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삐뚤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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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삐뚤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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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삐뚤어질 거야!
2023.03.16.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던 카페는 점심때를 조금 앞둔 시각이 되어서야 겨우 한산한 모습을 되돌렸다.
출근길 밀려든 손님을 한바탕 치르고 난 솔이도 약간 녹초가 된 얼굴이 되어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고개를 잘잘 젓는다.
시우를 등원시켰으면 집에나 갈 것이지, 쟨 아침부터 남의 카페에 앉아 사연 있는 여자처럼 왜 저러고 있나 모르겠다. 보는 사람 싱숭생숭하게.
물이 담긴 작은 유리병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그 위로 핀 자줏빛 코스모스 한 송이를 멍한 눈길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정은 울적한 기분을 달랠 길이 없었다. 밉상 3인방의 뜬금없는 사과로 알게 된 그날의 사건 때문이었다.
시우가 아빠 없는 아이라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한 여운이 되어 가슴 속 웅덩이 안으로 싸하게 고여 들었다.
아이가 자라며 그런 놀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막막했다.
어쨌든 시우가 받았을 상처가 염려되어 다정은 그 일에 대해 시우에게 상세히 물어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묻자 시우는 뒤늦게야 아차 싶었나 보다. 이미 예림이의 사과를 쿨하게 받아 준 뒤라 더는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여하튼 더는 감출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지 시우는 순순히 모든 걸 자백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빠가 없다는 놀림에 아이가 큰 상처를 받았으면 어쩌나 했더니 웬걸. 시우는 그때 느꼈을 걸로 예상되는 감정들을 거의 잊은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주제는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흘렀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 어떻게 참았나 싶을 만큼 조잘조잘 흥분된 투로 떠들어 대는 이야기는 ‘호랑이 아저씨’와 ‘멋진 아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호랑이 아저씨가 그러는데, 어…… 아빠는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대요. 어…… 또, 키도 크고 대빵 잘생겨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엄청 많았댔어요. 그래서 시우가 크면 아빠보다 더 멋있어질 거래요!’
애 앞에서 어지간히도 제 자랑을 늘어놓은 모양이다. 물론 그 남자가 겸손의 미덕을 알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시우가 상처받지 않도록 어린 마음을 잘 어루만져 준 모양이라 안심이 되었다. 그런 한편 마음 한구석이 너무 불편했다.
“시우도 시우지만, 시우 아버님도 속상했겠다. 그 상황에 자기가 아빠라고 나서지도 못하고.”
다정이 차마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귀신같이 읽고 솔이가 대신했다.
‘나 유시우한테 아빠라고 말하고 싶어.’
다정은 그제야 그날 정혁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시우가 상처받는 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아플 일도 없었을까.
시우는 아빠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겼으니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우에겐 아빠가 있었고, 차정혁이 시우의 아빠였다.
사실 뭐가 옳은 선택인지 판단은 쉽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오직 자신의 아이로만 길러진 시우였다. 애초에 없던 걸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문득 아픈 시우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우가 아파 애를 졸일 땐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인 그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아빠로서 누릴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권리를 제 하찮은 신념에 양보하라고 막아서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제 마음 편차고 시우와 그에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비혼을 결심했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 같은 선상에 두고 저울질할 필요가 있는 걸까.
도대체 뭐가 정답인지 다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한테 그것들을 결정할 권리가 있긴 한 걸까?”
다정이 고민스럽게 중얼거리자 솔이의 한숨이 짙어졌다.
“얘, 그냥 쉽게 쉽게 생각해. 이럴 땐 미국 애들 본받아야 한다니까. 걔들은 야구장 갈 때도 새 아빠랑 친아빠랑 나란히 손잡고 가잖아. 얼마나 화목하고 개방적이니?”
“그건 미국 얘기고. 그리고 미국이라고 다 그러겠니?”
다정이 핀잔했다. 그러자 듬직하게 솔이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넌지시 끼어들어 한소리 거든다.
“요즘은 한국도 인식이 달라졌어요. 이혼율이 높아지니까 사회적 인식도 자연히 변할 수밖에 없는 거죠. 10년만 있어 보세요. 한국도 이혼한 전처랑 재혼한 아내랑 언니 동생 하는 날이 올 테니까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농담이랍시고 지껄이며 곰돌이처럼 푸근하게 웃어 보이는 이분이 바로 배솔이의 새 남친 홍준호 되시겠다.
그리고 그분의 여자친구는 시시한 농담에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기발하다는 듯 솔이가 짝 손뼉을 마주쳤다.
“어머, 쭌! 언니 동생 하다가 같이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나중엔 여행도 가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남편 욕도 같이 하면 진짜 재밌겠다.”
“와,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역시 우리 자긴 쎈쑤좽이!”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자기란다. 쿵짝이 지나치게 잘 맞는 남녀를 향해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이 정도면 솔이에게 어떤 남자든 단숨에 굴복시키고 마는 치명적인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한데, 어째서 매번 뒤통수를 맞고 눈물 바람인지 모르겠다.
“홍준호 씨는 김치공장 공장장이라고 안 했어요? 김치공장이 하나도 안 바쁜가 봐요. 김치공장 공장장이 김치공장엔 안 있고 카페에 있는 걸 보면요.”
괜스레 눈꼴이 시어 비아냥거리는데도 홍준호는 사람 좋게 허허 웃기 바빴다.
“알바가 말도 없이 그만뒀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제가 나와서 도와야죠. 우리 솔이 몸 약한 거 뻔히 아는데.”
배구선수였다고! 100미터 10.3초! 바퀴벌레 맨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말해 뭐 할까 싶어 다정은 입술을 일자로 꾹 붙이고 침음을 삼켰다.
그 사이 솔이가 대화의 논점을 되돌렸다.
“문제는 시우야. 홍길동이 괜히 홍길동이 아니다, 너. 지금이야 시우가 어리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지. 이틀 걸러 한 번 보는 아저씨가 지 아빤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아봐. 그게 더 충격일걸? 그럼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삐……뚤어져?”
세상에서 젤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 말도 안 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솔이의 지적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출생의 비밀 아닌가. 끝내 묻어 뒀다가 시우가 조금 더 철이 들어 우연이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우연이 하필 운 나쁘게 질풍노도의 시기와 맞물린다면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다정은 심각한 표정에 잠기어 만약의 사태를 떠올려 보았다. 불현듯 사춘기에 접어든 시우의 반항적인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아, X!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참견이야! 나 삐뚤어질 거야! 그러니까 내 인생에 상관 말라고, XX!’
다정은 거세게 머리를 흔들어 눈앞을 스치는 끔찍한 망상을 떨어냈다.
‘사춘기’ 또는 ‘반항아’라는 단어에 흔히들 대입해 볼 수 있는 대사와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심각한 와중에 앞에선 닭살 행각이 한창이다. 사람 앞에 두고 너무 하는 거 아니냔 식으로 눈을 흘기자 솔이가 비죽 혀를 내민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누가 부럽대?!”
어쩐 일로 다정이 발끈했다.
“어머머? 아님 말지 왜 화를 내고 그러니?”
“됐어! 나 갈 거야!”
코스모스가 담긴 병을 휙 낚아챈 다정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돌아서서 카페를 나섰다.
모르겠다. 알콩달콩 닭살을 떨어 대는 친구를 보는데 왜 기분이 언짢은 건지.
아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이 자신과는 대조적인 것에 불뚝 화가 치밀었던 것 같다.
애먼 친구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지만, 다정이 정작 화가 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남들은 저렇게나 쉬운 게, 심지어 그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제겐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지 모르겠다.
* * *
애매한 시간대 탓인지 백화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도준은 하얀 타일로 감싼 기둥 앞에 멈춰 섰다. 상향 에스컬레이터의 도착지점에서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곳이라 그를 찾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위치였다.
잠잠히 에스컬레이터 쪽을 바라보던 도준은 왼팔을 들어 습관적으로 시간을 체크했다.
약속 시각까지 3분여를 남겨 두고 있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3분 안에 약속 상대가 반드시 나타날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이 에스컬레이터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렌지색 머리칼을 한쪽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린 세련된 여자였다.
도준이 의도한 대로 수경은 단번에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상냥하게 미소 짓는다.
“기다리게 한 거 아니죠?”
인사 대신 던져진 질문에 도준은 손목시계의 유리면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세이브예요.”
오늘은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네 번째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첫 번째 데이트에선 영화를 보고, 저녁으로 삼겹살과 소주를 마셨다. 마빌의 악당 다크블랙의 열성 팬으로 의기투합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두 번째 데이트 땐 약간의 교양과 분위기가 추가되었다. 소호 전시장이 밀집한 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전시를 관람하고 그것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근사한 칵테일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세 번째 데이트는 한강 공원 산책을 겸한 피크닉이었다. 점심으로 수경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나눠 먹고 함께 오리배를 탔는데 너무 힘들고 재미가 없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 데이트 장소가 백화점인 건 수경이 이곳에 용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뒤. 수경이 큼직한 쇼핑백을 들이 보이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골랐어요. 도준 씨랑 같이 안 왔으면 선물이고 뭐고 중간에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을 거예요.”
며칠 뒤가 사촌 동생의 생일이었다. 한 번도 챙겨 주질 못해 올해는 꼭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 취향을 알 길이 없어 도준에게 도움을 청했더랬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치고 수경은 쇼핑에 흥미가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선택 장애도 있어, 비슷한 물건을 두고 비교하고 고르는 일에 아주 젬병이었다.
반면 도준은 몹시 섬세하고 꼼꼼한 남자였다. 관찰력도 뛰어나서 상품의 미묘한 차이나 활용도를 금방 파악해 수경의 결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수경은 제 안목에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물건 고르는 취미는 없어도 남자 보는 눈만은 탁월했다.
처음 본 순간 이렇게 섬세하고 자상한 남자라는 걸 알았다.
“오늘 고마워서 그러는데, 도준 씨한테도 선물 하나 해 주고 싶어요. 괜찮죠?”
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부터 쳤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그러지 말고 가요. 꼭 선물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의 손을 잡아끄는 수경의 얼굴에 설렌 미소가 번졌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수경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거울 속에서 완벽한 슈트 핏을 자랑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고르는 건 고역이라 대충 아무거나 골라 입혔는데, 권도준은 이렇게나 훌륭하게 소화를 해냈다.
한 번쯤 슈트를 입은 그를 보고 싶었다. 명한유통 신사업 추진 기념행사 때 턱시도 차림을 본 적이 있지만, 격식을 차린 턱시도와 캐주얼 슈트는 느낌부터 확연히 달랐다.
가을 느낌 물씬 나는 브라운 카키의 절묘한 조화가 도준의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몹시 잘 어울렸다. 격식에 매이지 않는 그의 취향을 반영해 셔츠와 타이를 생략했더니 오히려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마네킹처럼 멀뚱히 선 도준은 민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인형처럼 옷이 입혀져 이렇게 거울 앞에 세워져 보긴 처음이라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거울 속 수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슈트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물론 권도준 씨는 빈티지 진을 입었을 때가 제일 섹시하지만요. 아! 빈티지 진만 입었을 땐 더 섹시하겠죠?”
‘섹시’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은쟁반의 옥구슬처럼 어찌나 높고 청아한지. 덕분에 매장 안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준에게 모여들었다.
민망함을 감출 길 없던 도준은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감싸고 문질렀다.
태어나 섹시하단 말을 딱 두 번 들어 봤는데, 그 한 번이 지금이고 또 한 번이 수경과 선을 보던 자리에서였다.
저란 남자를 섹시하다고 말해 주는 여자는 또 처음이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