까?”

어린애한테 사탕 줄까? 하는 투라 다정은 픽 웃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협탁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껏 수그린 그의 가슴팍이 다정의 귀를 눌렀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따귀를 때리는 것처럼 힘찼다.


“뜨거워.”

그가 주의를 주며 머그잔을 내밀었다. 비 오는 날, 따뜻한 핫초코 한 모금은 달고 맛있었다.

호호 불어 가며 연거푸 핫초코를 마시는 다정에게 그가 물었다.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요?”

“내가 문자로 보고 싶다고 했잖아.”

다정은 눈을 홉뜨고 생각했다. 한의원에서 문자를 주고받은 기억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무 답장 안 했어?”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서 못 했어요.”

그때 정애가 치료실을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답장을 했을 거다.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다정은 웃음이 날 것 같아서 재빨리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봤자 입꼬리 쪽이 자꾸만 말려 올라가서 아무 소용 없었지만.


“나도 보고 싶다고…….”

소곤소곤 흘리는 목소리에 정혁이 씰룩거리는 입가를 슬며시 문질렀다. 그러더니 불쑥 다정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나도.”

“나도요.”

“내가 더.”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웃기도 잠시, 또다시 어색함이 밀려들었다.

큰일이다. 이젠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게 되어 버려서 빨리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데, 통 쉽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다정이 아기처럼 안긴 자세를 지적했다.


“유다정이 그거 다 마실 때까지.”

“뜨거워서 빨리 못 마신단 말이에요.”

“잘됐네.”

입천장이 홀랑 벗겨지지 않고선 이 민망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부지런히 마시는 수밖에.

그즈음 정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법 진중했다.


“유다정,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오늘부터 진짜 1일이잖아.”

“그렇죠…….”

다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생각엔 우리 연애에 명확한 컨셉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컨셉이요?”

“응. 그래서 내가 몇 가지 보기를 준비했어. 유다정은 고르기만 하면 돼.”

“…….”

“1번. 낭만이 가미된 치명적인 로맨스.”

곰곰 생각하던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2번은요?”

“야수와 야성을 오가는 담백한 로맨스.”

다정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성과 야성이 아니라 야수와 야성이에요?”

“이성 따윈 끼어들 겨를 없지.”

아, 시종일관 짐승……. 알 만하다는 듯이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성이 없는데 담백할 수 있어요?”

“노력해 볼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났다. 어쨌든 되게 위험해 보였다.


“그럼 3번은요?”

“3번은 파격적인 격정 멜로. 난 3번. 유다정은?”

다정은 고민스러워 눈만 깜빡였다. 어차피 지향하는 바가 다 같은데, 이게 고르는 의미가 있을까 싶다.

정혁의 눈길이 집요하다. 빨리 고르라며 무언의 독촉이 날아들었다. 고민이 깊었지만, 다정은 곧 결정을 내렸다.


“난 4번. 잔잔하고 아름다운 생활밀착형 로맨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혁은 하, 하고 탄식했다. 제목부터 되게 밋밋한 게 시시한 컨셉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우겨 보기로 한다.


“4번 없어.”

“보기를 출제할 권리는 나한테도 있어야죠.”

정혁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생활밀착형 로맨스가 뭔데.”

목을 울려 음, 소리를 내던 다정이 그의 무릎 위에서 다리를 동동거리다가 대답했다.


“가끔 라면도 먹고 가고, 또 가끔 커피도 마시고 가는 뭐 그런 거죠.”

언제 안 내켰냐는 듯 정혁의 입꼬리가 어쩌지 못하고 씰룩거렸다.

‘3번, 파격적인 격정 멜로’에 비하면 어딘지 많이 손해 보는 기분이지만 첫술에 배부르면 욕심쟁이다.


“좋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