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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소도둑놈처럼 생겼어도 (67/114)


67화 소도둑놈처럼 생겼어도
2023.03.23.


다정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격정적인 분노가 치솟는 동시에 몹시 복잡하고 심란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할 게 없다 자부했기에,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누군가 미혼모라 손가락질할 때조차 주눅이 들었던 적이 없는데.


“아! 부르라니까! 아줌마 남편 없어?!”

입술만 짓씹으며 선뜻 반격하지 못하자 남자가 기세등등 소리쳤다.

차마 몰상식해서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부를 남편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초라하고 서럽게 느껴질 일인가.

그래, 나 남편 없다. 그래서 뭐!

왜 당당히 입을 떼고 목구멍까지 치받은 그 말을 내뱉지 못하는 걸까.

당당하긴커녕 성격장애 있는 여자로 비치기 딱 좋겠지. 사람들은 그걸 남편 없는 여자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쯤으로 취급해 버릴 테고.

그렇다고 없는 남편을 있는 것처럼 꾸며 거짓말을 하자니 그건 다정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분해서 주먹만 그러쥐던 그때, 세상 점잖게 자리를 지키던 정애가 불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나, 이거나 처먹어라 옘병!”

걸쭉한 욕설이 공간을 가르기 무섭게 정애가 냉면 그릇을 움켜쥐더니 남자를 향해 냅다 끼얹었다.

기습 공격에 놀란 남자가 어푸거리며 양팔을 허우적거리지만, 이미 육수와 불어 터진 면은 남자의 얼굴을 타고 가슴팍을 흠뻑 적신 후였다.

냉면 육수에 잘 절인 제 아들의 운동화 한 짝도 콧잔등을 퍽 때리고 굴러떨어졌다.


“에이, 씨! 할머니 뭐 하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하던 남자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버럭 고함질을 쳐 댔다.

정애도 지지 않는다. 심드렁하게 쏘아보던 정애는 20년 동안 애용하고 다니는 손가방의 지퍼를 박력 있게 찍 열어젖혔다. 그러곤 꼬깃꼬깃한 5천 원권 지폐를 꺼내 남자의 얼굴로 팩 내던졌다.


“세탁비 주면 되는 거 아녀?! 뭐 대수라고 사내놈이 지집 마냥 시끄럽게 짱알거리고 그랴! 짱알거리긴!”

“뭐요? 짱알? 하…….”

자존심이 상했는지 허리에 손을 얹은 남자가 기막힌 얼굴로 혀를 찼다.


“어머! 우리 자기 어떡해엥! 자기 괜찮아?”

호들갑을 떨어 대던 남자의 아내가 정애를 향해 갈고리 눈을 휙 치떴다.


“할머니! 우리 남편 다 젖었잖아요. 이거 어떡할 거예요?!”

“느덜은 어떡할 겨? 느덜이 한 짓거리는 눈깔이 없어서 안 뵈는 겨? 언내를 뱄으면 맘보를 곱게 써야지, 이 써글 것들아!!”

정애가 삿대질을 하며 아이 엄마를 몰아세웠다. 아내가 수세에 몰리자 이번엔 그녀의 남편이 지원에 나선다.


“노인네가 미쳤나!!”

남자가 성을 내며 바투 다가섰다. 깔아뭉개듯 부라리는 눈. 움찔거리는 손등의 힘줄. 슬금슬금 다가서며 겁을 주는 행위들.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지만, 정애는 아랑곳없다. 외려 만류하는 딸을 밀쳐 내며 옳다구나 고개를 쳐들고 대거리를 해 댔다.


“그려, 미쳤다! 워쩔 겨? 칠 겨? 그려 쳐 봐! 이 애미 애비도 없는 후레자석 넘아!”

“아아씨! 이 노친네가 증말!!”

그쯤 되자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과 혀 차는 소리가 난무했다. 그제야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했는지 남자가 슬쩍 한 걸음 물러난다.


 

* * *

아이 엄마와 남자는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가 식당을 휘젓고 다닐 때부터 지켜보던 사람들의 훈계와 냉면집 사장의 권유가 있었음에도 남자는 적반하장 식으로 큰소리를 쳐 댔다.

그에 또다시 뭇매가 날아들자 영 불리하다 판단되었던지, 그는 못 먹게 된 음식값만 서둘러 배상하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달아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결국 모처럼의 외식을 망치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 모녀 사이엔 싸한 적막만 감돌았다.

괜스레 눈치가 보인 다정은 운전하는 내내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정애는 차창 밖만 노려보며 불편한 심기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평상시에 과묵한 양반이 한번 나사가 돌면 아주 딴사람이 되는 통에 머리가 어질했다.

예전에야 그런 모습을 종종 봤다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한풀 꺾인 줄 알았지.

여하튼 방심하고 있다가 오늘은 다정도 적잖이 놀란 터였다.


“엄마…… 괜찮아요?”

“…….”

걱정스러워 묻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어휴, 하고 한스럽게 내뱉는 정애의 한숨 소리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정은 옷장부터 뒤져 정애가 입을 만한 옷을 꺼내 왔다.


“엄마, 축축하지. 얼른 씻고 갈아입어요.”

갈아입을 옷을 욕실에 넣어두고 돌아서려는데, 정애가 불길한 어조로 딸을 붙잡아 세웠다.


“너 일루다가 와서 앉아 봐.”

“…….”

목덜미를 슥 문지르며 경계하던 다정은 쭈뼛쭈뼛 소파로 가 앉았다. 예상대로 정애의 잔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아. 정말 결혼 안 하고 이라고 살 겨?”

“갑자기 그 얘긴 왜 또…….”

“여자는 자고로 남자 그늘에 있어야 어디 가서 무시를 안 당하는 겨. 아까 봤잖여. 소도둑놈처럼 생겼어도 서방이라고 역성을 들어 주니께, 여편네가 찧고 까부는 겨. 알아들어?”

“엄마도 참. 요즘 세상에 무슨…….”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정도 정애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남편 부르라며 삿대질을 당하는 딸을 본 순간 그 속이 어땠을까.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했을 거다.


“언내는 그렇다 쳐. 요즘 언내 둘 셋 데리고도 팔자 고치는 경우가 허다헌디, 평생 언내 하나 보고 이라고 혼자 살 거냔 말여.”

속이 터지는지 정애가 가슴을 퍽 때렸다.


“짝을 지어야지, 짝을! 안에선 지지고 볶아도 뭔 일 생기면 내 편 들어 주는 건 내 짝밖에 없는 겨!”

말을 말자 해 놓고 한번 시작하자 응어리진 속내가 다시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예전엔 그랬다. 누군진 몰라도 내 딸 데려가는 놈은 참 운도 좋은 놈이라고.

내 딸만큼 야무진 색싯감이 없으니 그에 걸맞은 능력 있고 잘난 사윗감을 데리고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그도 손자가 태어난 후론 다 물 건너갔다 싶었다. 세상 잘난 놈들이 눈이 삐었다고 애 딸린 처녀를 눈에 담을까.

지난 세월 품은 기대는 다 부질없다. 이젠 뉘 집 시러베아들 놈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마저 죽으면 어쩌나. 세상에 남는 거라곤 이거 하난데, 어떻게든 짝을 지어 놓아야 마음 편히 눈을 감지.

곰보도 좋고 째보도 좋다. 그저 내 딸 곁에 병풍처럼 듬직하게 붙어 아끼고 보듬어 줄 착실한 놈 하나만 나타난다면 정애는 지금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탄식하는 정애를 보며 다정은 그저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었다.

* * *

살짝 밀어 연 문틈으로 머리띠를 하고 돌아누운 정애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 시우 데리고 올게요. 쉬고 계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넌지시 흘려 넣지만, 잠들었을 리 없는 정애는 대꾸조차 없었다.

숨을 죽인 채 방문을 닫고 돌아선 다정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금살금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현관을 나선 뒤에야 후, 하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가만히 문 앞에 선 다정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인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한바탕 울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막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잠시 숨을 고르자 울컥한 마음도 금세 진정이 되었다. 가까스로 기분을 추스르고 털레털레 발길을 옮기는데 불현듯 우스운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소도둑놈처럼 생긴 서방……?

냉면집에서 봤던 남자 얼굴이 소도둑놈 관상인가? 소도둑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다정은 설핏 쓴웃음만 지어 물었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아파트 건물을 나서는데, 때마침 툭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오후부터 비…….”

오전에 봤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다정은 낭패 어린 얼굴로 잠시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차 트렁크에 여분의 우산이 있던가?

확신이 없지만, 정애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으므로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깟 비 좀 맞으면 어때서.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주차된 차로 향했다. 땅에서부터 일어난 흙먼지의 냄새가 진하게 밀려들었다.

빗방울에 점점이 물들어 마른 땅의 색이 진해질수록 다정의 발걸음도 조급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정의 발이 주춤 멈춰 선다. 발끝을 가지런히 모은 여자의 구둣발이 시야에 잡힌 까닭이었다.

고개를 들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가 받쳐 든 우산 밑으로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용모 단정한 여자도 보였다. 가지런히 모은 발끝의 주인이었다.

다정을 지그시 바라보던 여자가 제법 공손한 말씨로 물었다.


“유다정 씨 되십니까?”

“그런……데요?”

다정이 긍정하기 무섭게 또 다른 검은 정장의 남자가 다정의 등 뒤로 불쑥 다가섰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랗고 검은 우산을 절도 있게 받쳐 들었다.

갑작스러워 놀라긴 했지만 퍽 예우를 갖춘 모습들이었다.

툭, 투둑.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의 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누구시죠?”

다정이 영문을 몰라 묻자 중년의 여자가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일으키며 말했다.


“함께 가시죠. 유다정 씨를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곁으로 한 걸음 비켜서며 고급 세단의 문을 정중히 열어 보였다.


 

* * *



“OTT 분야는 이미 성공한 사업으로 각광받고 있어요. 물론 시장을 선점한 몇몇에 한정된 얘기지만,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계속되리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 자본력에 밀려난 떨거지들조차 몸값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요. 인수 비용으로 무작정 돈을 쏟아붓기엔 거품이 너무 많아요.”

팀원 중 한 명이 터무니없는 인수 비용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다른 팀원이 반박하고 나섰다.


“그럼 새로운 OTT 법인을 설립하자는 말인가요? 이제 와서요?”

“불가능한 건 아니죠? 같은 비용이 들어갈 거라면 거액을 들여 망해 나자빠진 회사를 사들일 게 아니라 토종 브랜드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더 이로울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한류의 인기는 여전하잖아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정혁은 두 사람의 토론을 따분한 얼굴로 경청했다.

어째 이번 TF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성인지, 열정이 넘치는 건 좋으나 자기주장도 강해 저들끼리 충돌이 잦았다.

저런 성향들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인데, 이래서야 계획하던 일을 제때 추진할 수나 있을지 신경이 쓰였다.

은밀하게 추진하는 사업은 대내외적으로 「면세점 해외 진출 건」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한 자본을 끌어다 붙였다. 게다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분야라 엄청난 리스크도 도사리고 있었다.

판단하기로 이번 일의 사활을 가르는 건 시간이었다. 그 점을 고려하면 새로 법인을 설립하자는 주장은 가당치도 않았다.


“법인을 설립해서 플랫폼이 자리를 잡고 현재 1등 기업의 50%까지 인지도를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광고비와 시간적 비용에 대한 예상 견적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네 헛소릴 더 들어 줘야 할 근거를 제시하란 돌려 까기로 정혁이 퇴짜를 놓자 해당 팀원의 입이 꾹 다물린다.


“다들 비싼 밥 먹고 깜빡깜빡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추진하려는 사업이 OTT 서비스가 아니잖아요?”

정신 안 차릴래?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독설도 잊지 않는다.

열띤 토론이 재개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기술 관련 특허와 시스템 구축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 무렵 정혁은 회의에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썹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손끝은 초조했고, 회의 자료와 휴대폰을 오가는 눈길은 어딘지 안달이 난 채였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휴대폰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정혁의 신경을 몹시 날카롭게 만들었다.

보고 싶다고 했다. 보고 싶다고 했는데, 유다정은 왜 아직도 답장이 없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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