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 세상 전부를 다 준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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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이 세상 전부를 다 준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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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이 세상 전부를 다 준대도
2023.03.26.
테라스와 이어진 창의 안팎으로 대형 화분들이 빼곡했다. 침엽수 활엽수 할 것 없이 초록의 잎사귀들이 싱그러운 빛을 띠었다.
축구장처럼 드넓은 정원도 연못이며 갖은 수목으로 채워져 있더니, 집 안까지 화분으로 꾸며 놓은 걸 보면 식물 사랑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카우치의 고전적인 무늬를 머쓱하게 바라보던 다정은 쭈글쭈글한 셔츠의 소매를 바짝 당겨 내렸다.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 앉아 있으려니 집 앞 편의점에 가는 듯한 차림새가 왠지 초라해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호로록, 찻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긴장을 고조시켰다. 백발 성성한 노인은 다정과 처음 대면한 뒤 이렇게 한동안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다.
인사도 생략하고 박 회장이 처음 던진 질문은 이랬다.
“내가 누군지 아나?”
곧고도 인자한 눈길과 격식을 갖춘 말투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약간 비현실적이란 생각을 하며 다정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알지. 당연히 안다. 명한그룹 총수 박종순 회장. 자라오며 뉴스에서 수도 없이 봐 온 얼굴을 모를 리가 없다.
명한그룹의 전신인 명한상사의 창립자 고 차명한 회장의 며느리. 197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이끈 주역이자 산증인.
그리고 차정혁이란 남자를 손자로 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시우에게도 증조모가 되는 인물이었다.
다정은 긴장으로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눈앞의 노인이 뿜어내는 중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온화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왜인지 등줄기가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이 집의 문지방을 넘을 때부터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설마 이 양반이 명한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정에게 공적 용무가 있을 리 만무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용무로 불렀을 테다.
그러나 속단하지 않으려 애쓰며 다정은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뉴스에서 많이 뵀습니다.”
“그래, 그렇구만. 어쨌거나 초면이지만 내겐 손녀뻘이니 말 편히 하겠네. 괜찮나?”
양해를 구하는 말에 다정은 네, 하고 짧게 승낙했다. 그러자 너그러운 미소로 화답한 박 회장이 오늘 만난 용건의 운을 넌지시 떼었다.
“아이가 예쁘더구나.”
다정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벌써 시우에게 접근했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제 아이를…… 만나셨나요?”
불안과 경계가 뒤섞인 말투에 박 회장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잠깐. 아주 얼핏. 그 정도가 다야.”
“절 여기까지 부르신 용건이 뭔가요?”
침착하려 하지만 본의 아니게 공격적인 말투가 튀어 나갔다. 그게 뭐든 시우가 관련되면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었다.
예민한 반응에 박 회장이 눈썹을 까딱 들추었다.
“이런.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늙은이가 주책맞게 시간을 오래 끌었구만.”
하하, 하고 너그럽게 웃어 보인 그녀가 태연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또 여유롭게 음미한다.
달그락. 찻잔이 내려졌다. 용건이 이어질 차례라고 생각했건만 박 회장은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차를 마시고 또 음미하길 반복했다. 그러니까 지금 면전에 두고 다정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늙은이가 주책맞게 시간을 끈들 네까짓 게 뭐 어쩔 건데?
마치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렇게 긴장을 조성해서 박 회장이 얻으려는 게 단순히 다정의 손바닥을 흠뻑 젖게 하는 거라면 그녀의 작전은 성공했다.
하지만 자신의 엄청난 카리스마에 다정이 콱 짜부라져 버리길 바랐다면, 글쎄.
이쯤 되니 다정도 박 회장의 뚜렷한 목적이 뭔지 대략 파악이 되었다.
처음 이곳으로 향하며 다정이 예상한 전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내 손자에게서 떨어져 나가라며 돈 봉투를 던져 준다. 그럼 돈 봉투를 정중히 사양하고 댁의 손자와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밝힐 생각이었다.
두 번째. 제발 내 손자와 결혼해 달라고 사정사정한다. 역시나 유감의 뜻을 표명하며 정중히 거절했을 거다.
위의 두 가지 경우는 그저 바람일 뿐, 어쩌면 다정도 처음부터 시우가 진짜 목적일 거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찻물이 반쯤 남았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아이 내게 다오.”
기습적이긴 한데, 이 역시 전혀 기발하지 않아 놀라웠다. 어쩜 전개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소름이 일 지경이었다.
“30억이면 되겠니? 아이를 잘 키운 게 기특해서 주는 상이니까 사양하지 않아도 돼.”
너그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스며든 교만함은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30억. 다정의 눈동자가 반원을 그리며 도르르 굴렀다.
말로만 들었지, 30억이란 돈을 현물로 쳤을 때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제법 거액을 제시했음에도 다정이 반기는 눈치가 아니자 박 회장이 선수 치듯 한 마딜 보탰다.
“부족하면 더 말하거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마.”
“뭐든 다요?”
다정이 혹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정이 제법 순조로울 듯해 박 회장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물렸다.
“그래. 뭐든 말해 보려무나. 얼마를 더 얹어 주랴.”
얼마든지, 라며 흔쾌히 던지는 대답에 다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세상 전부를 다 주세요.”
“…….”
박 회장의 눈이 끔뻑 감겼다가 떠지는 사이 당찬 목소리가 또박또박 이어졌다.
“우리 시우 제 전부거든요. 제 전부와 맞바꾸는 건데, 이 세상 전부를 다 줘도 사실 부족하죠. 그런데 회장님께서 아무리 돈이 많으셔도 그것까지는 좀 무리 아니세요?”
“……뭐라?”
박 회장의 주름진 입술이 벙긋 열렸다가 느리게 다물렸다.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만 박 회장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정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참하고 순진한 외양과 달리 퍽 다부지고 당돌한 데가 있었다. 손자 놈 취향이 이쪽일 줄은 몰랐는데 의외였다.
어쨌거나 제 생모 같은 걸 눈여겨보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더니, 아이의 배움이나 됨됨이가 그 물건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좋다. 백번 양보해 온전히 기껍다고 할 순 없으나 천성이 올곧은 아이인 건 분명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차씨 집안 독자를 낳은 것 또한 고마울 일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 애가 손자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나. 편모슬하에 배경은 한미하기 짝이 없고 제가 가진 대학 졸업장을 빼면 봐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 누구보다 듬직한 손자지만, 어쨌거나 박 회장에겐 물가에 내놓은 애 아닌가.
적들이 사방에 깔렸다. 음험한 이빨을 감춘 채 박 회장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손자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밀어 치는 풍파에 방패막이가 되어 줄 부모 형제 하나 없으니 어쩐다. 하니 어려움에 처하면 발 벗고 나서 줄 처가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박 회장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을 등지기 전 손자를 지킬 방비를 철저히 세워 둬야만 했다.
“보기랑 달리 미련한 구석이 있구나.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인데.”
“네. 아이 팔아서 호의호식해야 한다면 전 이대로 쭉 미련하게 살려고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당돌함에 박 회장은 싱겁게 웃었다.
아량으로 베푼 제안에 뜻이 없음을 이렇게 비꼬아 내비치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밖에.
“제법 꿈틀하는구나.”
박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울렸다. 지렁이 취급을 당하고 있었지만, 다정은 박 회장을 한번 보고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회장님. 우리 시우 물건 아닙니다. 얼마를 주셔도 바꿀 마음 없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무례한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알겠습니다.”
“이 고얀!!”
탕! 노인의 가는 손마디가 소파의 팔걸이를 매섭게 내리치지만, 다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공사 현장에서 이런 거 많이 봤다. 그간 아버지나 삼촌뻘 되는 중년 남자들을 상대로 바득바득 죄다 이겨 먹은 내공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네까짓 게 감히 내 집 씨를 빼돌려 놓고 이리 뻔뻔하게 나와? 좋은 말로 할 때 굽혔어야지! 날 상대로 얼마나 꿈틀댈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휙 눈길을 비튼 박 회장이 노성을 질렀다.
“윤 비서! 최 변호사한테 당장 친권 소송 준비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다정을 이곳까지 데리고 왔던 중년의 여자가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이없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다정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그 할머니에 그 손자 아니랄까 봐 정혁이 왜 입만 열면 소송, 소송,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사실 그 말이 딱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센 척까지 해 가며 눈앞의 할머니를 상대하려니 머리가 다 어질했다.
무언가 순응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힘, 예컨대 자연재해 같은 것과 맞서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상하지. 내부에서부터 알 수 없는 저항감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자연재해고 뭐고 제 아들을 두고 일방적으로 흥정을 걸어오는 이 상황이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다. 혹은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겁먹고 있다는 걸 벌써 들켜 버렸는지도 모른다. 원래 작고 겁이 많은 강아지일수록 더 시끄럽게 짖는 법이니까.
들끓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하며 다정은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차분하게 일어나 안녕히 계세요, 라고 인사한 뒤 돌아서자. 그럼 되는 거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일어나려는데 어디선가 퉁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현관 쪽이었다. 무언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현관문이 무겁게 쾅 닫히는 소리. 이어서 중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는 소리. 그리고 슬리퍼가 다급히 끌리는 소리.
그 끝에 등장한 남자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티가 여실했다.
정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무던히 애를 쓰며 다정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등장했기 때문인지, 공기가 확 뒤바뀐 듯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정혁의 눈길이 이번엔 박 회장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손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정혁은 천연덕스러운 투로 물었다.
“할머니, 지금 뭐 해?”
묻기는 박 회장에게 묻는데, 눈길은 다정의 옆얼굴에 빤히 들러붙은 채였다.
“묻잖아. 이 여자가 왜 여깄어?”
재차 묻지만 공간엔 침묵만 내깔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자 정혁이 질문의 대상을 바꾼다.
“유다정, 넌 왜 여깄어?”
“차정혁 씨, 난…….”
“어릴 때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안 배웠어?”
타박을 던지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다급히 들이닥친 민 실장이 귓가에 은밀한 보고를 전달했다.
‘회장님이 움직이셨답니다,’하고.
이미 조손 간에 선전포고를 주고받았기에 박 회장과 다정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둔 지 오래였다. 그건 박 회장도 마찬가지라 손자가 알아채기 전에 후다닥 일을 해치우고 싶었을 테다. 아쉽게도 실패했지만.
쏴아아.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이 테라스 창을 거세게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그만 가 보거라.”
상황을 그만 정리할 모양인지 박 회장이 다정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정은 박 회장에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아무 말도 없이 멀어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좇던 정혁의 눈길이 박 회장에게로 이어졌다. 무감한 두 눈에 실망이 들어찼다.
“할머니. 무슨 말 했어?”
목소리는 제법 침착하게 나갔다.
“아이 내놓으라고 했다.”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나도 가만히 있는데 할머니가 왜?”
박 회장의 눈매가 일그러져 날아들었다.
“네 녀석이 갖고 싶다지 않았어?”
하, 하고 헛숨을 뱉은 정혁은 갑갑하게 조르는 타이를 조금 끌어 내렸다.
“……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네 살짜리 애로 보이나 봐. 내 아들이 벌써 다섯 살인데 코찔찔이 취급이나 하고. 그럼 나 진짜 속상해.”
애교스러운 말투에 박 회장의 목소리도 한풀 누그러졌다.
“정혁아. 할미가 네 자식 데려오려는 것 아니냐.”
“그래, 할머니 자식 아니고 내 자식이잖아. 내가 알아서 해.”
“정혁아.”
“저 여자 또 불러. 손자새끼 눈 도는 거 보고 싶으면.”
협박하는 투가 지나치게 조곤조곤해서 오히려 소름이 일 정도였다.
“이 녀석이!”
“할머니. 나 할머니 미워할 수 있어. 진짜야.”
손자의 협박에 박 회장은 입을 벙긋하다 말고 끙, 신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