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남편 불러!
(6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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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남편 불러!
2023.03.19.
“일시불로 계산해 주세요.”
만족스러워하던 수경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골든 크레디트 카드를 끼워 점원에게 내밀었다. 그 장면에 도준이 황망한 얼굴로 그녀를 만류했다.
“이수경 씨.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지금 있는 매장은, 전 세계 젊은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품 정장 브랜드숍이었다.
제아무리 수경이 한강 병원 이사장의 딸이고 돈 걱정 없는 부유한 환경에 있대도 이건 너무 몰염치했다.
그녀가 소지한 카드만 보더라도 그랬다. 놀고먹는 백수 아가씨가 대기업 임원급이나 되어야 받을 수 있다는 VIP 전용 카드를 무슨 수로 발급받을까.
분명 부모님께 용돈 대용으로 받은 카드일 텐데, 그 부모님의 돈으로 이런 고가의 선물을 받는다? 도준의 도덕성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선물인데 권도준 씨가 계산하겠다고요?”
“마음은 받고, 계산만 제가 하겠다는 겁니다.”
수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힐끔 점원의 눈치를 살피던 도준이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수경 씨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옷값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무리 부모님 지원이 있다지만 아직 학생 신분에 이건 너무 지나쳐요.”
“학생요? 제가요?”
수경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양 동그래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도준은 아차 싶었다. 그동안 수경이 무슨 일을 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강 병원 딸이란 인식이 너무 강한 탓일까. 부유한 집 딸이니 당연히 늦게까지 면학 중인 학생일 거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간 교류를 통해 느낀바, 직업이 있다기에 그녀는 놀고먹는 게 일상이고 놀랍도록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무언가로 바빠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는 절대 없었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위한 선 시장에 나왔다는 점 역시 그랬다.
수경이 풉, 하고 찌푸려 웃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공부를 해요? 지금까지 한 것도 지긋지긋한데.”
“미안합니다. 수경 씨가 시간 여유가 자유로워서 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난감한 듯 하관을 감싸고 문지르던 도준은 즉각 사과했다.
“학생은 아니지만, 놀고먹는 백수는 맞아요. 근데 걱정 말아요. 권도준 씨한테 선물하는 돈은 떳떳하게 제가 번 돈이니까요.”
점원이 내민 계산서에 사인하며 그녀가 방긋 웃는다. 그쯤 되자 도준도 더는 그녀의 선물을 거절할 구실이 궁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제가 수경 씨한테 이런 걸 받으면 안 되는데…….”
“그럼 저녁 사 주세요. 이 옷값만큼 아주 비싸고 근사한 데서요.”
부담을 덜어 주려는 배려가 귀여웠다. 그제야 도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럽시다. 지금 갈까요? 어디 생각해 둔 데 있습니까?”
“아뇨, 아쉽지만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저녁은 같이 못 할 것 같아요.”
수경이 아쉽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웃는다.
완전 결이 다른 모습인데도 그늘 없이 해맑은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였다.
수경의 얼굴 위로 잠시 잠깐 다정을 떠올려 본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럽시다. 다음번에 꼭 가죠. 아주 비싸고 근사한 데로.”
* * *
승훈은 고요한 복도를 서성거렸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자 냉큼 보안 게이트에 찰싹 달라붙었다.
반투명한 유리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지만, 게이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염탐하기란 녹록하지 않다.
17층 콘퍼런스 룸. 약 1개월 전 차 전무의 지시로 해당 층에 있던 일곱 개 회의실 전체에 개별 보안장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보통은 사내 임원 미팅이나 대규모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특수 보안시설이 갖추어지며 출입증이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귀동냥을 한 결과 해외 면세점 진출 건 때문이라는데, 이제 막바지 단계에 있는 면세점 건으로 새로이 TF를 꾸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렇게 철두철미한 보안까지 갖추며 비밀리에 추진할 일이 대체 뭔데?
차 전무가 뭔가 일을 꾸미는 게 분명한데, 속 보이게 대놓고 기웃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승훈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리저리 목을 빼고 유리 너머를 투시하기 위해 애쓰던 그때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이 사정없이 몸을 떨었다.
놀란 숨을 삼킨 승훈은 재빨리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곧장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를 다그쳤다.
『어디야!』
어휴, 눈치 없는 계집애. 탄식한 승훈은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췄다.
“야, 오현아. 왜 아침부터 전화야? 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하라고 했잖아.”
『문자 해도 답이 없으니까 그렇지! 어떻게 됐어? 좀 알아봤어?』
“당연하지. 오빠한테 그런 것쯤 껌이라니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넌 날 너무 띄엄띄엄 보더라.”
『시끄럽고. 알아낸 거 있으면 당장 보내.』
“얘 봐라. 내가 이거 알아낸다고 얼마나 뺑이 쳤는데, 그걸 맨입으로 받아먹으려고 해?”
현아가 짜증스레 긴 한숨을 뱉었다.
『하, 알았어. 그럼 내일 오후에 조용한 데서 봐.』
“오케이! 조―아쓰!”
승훈이 신난 톤으로 쾌재를 부른다. 덕분에 등 뒤로 다가서는 묵직한 기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가 되게 좋은가 봐?”
난데없이 들려온 음성에 화들짝 놀란 승훈은 귀에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냉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당황한 승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 차차, 차 전무……? 여긴 무슨 일로?”
그의 질문에 정혁의 눈길이 게이트로 향했다. 굵고 선명한 폰트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안내 문구가 써 붙어 있었다.
“난 여기 관계잔데. 지 상무도 관계자야?”
“아, 아니, 난…… 난 그냥 못 보던 데가 있어서 뭔가 했지. 그, 그럼 수고해!”
대놓고 수상한 승훈을 탐탁잖게 바라보던 정혁은 짧은 진동을 느끼고 휴대폰을 쥐어 올렸다.
화면 위로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고, 정혁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 * *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얼룩진 유리창 너머를 활강하듯 가로지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은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정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변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집을 나설 때보다 하늘이 한층 더 꾸물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침 뉴스에서 보았던 일기예보에서는 가을장마의 영향권에 들어 오후부터 서울 경기 전역에 상당량의 비가 쏟아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정애는 어젯밤부터 여기저기 신경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료가 있는 날이라 곧장 한의원을 찾아 정애를 일찌감치 치료실로 밀어 넣은 터였다.
평일 오전. 침을 잘 놓는 걸로 유명한 한의원 대기실은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로 만석이었다.
한약재와 뜸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기다림은 지루했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던 다정은 몇 번이고 열었다 닫은 휴대폰을 다시 열어 결국 메시지를 입력했다.
「뭐 하고 있어요?」
망설이던 손끝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은 차정혁이었다.
다른 뜻은 없다. 그저 며칠 연락이 없는 게 조금 신경 쓰였을 뿐.
징징.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다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띄웠다.
「네 생각.」
단순하고 짧은 문구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다정은 괜스레 화끈거리는 뺨을 슬쩍 문지르고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뭐예요? 유치하게.」
징징.
「나도 보고 싶어.」
“…….”
하여간 못 말린다. 괜히 웃음이 나려 해서 다정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뭐라고 답장을 할까 고민할 때 정애가 치료실을 걸어 나왔다. 다정은 냉큼 휴대폰을 닫고 일어났다.
* * *
“엄마 점심 먹고 들어가요. 말만 해. 뭐 잡숫고 싶어?”
다정의 제안에 정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뜻 메뉴를 결정하지는 못했다. 평소 외식이 흔치 않으니 먹고 싶은 걸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눈치였다.
“시원하게 냉면 어때? 엄마 냉면 좋아하시잖아.”
“그려, 그걸루 혀.”
이번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애를 보며 다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애가 정말 냉면을 좋아했던가. 사실 아리송했다. 엄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파악할 만큼 다양한 음식을 함께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같이 외식을 했던 기억 속 메뉴는 단순했다. 보통은 자장면, 무더운 여름엔 냉면. 대충 그랬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름이면 누구나 한 그릇 먹는 게 냉면 아닌가. 그런데 시우가 태어난 후로는 엄마를 모시고 냉면 한 그릇 먹으러 온 적이 없다는 사실에 불쑥 미안한 마음만 커졌다.
유명 체인 냉면집은 점심시간을 맞아 손님들로 빼곡했다. 그래도 일찍 먹고 일어나는 직장인들 덕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금세 빈자리가 났다.
각자 물냉면과 회냉면을 선택했고 갈비찜도 작은 사이즈로 주문했다.
“엄마 많이 드셔.”
다정이 면을 잘라 내밀며 말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를 맛본 정애는 먹을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천천히 식사를 하던 정애의 눈길이 문득 옆 테이블을 향해 돌았다. 서너 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이는 몹시 산만했다. 괴성을 지르는 걸로도 모자라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는가 하면 의자 다리를 걷어차고 허공에 발길질까지 해 대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지만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릴 만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에게 아이를 통제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거다.
가끔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라 다정은 개의치 않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때였다. 정애의 냉면 그릇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휙 날아들었다. 철퍽 소리를 내며 냉면 육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다정은 냉면 그릇에 빠진 물체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의 운동화 한 짝이었다.
너무 놀라 옆 테이블로 휙 몸을 틀었다. 그제야 눈이 마주친 아이 엄마가 슬그머니 일어나는데 배가 적당히 부른 임산부였다.
모녀의 테이블로 다가온 여자가 정애의 냉면 그릇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다짜고짜 제 아이를 향해 짜증부터 냈다.
“아이, 어떡해. 다 젖었네. 종우야! 너 집에 갈 때 뭐 신고 가려고 이랬어!”
“…….”
다정은 헛숨을 뱉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왔다. 곱지 않은 눈초리에 여자가 억지로 웃으며 겨우 한마딜 던진다.
“냉면 새로 한 그릇 시키세요. 계산은 우리가 할게요.”
새침한 태도로 돌아서는 여자의 모습에 다정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것 봐요! 애기 엄마. 멀쩡히 식사 중인 사람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지금 그게 할 소리예요? 우리 엄마 옷에 다 튄 거 안 보여요? 이럴 땐 사과가 먼저죠!”
여자는 적반하장이었다.
“아니, 애가 그럴 수도 있지, 어른이 돼서 왜 그렇게 이해심이 없어요?”
“이해심요? 애 핑계 대지 말아요. 나도 애 키우는 엄마지만, 아이 교육을 운운하기 전에 이건 그쪽이 지켜야 할 경우를 지적하는 거예요!”
“어우, 이봐요. 좀 살살 말할 수 없어요? 나 임신한 거 안 보여요? 어우, 배야.”
여자가 듣기 싫은 티를 내며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여자의 남편이 스윽 일어나 다가왔다.
“종우 엄마. 왜 그래?”
옆에서 다 들어 놓고 왜 그러냔다. 부부의 행태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어우, 자기야. 애기 놀랐나 봐. 아오, 배 땡겨.”
여자가 칭얼칭얼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중키에 어깨만 떡 벌어진 남자가 위압적인 눈빛을 쏘아댔다.
“아줌마. 애가 놀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임신한 여자한테 소리를 지르면 되겠어요? 빨리 우리 와이프한테 사과하세요.”
“허! 이봐요, 아저씨. 사과는 그쪽이 먼저 해야죠. 우리 엄마 겨우 한술 뜨시던 건데 식사는커녕 옷 버린 거 안 보여요?”
“나 참, 그깟 세탁비 주면 되잖아. 뭐 대수라고 여자가 시끄럽게 찡얼거려?”
다정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찡얼? 찡얼거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여자가 찡얼거려? 라고 했어요?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무례한 행동을 따져 묻자 남자가 건달처럼 거들먹거렸다.
“아니꼬우면 아줌마도 남편 불러! 남편 부르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