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용기 있는 사람 (64/114)


64화 용기 있는 사람
2023.03.12.



“노인넨? 별다른 얘기 없어요?”

결재 서류를 들춰 보던 정혁이 은연중에 물었다. 민 실장이 재깍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묵묵부답이자 정혁의 눈길이 설핏 올라선다.


“그 얘기 말이에요. 노인네 귀에 흘리라고 한 지가 언젠데. 보고가 늦네?”

그제야 내용을 떠올린 민 실장이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보고는 구두로 즉각 이루어졌다.


“죄송합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보고가 늦었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회장님께서 유치원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는데…….”

“알겠어요.”

정혁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민 실장의 뒷말을 잘랐다. 박 회장이 유치원에 납시었다, 까지만 들어도 충분히 알 만했다.

증손자를 괴롭힌 마녀 3인방에게 따끔한 벌을 주었을 테다. 무시무시한 경고도 잊지 않았겠지. 그리고 모든 게 끝난 뒤에는 당근을 쥐여 주며 적당히 구슬렸을 테고.

박 회장을 두고 세간은 인재를 잘 다루며 상벌이 명확한 원칙주의자라 평하지만, 정혁은 지금껏 살며 박 회장처럼 다양한 양가성을 띤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지독히 보수적이면서 혁신적이고, 공명정대한 것 같으면서 편파적이기 이를 데 없다. 인정과 아량이 넘치는 것 같지만 칼처럼 냉정하고 너그러운 것 같다가도 가차 없다.

박 회장은 그런 사람이다. 한 마디로 무조건 팔은 안으로 굽는 유형이랄까. 철저히 자신과 자신의 영역에서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유도하고 결과를 도출한다.

게다가 자손에 대한 애정은 좀 각별해야 말이지. 이미 유시우를 두고 차씨 집안 종손이라 말하는 노인이었다. 그걸 건드렸으니 가만히 보고 있을 노인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 일로 유치원 안에서 유시우의 위치가 대략 확정된 셈이니, 이젠 어른들이 조심할 차례였다. 더는 실수로라도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어른은 없을 것이다.


“면세점 해외 진출 관련해 준비하란 건 어떻게 됐어요?”

차 전무의 요청에 민 실장은 즉각 해당 자료를 찾아 대령했다.

대충 내용을 훑은 정혁이 갑자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민 실장의 휴대폰이 딩동, 하고 맑은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차 전무도 민 실장을 빤히 쳐다본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것도 같아 민 실장은 재빨리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정혁이 전송한 메시지는 누군가의 연락처였다.


“아는 변호사인데, 시험 삼아 법률 자문 좀 받아 봐요. 잘 구슬려서 곧장 TF에 합류시키면 더 좋고.”

민 실장은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호박 마녀 010-90XX-84XX」

변호사라고 하기엔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저장 명이지만, 어쨌든.


“명한의 모든 법률 자문은 R&U 로펌에서 전담하고 있습니다. 요청하면 팀을 꾸려 보내 줄 텐데 굳이 외부에서 영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민 실장이 의문을 표하자 정혁이 되레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R&U는……. 거긴 노인네 수족이나 마찬지 아닌가? TF에서 하는 일이 기밀인데, 이걸 거기다 까발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회장님도 아시게 될 텐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당연하지. 그렇게 되면 내가 우리 할머니한테 빅엿을 못 맥이잖아.”

라고 말하는 차 전무의 입꼬리가 악당처럼 씨익 늘어졌다.


 

* * *



『오늘 전무님 외부 일정이 끝나셔서, 한 시간 정도 대기하다가 바로 퇴근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비서실 여직원의 목소리였다. 그러마 대답하고 통화를 종료하는 김 기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조기 퇴근 보너스를 받은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을 일인가.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 그렇다.

회삿돈으로 월급을 주며 온갖 생색을 내는 건 기본. 근무 외 시간까지 길바닥에서 무작정 대기를 시키거나, 퇴근 후 아무 때나 불러 대리 기사처럼 부려 먹던 인간들.

그런 꼰대 같은 영감들 비위를 맞추는 게 여간 고달픈 게 아니었는데, 지금 모시는 차 전무 같은 경우 사람이 심플해서 좋았다.

시트에 늘어져 있던 김 기사가 쭉 기지개를 켠다.


“슬슬 퇴근 준비나 해 볼까?”

임원 전용 지하 주차장 한편에 차를 댄 김 기사는 트렁크에서 차량용 먼지떨이를 꺼냈다.

임원은 회사의 얼굴. 그들이 늘 이용하는 차를 반질반질 광택 나게 유지하는 것 또한 수행 기사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중 하나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먼지를 떨어 나갈 때였다.


“할 만해요?”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김 기사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진한 남성용 스킨 냄새를 풍기며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지승훈 상무였다.

김 기사는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임원 전용 주차장에서 임원과 마주친 게 몹시 당혹스러웠다.

임원들은 보통 로비를 거쳐 현관 밖에 대기시킨 차량에 곧장 탑승하기 마련이었다. 말인즉, 이곳이 임원 전용 주차장이긴 하나 임원이 몸소 납실 일은 없다는 거다.


“아,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날도 더운데 쉬엄쉬엄해요.”

승훈이 격려하며 자양강장제를 내민다. 그걸 냉큼 건네받으며 김 기사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상무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무슨 일은. 다 한 식군데 서로서로 격려도 하면서 지내야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의 노고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게 관리자의 책임이니까.”

“…….”

김 기사의 눈이 도르르 굴렀다. 특권의식에 절고 갑질의 상징인 지승훈 상무가 기사들이 대기하는 누추한 장소까지 직접 찾아와 격려를?


“그나저나, 차 전무가 타는 차가 이거예요? 좋네.”

“임원용 차량은 다 동급이라, 상무님 차량과 동일한 기종입니다.”

김 기사의 지적에 머쓱한 얼굴이 된 승훈은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알지. 그래도 옵션은 좀 다른 거 같아서.”

운전석에 턱 엉덩이를 걸친 승훈이 핸들이며 이것저것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쑥.


“담배 한 대 하고 와요, 난 차 구경 좀 하고 있을 테니까.”

김 기사는 불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담배를 피우러 가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무언의 눈빛만은 충분히 읽어 들일 수 있었다.

김 기사가 사라지고 승훈은 재빨리 내비게이션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바삐 화면을 헤집던 손끝이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냉철한 느낌을 자아내는 은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이 낯선 주소지를 빠르게 읽어 들였다.

「홍제동 XX로 552길 15」
 

* * *



“어!”

등원하는 길. 주차장을 벗어나 유치원으로 향하던 시우가 돌연 엄마의 손을 놓고 화단으로 달려갔다.

계절이 한창인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을 추듯 꽃대를 흔들고 있었다. 엄마를 돌아본 시우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엄마! 꽃.”

“그러네. 코스모스 엄청 예쁘다. 그치?”

조심조심 꽃잎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고민하던 시우가 이내 결정을 내리고 자줏빛 코스모스의 꽃대를 똑 꺾었다.

그 모습에 다정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아들. 엄마 꽃 주는 거예요?”

“어…….”

설레발을 치는 엄마의 물음에 시우의 순진한 눈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나쁜 어린이다.


“아니…… 할머니.”

“할머니?”

“응! 할머니 선물! 시우가 줄 거예요.”

다정은 어리둥절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방그레 웃으며 시우의 코를 톡 건드렸다.


“그래, 그러자. 그럼 이건 엄마가 대신 할머니한테 전해 줄게요. 시우 선물이래요, 하면서. 괜찮지?”

“네!”

그렇게 코스모스꽃은 엄마에게 조심스레 전달되었다.

유치원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저 멀리 밉상, 진상, 화상 트리오가 이쪽으로 눈길을 주며 서성이는 게 보였다.

다정은 개의치 않고 무릎을 굽혀 시우의 옷매무새와 흘러내린 가방끈을 다져 주었다. 그때 짧은 그림자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눈길을 돌리자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하나가 서 있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방싯 웃었다. 시우도 예쁘고 애교가 많지만, 확실히 여자아이들은 귀여움의 차원이 달랐다.

다정이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머, 우리 공주님은 이름이 뭐예요? 우리 시우랑 친구예요?”

“공주 아닌데! 예림인데! 안예림!”

천진하게 말한 시우가 예림이를 향해 씩씩하게 인사했다.


“예림아 안녕!”

“안녕…… 유시우.”

마주 인사한 예림이가 어째선지 수줍은 모양으로 서성거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뒷짐 쥔 손을 꺼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거, 선물.”

앙증맞고 수줍은 손이 내민 것은 초콜릿이었다.


“어…… 고마워, 예림아.”

 

 
의젓한 소꿉놀이를 보는 듯한 장면에 다정의 거의 오열할 지경이었다. 어린 것들이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워 웃음을 참자니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선물 전달식을 끝낸 예림이가 휙 돌아서서 달려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봐 주던 다정의 눈이 불현듯 가늘어졌다. 예림이란 아이가 퍽 달갑지 않은 여자에게 달려가 안긴 까닭이었다.

예림이를 앞세운 영신모직 며느리가 다정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푸름건설 딸과 하나테크 사모도 자신의 아이들을 앞세워 뒤따랐다.

또 유치원을 옮기라며 시비를 걸려는 걸까. 다정은 경계심을 바짝 곧추세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신모직 며느리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넨다. 전에 없을 상냥한 웃음과 함께였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시우 어머니.”

“네…… 안녕하세요.”

형식적으로 인사를 돌려주는 중에도 다정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 예림이가 시우를 참 좋아해요.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글쎄 시우라고 하지 않겠어요? 호호.”

영신모직 며느리가 예림이를 앞으로 떠밀었다. 작위적은 웃음을 흘리며 푸름건설 고명딸과 하나테크 사모도 가세했다.


“우리 영민이도 시우가 제일 좋대요.”

“우리 현재는 어떻고요. 호호.”

“아…… 네.”

다정은 영혼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림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다지 내켜 하는 것 같지 않더니, 제 엄마 채근에 못 이겨 시우에게 초콜릿을 주었나 보다. 영민이와 현재라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시우 어머니. 지난번엔 정말 미안했어요.”

영신모직 며느리가 사과하자 두 여자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은 영문 모를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뭘…… 말씀하시는 거죠?”

다정이 반문하자 영신모직 며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의 무리와 눈을 맞췄다.


“아…… 혹시 모르세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게…… 우리 예림이가 뭘 잘 몰라서 시우한테 말실수를 한 모양이에요.”

“네? 말실수라면 어떤……?”

난감해하던 영신모직 며느리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빠가 없다고…….”

“…….”

다정의 눈가가 살그머니 일그러졌다.


“아휴, 이 나이 때 애들이 다 그렇죠.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잖아요. 어린애가 뭘 잘 몰라서 그런 건데, 이해해 주실 거죠?”

뭘 잘 모르는 어린애가 말실수를 한 건 어린애의 잘못이 아니라, 뭘 잘 모르는 어린애 앞에서 떠드는 어른의 잘못이었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략 짐작이 가네요. 근데 어머니들. 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제게 사과를 하시는 거예요? 사과해야 할 대상이 틀렸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네?”

어리둥절해하던 영신모직 며느리가 입을 쩍 벌리더니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어머, 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시우야. 그날은 우리 예림이가 미안하대.”

다정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엄마라는 사람이 되어서 끝까지 자기 잘못을 어린 딸에게 덮어씌운다.

철모를 아이를 앞세우면 대부분의 심각한 상황은 너그럽게 무마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다 큰 어른이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시우는 착하니까 예림이 사과 받아 줄 거지?”

“어? 음…….”

입술을 감쳐문 시우가 고개를 휙 젖혀 다정을 보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로 다정이 살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시우의 눈길이 원위치했다.


“네! 엄마가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댔어요. 그리고 사과와 용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랬어요. 예림아! 사과해 줘서 고마워.”

올망졸망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가 씩씩했다.

그 모습에 다정의 눈이 흐물흐물해졌다. 정말이지 제 아들이지만 반할 지경이다.

하긴, 차정혁이 맘먹고 그윽하게 바라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니까…….

응? 갑자기 차정혁?

화들짝 정신을 차린 다정은 급격히 달아오른 뺨을 후딱 감쌌다.

미친 모양이다. 이 상황에 갑자기 그 남자 얼굴을 왜 떠올리는 건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