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오구오구 내 강아지
(63/114)
63화 오구오구 내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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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오구오구 내 강아지
2023.03.09.
선영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며칠째 지속된 두통이 통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골머리를 앓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현아의 결혼이 어그러진 일을 계기로 시끄러운 문제들이 우후죽순처럼 포진해 있었다.
그 와중에 정신 사나운 장면이 눈에 잡힌다. 희한한 몰골로 거실을 오락가락 서성이며 뭔가를 중얼대고 있는 현아.
머리는 산발에 마스카라와 짙은 아이라인은 눈물 자국으로 죄 번져 있고 술 냄새는 진동을 했다. 못해도 사나흘은 샤워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딸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선영은 고개를 잘잘 저었다.
며칠째 유치원엔 코빼기도 비추질 않고, 휴대폰은 먹통에 감감무소식이라 혹여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을까 오피스텔로 들이닥쳤더니 저 몰골을 하고 수 시간째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 빨리 받으란 말이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쩌라고 진짜…… 어후, 빨리 받으라고 쫌…….”
비 맞은 땡중처럼 중얼거리는 딸을 보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머리를 쪼아 대고 있는 것처럼 골이 극심하게 울렸다.
끙, 하고 신음을 삼킨 그녀는 효과도 잘 모르겠는 진통제 한 알을 급히 털어 넣었다. 그때 악에 받쳐 한계치까지 내몰린 현아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하고야 만다.
“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거칠게 날아간 휴대폰이 값비싼 발레리나 황동 조각상을 명중하며 뎅, 하는 소리를 울렸다.
정확히 발레리나의 머리를 때려 목을 찌그러트린 휴대폰은 곧장 바로 뒤에 걸려 있는 유명 팝아트 화가의 작품까지 논스톱으로 날아가 정중앙을 찢어 놓는 참혹한 결과를 낳은 뒤에야 바닥으로 툭 떨어져 장렬히 전사했다.
“안 받아! 안 받는다고! 백 번도 더 했는데 오빠가 내 전화를 안 받아! 아아아악!”
제 머리채를 부여잡고 현아가 악을 질러 댔다. 선영은 눈을 질끈 감고 탄식을 뱉었다.
반 실성한 딸의 절규를 듣고 있자니 안 그래도 깨질 것 같은 머리가 동강동강 썰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저러다가 또 사달이 날까 조마조마했다.
“나 이제 어떡해?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
현아의 채근에 질끈 감겼던 선영의 눈길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빈 술병과 배달 음식의 잔재가 뒤섞인 가운데 원아 신상 기록과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한 유전자 검사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을 보고서야 선영은 병적으로 예민해진 딸의 상태를 납득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온다. 박 회장, 이 망할 할망구. 손자한테 혼외자가 있는데 그걸 감쪽같이 숨겨?
더 놀라운 건 문제의 아이가 하필이면 자신이 추천서를 써 준 미혼모의 아이라는 거다.
사람을 써 출입국 기록과 통화 목록을 모두 뒤져 봤지만, 도무지 두 사람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 전무는 내내 외국에 머무르며 일 년에 한 번 부친의 기일에 사나흘씩 한국을 다녀가는 게 고작이었고, 마찬가지로 아이 엄마도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한국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차 전무와 아이의 관계를 증명하는 유전자 검사지는 있는데, 교류한 흔적이 없다?
그건 유전자 검사를 마음먹기 전까지 정혁이 제 아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거다.
그럼 현아가 목격한 대로 유치원에서 재회했다는 건데, 선영이 가장 낭패스러운 것도 그 대목이었다.
자격도 안 되는 아이에게 추천서를 써 주는 바람에 제 딸의 발등을 내리찍은 꼴이 아닌가.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순진한 현아를 불러다 남의 자식을 키울지 말지 가타부타 결정을 내리라 한 모양인데, 거기까지 꿇고 들어가는 건 너무 모양이 빠지지.
아깝지만 별수 없다.
“오현아, 너 이 결혼 그만둬.”
“뭐? 엄마가 뭔데 그만둬라 마라야!”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현아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애 딸린 남자랑 결혼을 해?”
“엄마도 했잖아! 엄마도 애 딸린 남자랑 결혼해 놓고 왜 나 보고만 하지 말래?!”
“엄마 말 들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위자료 명목으로 큰 거 하나 받아 내는 게 더 이득이니까.”
“오빠가 딴 X이랑 저러고 있는데 위자료 따위가 무슨 소용인데!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애초에 엄마가 그 미혼모한테 추천서 안 써 줬으면 오빠랑 그 여자랑 만날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그 원망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선영이 한숨을 터트리는 사이 징징거리던 현아는 무슨 생각에선지 허둥거리며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골치가 아픈 와중에 선영이 의아해 물었다.
“어디 가려고?”
“어디긴. 그 미혼모 찾아가서 당장 박살을 내야지!”
“오현아,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만류하는 말에 현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냉정?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냉정하란 말을 할 수 있어? 엄마가 그랬잖아. 용빼는 재주 없고서야 제 자식 외면하는 남자 없다고! 엄마가 나 낳아서 아빠도 끝까지 엄마랑 연을 못 끊은 거라면서! 그럼 결국 오빠도 그렇게 될 거라는 말이잖아!”
“현아야.”
“오빠가 누군지 알고 접근한 게 틀림없어. 계획적으로 임신한 게 뻔하잖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미혼모 주제에 그렇게 당당했지. 우리 유치원에 들어온 것도 우연 아닌 것 같아. 엄마한테 일부러 접근해서 추천서 받아 낸 걸 수도 있어. 보통 여우가 아니라니까!”
“오현아?”
“가만 안 둘 거야. 죽이든 살리든 내 손으로 결판을 낼 거라고!”
“오현아!!!”
보다 못한 선영이 결국 엄하게 언성을 키웠다.
“정신 차려! 너 이러는 거 네 아빠한테 걸리면 큰일 나. 또 병원에 끌려가고 싶어?”
“……벼, 병원?”
‘병원’이란 말이 언급되자 현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겁은 먹은 얼굴로 바들거리던 그녀는 냉큼 선영의 품을 파고들어 애원했다.
“어, 엄마! 나 병원 싫어. 아빠한테 나 병원에 가두지 말라고 해. 나 거기 가는 거 죽기보다 싫어. 응?”
선영은 한결 누그러진 현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우리 딸. 너 병원 끌려가는 건 이제 내가 못 봐. 있어 봐. 안 그래도 엄마가 들은 게 좀 있어.”
현아가 아이라인이 번져 거무튀튀한 눈을 홉떴다.
“들어? 뭘……?”
“글쎄, 정혁이 생모 말이야. 아무래도 살아 있는 거 같아.”
* * *
한가로운 토요일의 오후.
늦은 점심을 해치우고 다정이 설거지를 막 끝냈을 무렵 똥 마려운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잡혔다.
깨금발로 싱크대를 붙잡고 서서 엄마의 설거지가 끝나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시우의 모습이 딱 애가 탄 강아지만 같았다. 밥을 먹고 놀이터에 가기로 한 약속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우를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요지부동 소파만 지키는 정애가 보였다.
정애는 몹시 적적하고 무료해 보였다. 허리 지지대를 차고 불편한 자세로 종일 TV를 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엄마,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바람 쐬러 가요.”
현관을 나서자마자 시우는 와다다 달려 저만치로 앞서 나갔다. 할머니를 부축하는 엄마를 대신해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느릿느릿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정애는 눈을 꾹 감았다. 집 안에 있을 땐 모르겠더니 밖으로 나오자 디디고 선 발밑이 까마득한 공중이라는 사실이 실감 되었다.
확실히 촌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다. 정애는 고층을 오가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만 해도 그랬다. 일단 타기도 전부터 어지럼증이 도는 건 기본이고 발밑이 쑥 꺼지는 느낌이 들 때면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잠깐이라 견딜 만은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엄마, 여기 잠깐 앉아 계세요.”
정애를 부축해 놀이터까지 온 다정은 그녀를 벤치에 앉힌 뒤 시우와 함께 그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애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높은 아파트 꼭대기를 올려다보다가 넓은 단지를 천천히 훑었다.
여전히 닭장처럼 갑갑하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딸애가 이렇게나 좋은 집에 산다는 사실만은 몹시 뿌듯하게 느껴졌다.
남들은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고 결혼해서도 내 집 하나 장만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부모 도움 하나 없이 홀로 자식까지 키우며 이만큼이나 잘 사니, 뉘 집 자식들과 비교해도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귀에 잡힌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손자의 그네를 밀어 주는 딸애가 보였다.
남들은 자식보다 손주가 먼저라는데, 여전히 딸애의 모습이 눈에 먼저 담기는 걸 보니 아직은 할미가 될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딸애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작게 태어난 계집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렸던 순간, 너무도 가슴이 벅차올라 함께 울었더랬다.
암울하기만 하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유일한 희망이었고 삶의 이유였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들을 대신 다 누리며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딸인데,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을 딸인데.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의 회한만 밀어닥친다.
무지해서, 못 배워 무식한 어미라 그저 남들한테 손가락질만 받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다.
딸애를 위한답시고 해 왔던 그 모든 선택과 결정들이 결과적으로 딸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줄도 모르고.
자신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는 바람. 오직 그 하나만을 바랐는데, 어쩌면 그 바람은 벌써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딸애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선택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에 몸을 사리던 어미와는 확연히 다른 삶이었다.
“할머니이! 시우, 이마―안큼 올라갔어요!”
시우가 그네를 뛰며 까르르 소리를 냈다. 눈이 마주치자 다정도 정애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활짝 웃는다.
그래, 이거면 되었지. 딸애가 저렇게 웃으며 살고 있으니 더없이 대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엄마. 들어가서 눕고 싶으면 말씀하셔.”
시우가 또래 아이들과 시소를 타는 걸 보고 벤치로 돌아온 다정이 말했다. 정애는 고개를 저었다.
“아녀. 바람도 쐬고 언내들 구경도 하니 좋니라.”
그때 철퍼덕, 하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반사적으로 눈길을 돌리자 시우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소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쿠션 바닥재라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놀랐는지 다정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비죽거리는 게 곧 울 기세다. 순간 다정은 움찔하려는 발끝에 힘을 주고 말했다.
“우리 시우 괜찮아. 씩씩한 어린이는 안 우는 거예요.”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종종 이렇게 마음과 다른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응석을 부리지 못해 서운한지 시우의 눈이 울먹울먹했다.
“으응? 싸나이는 우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어서 일어나.”
다정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할 때였다. 그녀의 등짝으로 난데없이 불덩이가 내리꽂혔다.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다정은 고통과 황당함이 뒤섞인 얼굴로 정애를 돌아보았다. 불덩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애의 손바닥이었다.
“어, 엄마…… 왜 때려?”
“옘병할 X. 애가 자빠졌는디 애미라는 년이 뭐라는 겨?”
딸의 얼굴을 사납게 흘겨본 뒤 정애는 아픈 허리를 짚고 끙차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는 것처럼 시우를 향해 종종걸음쳤다.
“오구오구 내 강아지. 아파서 워쩐댜?”
“하무니이이이이이이잉!”
할머니가 응석을 받아 주자 울먹거리던 시우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오냐오냐, 내 새끼. 할미가 호― 해씅께 인자 갠차녀.”
냉랭하기만 하더니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 물고 빨고 어느새 내 새끼, 내 강아지란다. 그 모습에 등짝이 찢어질 것 같은 와중에도 다정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늦여름의 놀이터 위로 타는 듯한 노을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