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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애원이야 (62/114)


62화 애원이야
2023.03.05.



 
연애. 그 유혹적인 감정놀음이 어떤 기분과 감각을 선사해 주는지 다정도 잘 알았다.

이성은 마비되고 열망에 사로잡혀 그게 뭐든 거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마는 위험천만하고 달콤한 감정의 유희.

눈앞의 남자는 또다시 그 어지럽고 혼란한 상태가 되어 보자고 속살거리고 있는 거다.

아찔한 감각에 빠져 허우적거려 보자고, 설레 보자고, 두근거려 보자고.


“하자, 응?”

간지럽게 속삭인 입술이 마침표를 찍듯 뺨을 꾹 누르고 떨어졌다. 다정은 콩닥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곤란해하다가 그냥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다 들킨 것 같았다. 당신에게 두근거린다는 사실도. 당신의 황홀한 입맞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진심도.


“해, 응?”

보채는 목소리조차 달콤했다. 그러나 다정의 방어기제는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 안 돼요.”

단호한 거절의 말에 여기저기 입을 맞춰 오던 입술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정 거리를 벌린 채 정혁의 눈썹 끝이 살짝 뒤틀렸다.


“왜?”

“여, 연애 같은 거! 관심 없어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하는 눈빛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다정도 저 자신이 조금 가증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더 다가오지 않는 입술을 조바심 어린 눈길로 좇으며 연애 따위 관심 없어요, 하는데 그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리 없었다.

정혁은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다정의 습관적 언행 불일치가 비단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운은 조금 빠졌다.


“나 유시우한테 아빠라고 말하고 싶어.”

매 순간 그랬다. 빌어먹을 어딘지도 모르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아빠가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오래도록 곁에 있어 줄 거라는 말도.

그러나 그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 또한 충분히 공감했다.


“하지만 차정혁 씨…….”

“알아. 그래서 안 해.”

정혁은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성미대로라면 벌써 제멋대로 저질렀겠지만, 유다정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결혼을 밀어붙인 것 역시 순서가 틀렸다.

막연히 두 사람 사이에 유시우가 있으니 결혼이 가능할 거라고 믿은 건 착각이었다.

애초에 시작과 결과만 있을 뿐 과정은 모두 생략되었는데, 그게 뭐든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 관계에 있어 결혼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박 회장을 방어할 수단으로 결혼을 떠올린 건 맞지만, 더 중요한 건 유다정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 문제였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렇게 사랑스레 서로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체온을 나눌 수 있다면 조르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 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부부가 되면 다양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거다. 가령, 유시우에게 계획에도 없던 예쁜 여동생이 계획적으로 생겨 버린다든가 하는 뭐 그런 경사로운 일 말이다.

뭐가 됐든 그녀의 비장한 결심을 존중한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겠다면 하지 않는 거다. 그리고 정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우선은 유다정의 남자가 되는 것부터 해 볼 작정이었다.


“유다정이 허락할 때까진 아무 말도 안 해. 그러니까 너도 하나는 양보해. 연애해.”

“그,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정혁의 얼굴이 다시 심드렁하게 굳었다.


“유다정. 넌 왜 그렇게 못돼 처먹었어?”

놀랍도록 차분하고 솔직한 질타에 다정의 입이 스윽 벌어졌다.


“차정혁 씨! 지금 나더러 못돼 처먹었다고 했어요?”

“그래, 그랬어. 왜?”

언제 그랬냐는 듯 급격히 언짢아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밀착했던 몸을 신속히 떨어트렸다.

마치 풍선을 타고 끝 모를 곳으로 두둥실 떠올랐다가 예고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다정은 기막힌 얼굴을 하고 손부채를 부쳤다.


“하, 기가 막혀서.”

“나만 하려고? 멍청이.”

“머엉……. 멍청이? 차정혁 씨. 지금 나더러 한 말이에요?”

“그럼, 여기 너랑 나 둘뿐인데 누구겠어?”

다정은 이를 사리물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살다 살다 이런 모욕적인 말은 또 처음이었다.


“비싼 밥 먹고 왜시비예요?”

“시비?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여? 이게 다 유시우를 위한 건데 왜 너만 몰라.”

“시우가 왜요?”

“유시우가 워낙 작고 하찮잖아.”

“작고 소중한 거죠.”

다정이 차분히 정정했다.


“어쨌든 작잖아.”

그래서 아빠가 지켜 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속상해!

정작 해야 할 말은 가슴 속에 묻었다. 다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차정혁 씨. 시우랑 연애랑 무슨 상관이에요? 하다 하다 이제 시우 핑계예요? 비겁하게.”

“비겁? 지금 나더러 비겁하댔어? 알지도 못하면서! 유시우가 유치원에서……!”

순간 발끈해 왁 내지르려던 정혁은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 엄마 속상하면, 시우도 싫은데. 그러면 시우도 속상하고…….’


‘그래, 그러니까 비밀로 해. 약속.’

차마 아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운만 떼고 입을 다물자 다정이 채근했다.


“우리 시우가 왜요?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하, 됐어! 유시우가 효자란 것만 알아.”

토라진 사내애처럼 팩 시선을 돌리기도 잠시, 정혁은 졌소! 하는 심정으로 다시 진지한 대화에 돌입했다.


“유다정. 애 좀 그만 태워. 너도 나 좋잖아.”

“너, 넘겨짚지 말아요. 난 아니에요.”

“자꾸 튕기면 유시우한테 아빠라고 말하는 수가 있어.”

“협박이에요?”

“애원이야.”

“…….”

다정은 살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대놓고 애원이라고 하니까 오히려 무슨 말로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정혁 씨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요?”

그러니까 왜 아이까지 있는 여자에게, 물론 그 여자가 자기 아들을 낳은 여자이긴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다정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뭘 물어? 너 좋으니까 그러겠지.”

“…….”

저 시시한 대답에 이렇게나 가슴이 뛸 일인가.

그건 그가 듣기 좋은 말을 꾸며 내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라 그렇다. 꾸미지 않으니 고스란히 진심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차정혁 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불안해요.”

“뭐가?”

“변할까 봐…….”

세상 그 무엇도 온전한 처음을 유지하는 것은 없다. 하물며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꽃가마 타고 시집간 날 엄마의 첫 번째 남편도 이처럼 애틋한 눈길로 엄마를 바라봐 주었다지. 두 번째 남편 역시 말해 뭣하랴.

만에 하나 마음을 준 이가 어느 날 변심해 버린다면 다정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게 가장 두려웠다.


“내가 왜 유다정을 좋아하는지 알아?”

길게 감겼다가 떠지는 그의 눈을 보며 다정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다정은 내 가치를 떨어트리거든. 날 하찮을 만큼 평범하게 만들어 버려.”

“……내가, 언제요?”

은연중에 그에게 상처가 되는 실수라도 한 걸까?

저도 아리송한지 다정이 미약하게 부정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혁은 킥킥 웃었다.

정혁을 아는 대부분은 그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고 그의 가치를 높게 샀다. 또 그만큼 그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많은 걸 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다정한테 난 그냥 ‘차정혁 씨’더라고. 차정혁. 그냥 차정혁. 아무것도 아닌 그냥 차정혁. 되게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어쩌면 다정이 그에게 원하고 기대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가? 남들 관심은 질리는데, 유다정이 날 안 보는 건 못 견디겠더라. 그것 땜에 눈에 띄려고 안달하고 관심도 구걸하면서 웃기는 짓거리를 하는 중인데, 이상하게 나쁘지 않아.”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했더랬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런 해방감은 난생처음이었어. 자유롭고 기분 좋아.”

온전히 나일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유다정, 아무래도 나 중독됐나 봐. 그러니까 날 계속 평범한 사람으로 취급해 봐. 그럼 아마 너한테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걸.”

긴 고백의 마무리 끝에 쑥스러운지 그가 픽 찌푸려 웃는다. 정말 잘생기고 말주변 좋은 사기꾼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정은 알 수 없는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흥분된다고 해야 하나? 아니, 벅차게 감동적인 건가? 어쩌면 희열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하다니, 그건 대단히 의미 있고 엄청난 일이 아닐까.

마치 그를 지배하는 신이나 신앙이라도 된 것처럼 거대하고 전능해진 기분마저 스쳤다.

이 남자는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녀란 존재를 몹시 특별하고 주목받는 사람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이라는 거, 어쩌면 한 번쯤 빠져 봐도 괜찮지 않을까.

상처받는 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어쩌면 삶을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사랑, 그 알량한 두 글자가 두렵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지.

다정은 지금껏 확고하게 뿌리 내린 생각을 뒤로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차정혁 씨하고 연애하는 거…… 생각해 볼게요.”

의외라는 듯 정혁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긍정적으로?”

“네에…… 긍정적으로요.”

그제야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어딘지 시원스러운 결론은 아니지만, 짧은 만남의 용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된 듯싶었다.

침묵이 흐르고 다정은 멀뚱멀뚱 정면만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인적 없는 주차장 전경만 눈에 들어왔다.

어색함이 짙어질 무렵 다정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만 가 볼게요.”

“그래.”

대답을 듣고 다정이 몸을 돌리려는데 딸칵, 하고 운전석의 문이 먼저 열렸다. 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차정혁 씨는 왜 내려요?”

“라면 먹고 가라면서.”

“…….”

이 정도면 이 남자에게 난청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시큰둥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자 정혁이 능청스레 눈썹을 끌어 올린다.


“아냐?”

“아니에요.”

“난 또 그 소린 줄 알았지.”

시선을 피하며 딴전을 부리던 그는 재빨리 다른 핑계를 떠올렸다.


“그럼 커피…….”

“안 돼요. 엄마 올라와 계신단 말이에요.”

그 말에 불쑥 눈을 키운 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타박을 던진다.


“그 말을 왜 인제 해?”

그러고는 룸미러를 당겨 요리조리 얼굴을 비추고 머리와 타이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차정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장모님한테 예쁘게 보여야지.”

“…….”

언제 봤다고 장모란다. 이 정도면 넉살도 재능이었다.
 

 


“누가 차정혁 씨 장모님이란 거예요?!”

다정이 기막혀하자 정혁은 되레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내 아들 외조모를 니네 엄마라고 불러?”

“그건 아니지만……. 아니, 왜 선택지가 꼭 그것밖에 없는 건데요?”

다정의 마뜩잖은 시선이 날아들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싶지만, 정혁은 이내 백기를 흔들고 만다. 유다정이 저렇게 쏘아보면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알았어, 유시우 외조모.”

한풀 누그러진 다정이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그냥 시우 할머니가 적당할 것 같아요.”

“그래. 유시우 할머니. 됐지?”

“됐어요. 암튼 허튼수작 부리기만 해요.”

다정의 경고에 그는 군소리 없이 입을 다무는 걸로 수긍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에 할 말은 많은 눈치지만, 그럭저럭 말을 잘 듣는 편이라 마음은 놓였다.

만약 엄마가 이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다정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당장 결혼하라고 들들 볶일 걸 생각하면 벌써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늦었어요. 그만 가요.”

“벌써?”

예상도 못 했다는 듯 그의 눈이 동그래진다. 라면 먹고 갈 생각을 하던 때와는 달리 몹시 작위적이다.


“가야죠…… 늦었어요.”

“좀만 있다 가. 5분만.”

조르며 바짝 거리를 좁히는데 쏟아지는 눈빛이 그윽했다. 얼굴이 델 지경이라 다정은 휘둥그레진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이윽고 목덜미와 귓가를 감싸는 야릇한 손길에 다정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5분……씩이나, 뭐…… 뭐 하려고요?”

“글쎄, 뭐 하지? 일단 다른 거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볼까?”

“다른 거…… 뭐요?”

다정의 내숭을 적당히 모른 척하며 정혁은 그녀의 입술 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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