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그렇고 그런 사이 (69/114)


69화 그렇고 그런 사이
2023.03.30.



 
현관 밖으로 나와 선 정혁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보며 눈살을 가늘게 좁혔다.

시원스레 쏟아지던 장맛비의 기세는 어정쩡한 오후를 기점으로 매섭게 돌변해 있었다.

축축한 기운이 느껴져 두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바짓단이 흠뻑 젖어 있었다.

2미터 가까이 뻗어 있는 부채꼴 모양의 처마도 이런 폭우에 비를 다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잔디와 연못, 조경용 바위와 대문으로 이어진 계단에도 거센 비안개가 자욱했다.

정혁은 대문과 이어진 징검돌을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상했다. 유다정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대문을 나섰을 리 없는데.

대중교통도 없는 곳이다.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지, 이 빗속에 어딜 헤매려고.

정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껏 찌푸려 뜬 눈으로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저만치에 뭔가를 발견하고 눈길을 고정했다.

먼 지점에 희끗희끗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소나무가 있는 방향이었다. S자로 몸통이 굽이친 늙은 소나무였는데, 수백 평에 달하는 정원의 나무 중 노인이 가장 아끼는 나무였다.

유다정은 우산도 없이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그리로 향하고 있었다.

정혁은 문간에 세워놓은 우산을 재빨리 펼쳐 들고 소나무를 향해 달려 나갔다.


“유다정!”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지만 거센 빗소리 탓에 다정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면으로 빗발이 들이쳤다. 우산을 쓰나 마나 금세 물 한 동이를 뒤집어쓴 양 별반 차이가 없었다.

휘이잉, 설상가상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이 홱 뒤집히기까지 한다. 정말 구질구질하고 꼴사나웠다.

욕설을 씹어 뇌까린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산을 내동댕이치고 그냥 달렸다.


“유다정!!”

손만 뻗으면 금세 닿을 거리인데, 다정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걸음걸이만큼은 참 씩씩했다.

이쯤 되자 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유다정!!”

성큼 보폭을 넓힌 정혁이 그녀의 팔꿈치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 손길에 저도 모르게 신경질이 묻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짜증이 끓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라질 퍼붓는 비 때문인지, 척척하게 감기는 옷 때문인지, 아니면 빗속을 헤매고 다니는 이 여자 때문인지.

우산도 없는 주제에 왜 궁상맞게 빗속을 쏘다니는 거냐고. 그렇게 소리라도 버럭 지를 참이었다.

그런데 정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유다정이 울고 있어서 그러질 못했다.

빗속이지만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시울과 콧잔등에만 청승맞게 흩어진 붉은 기. 잔뜩 일그러져 못생겨진 얼굴로 유다정은 울고 있었다.


“왜, 울어?”

“아…….”

“왜 우냐고.”

팔꿈치를 움켜쥔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잠시 얼이 나간 얼굴이던 다정의 눈망울이 그제야 잘게 떨렸다.


“차정혁 씨…… 있잖아요, 그게…….”

“…….”

“그게…… 나가는 문을…… 못 찾겠어요…… 흐어엉!”

울먹거리던 여자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엉엉,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한다.


“계소옥…… 거런는, 데에…… 여기, 왜케 널버어어엉…….”

다정은 최선을 다해 울었다. 이런 빗속에선 타인에게 눈물을 보일 일도, 울음소리가 들릴 리도 없으니까. 그래서 맘껏 울었다.

온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어딘가에 쏟아붓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울어야 할 핑계를 만들어야 했을 만큼 지금 순간이 절박했었다.

남편을 데려오라며 윽박지르던 남자도, 가슴을 치며 매일 같이 한숨만 쉬는 엄마도, 제 아이를 물건 취급하며 흥정을 거는 무서운 할머니도 다 미웠다.

이보다 더 서러울 수 있을까 싶게 다정은 북받친 감정을 모조리 토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혁은 머릿속이 조금 아뜩해졌다. 퍼붓는 빗방울은 따갑고 빗물에 눈앞은 흐린데, 유다정이 오열하는 모습까지 보고 있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문이 없어엉…… 왜, 없어엉……. 무운…… 대무운…….”

“문, 하…….”

그건 네가 대문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우는 이유가 진짜 문 때문은 아닌 것 같아서.

착잡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던 정혁은 반복해서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재킷을 벗어 다정의 머리 위에 쓰개치마처럼 곱게 씌웠다.

이미 다 젖어 버렸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겠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눈물이 눈물인 줄 모르고 빗물처럼 흘려버리면 억울할 것 같아서. 눈물은 온전히 눈물로만 흘리라고 그렇게 했다.

그는 젖은 얼굴을 세수하듯 크게 문지른 뒤 길잃은 아이처럼 오도카니 선 다정의 손을 잡았다.


“가.”

그리고 대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털레털레 그를 따라가며 다정은 흐느끼고 오열하고 통곡했다.

그 와중에 그가 덮어씌워 준 재킷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밖은 빗소리로 소란한데, 작은 동굴 안으로 피신한 것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그 안에서 한층 더 또렷하게 들리는 제 울음소리에 어째선지 안정감이 들고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뜨거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울고 있다는 게 실감 되었다. 이렇게 울어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응어리로 맺힌 속을 모조리 게워 내자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맞쥔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다정은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제 손을 꼭 잡고 앞서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젖은 셔츠 위로 너른 등의 맨 살결이 고스란히 비쳤다.

넓은 어깨, 커다란 등에서 미세하게 꿈틀대는 근육들. 강인하고 단단해 보였다. 어떤 창칼도 다 막아 낼 수 있을 것처럼.

왔던 길을 한참 거슬러 도착한 곳은 대문간 아래였다. 좁다랗게 내려앉은 처마가 그럭저럭 굵은 빗발은 막아 주었다.

정혁은 처마 아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다정을 밀어 넣고 요리조리 그녀를 기웃거렸다.

할 만큼 했던지 들썩거림도 잦아들고 요란한 소리도 더는 들려 오지 않았다.


“나 좀 봐.”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조심스레 재킷을 끌어당겼다. 쓰개치마처럼 쓰고 있던 묵직한 재킷이 어깨 위로 툭 흘러내렸다.

드러난 몰골이 참 볼만했다.

쉴 새 없이 훌쩍거리며 씰룩이는 코끝은 빨갛고 덩달아 빨간 눈시울은 토끼 눈이 따로 없었다.

잠시 심란하게 바라보던 그가 다정의 뺨 위로 실타래처럼 엉겨 붙은 머리칼을 떼어 주며 말했다.


“유다정. 내가 다 미안해.”

그를 올려다보는 다정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차정혁 씨가…… 왜요?”

마음과 달리 코 먹은 소리가 나왔다.


“그냥 다. 내가 나라서 미안하고, 내가 우리 할머니 손자라서 미안하고, 집이 더럽게 넓은 것도 미안하고, 대문이 반대편에 있는 것도 미안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정은 샐쭉한 얼굴이 되었다.


“차정혁 씨 할머니가 우리 시우 내놓으래요. 30억 준다고.”

“그랬어?”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그는 덤덤하게 말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마저 정리해 주었다.


“싫다고 했어요.”

“그럼 됐지, 왜 울어.”

울먹울먹하던 다정의 얼굴이 다시 못나게 일그러졌다. 생각할수록 억울해 죽겠나 보다.


“서럽잖아요! 내가 우리 시우 엄만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그래! 내 편은 아무도 업고!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하고! 씨, 진짜 속상해―!”

울컥한 다정은 또다시 오열을 쏟았다. 한번 발동이 걸린 울음보가 불쑥불쑥 저로서도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정혁은 픽, 웃고 말았다. 유다정은 확실히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어린애 보듯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의 두 팔이 다정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렇게 제게 바싹 붙이고 아장아장 뒷걸음쳐 암갈색 벽돌 벽에 등을 기대었다.

큼직한 손이 어깨뼈 부근을 부드럽게 감싸고 도닥였다.


“더 해 봐. 유다정 속상한 거.”

“차정혁 씨 할머니 너무 싫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는 말에 정혁이 킥 웃었다. 적극적인 동조는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하는 듯한 반응이라 다정도 여과 없이 속내를 까발렸다.


“아니, 엄마 아빠는 따로 있는데, 왜 자기가 친권 소송을 한대? 웃겨 정말. 돈이면 다야?”

“맞아. 유시우 엄마는 유다정인데, 웃겨. 그치?”

그가 벽에 머리를 붙이고 나른한 투로 킥킥거렸다. 그러곤 빗속 정취에 취한 듯 잠자코 처마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응시했다.

한동안 시끄러운 빗소리를 감상하고 있자니 어느새 고요가 찾아들었다.


“처정혁 씨…….”

가냘픈 부름에 정혁은 기댄 머리를 떼고 고개를 내렸다. 금방 눈물을 쏟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우리 시우 없으면 못 살아요.”

“알아.”

운 것도 아니면서 촉촉하게 젖은 그의 두 눈을 보며 다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차정혁 씨도…… 차정혁 씨 할머니 편이에요?”

“아니.”

곧장 부인하며 긴 손가락이 다정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다정은 긴장된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그럼, 내…… 편이에요?”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번에도 두루뭉술 넘기며 그의 손끝이 귓바퀴의 곡선을 따라 움직였다.

다정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제 편이라고 말해 줘도 시원찮을 판에, 애매하게 걸치는 태도가 얄미웠다.

오기가 솟구친 다정은 눈두덩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결연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시우 차시우로 안 만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했지.”

“그럼 차정혁 씨랑 나랑 같은 편 맞아요!”

“얘기가 그렇게 된다고?”

정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게 그거잖아요. 왜요? 나랑 같은 편 먹기 싫어요?”

“아니, 좋아. 나 유다정이랑 같은 편 먹을래.”

귓속말처럼 속삭인 그가 다정의 손목을 쥐어 맥박이 뛰는 곳에 쪽 입을 맞추곤 또 웃었다.

물기 머금은 피부끼리의 마찰이 기묘한 감각으로 맺히다가 흩어졌다. 확 달아오른 다정은 부끄러움에 손가락만 오므려 쥐었다.

어째 저만 심각하지, 이 남자는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뭐가 됐든 다정은 결심했다. 소도둑놈이 꼭 소도둑놈처럼 생기란 법 있나. 기왕 소도둑놈 삼을 바에야 죽이게 잘생기기까지 하면 금상첨화지.


“그럼 맹세해요!”

다정이 말하며 그에게 체중을 실어 왔다. 비장하게 올려다보는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정혁은 45도쯤 고개를 비틀어야 했다.


“어떤 거?”

“차정혁 씨 할머니한테서 우리 시우 지키겠다고!”

정혁은 픽 웃었다. 그게 뭐 어려운 맹세라고. 너무 당연한 거라 맹세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 맹세해.”

“좋아요. 그럼 우리, 지금 당장 해요!”

“어? 당장……? 갑자기?”

정혁의 눈동자가 반원 모양으로 도르르 굴렀다.

주어도 없이 던져진 말은 은근한 흥분과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안 그래도 온통 젖어 처연하다 못해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여자가 내뱉기엔 몹시 위험한 도발이었다.

그때 머리끝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 위로 똑 떨어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젖은 살결 위에 맺힌 물방울이 관능적인 굴곡을 타고 또르르 미끄러져 셔츠 속 깊은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는 장면이었는데, 어디선가 열이 지근지근 피어올랐다.


 


“왜요? 막상 하자니까 싫어요?”

다정이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뭔진 모르지만, 이건 거절하면 무조건 손해였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그럼 호텔, 아니, 급하니까 차에서……. 아니,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던 그는 어질한 머리를 털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직 훤한 대낮에 이건 너무 대담하지.


“유다정.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난 준비됐어요. 결심했다고요.”

“어?”

“지금 당장 차정혁 씨랑 연애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우리 진짜 1일이에요. 알겠죠?”

 

* * *

정면으로 펼쳐진 통창 너머로 비에 젖은 회색 도시의 절경이 퍽 볼만했다.

그 장면을 보며 정혁은 무감하게 눈을 깜빡였다. 역시나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다정도 입술만 짓씹었다.

물에 빠졌다 나온 생쥐처럼 쫄딱 젖은 남녀는 한동안 거실 한복판을 어색하게 서성거렸다. 그런 와중에 양쪽 누구도 꼭 맞쥔 손을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법 이어진 침묵 끝에 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다정이…… 먼저 씻을래?”

“먼저요? 같이…… 안 씻고요?”

다정이 부끄러운 얼굴로 이의를 제기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 정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같이…… 해야겠지?”

“그래야죠…….”

다시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정혁이 어색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래, 그럼 난 침실 쪽 욕실. 유다정은 게스트룸에 있는 거 써.”

“네!”

“게스트룸은 저쪽. 그럼 이따 봐.”

“네!”

그렇게 서로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기도 잠시 두 사람은 같이, 또 따로 씻기 위해 각자의 지정 장소를 향해 돌아섰다.

다정도 해맑게 웃으며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런데 어딘가 기름칠 덜 된 로봇처럼 관절 마디가 삐거덕거리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레지던스로 올 생각은 아니었다.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간 정애를 걱정시킬 게 뻔했고, 그 점을 우려하자 정혁이 뒷수습할 장소로 자신의 레지던스를 권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자는 계획이었다.

다정도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아 따라나서긴 했는데, 막상 한 공간에 있으려니 어색하고 어색하고 또 어색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원래도 긴장을 다 놓을 만큼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보니 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긴장으로 몸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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