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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하자, 연애 (61/114)


61화 하자, 연애
2023.03.02.


억울함에 뺨을 감싸 쥔 영신모직 며느리가 울먹울먹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서 아내가 뺨을 얻어맞는데도, 그녀의 남편은 쥐 죽은 듯이 숨을 죽인 채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서러워서 입을 비죽거리는데, 쯔쯧 박 회장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되바라진 것! 시애비 병석에 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집안에 어른 없는 티를 내!”

불같이 호통치기 무섭게 박 회장의 눈길이 푸름건설 딸에게 옮겨갔다.


“넌 뉘 집 딸이냐?”

“푸, 푸름건설…….”

“정 대표 딸년이구나. 서방질하다가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쫓겨왔다지? 고얀 것. 자식 볼 낯도 없는 주제에, 애비 얼굴에 먹칠까지 해!”

신랄한 호통에 푸름건설 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못마땅하게 고개를 저은 박 회장이 다음으로 하나테크 사모의 얼굴을 골몰히 보았다.


“넌 뭐 하는 년이야?”

“저, 전…….”

그녀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절레 고개를 내저은 박 회장이 돌아섰다. 알 필요도 없는지, 반 무시하는 태도였다.

몇 걸음 옮겨간 그녀가 소파 상석에 고상하게 자리를 잡고 다시 호통을 이어 나갔다.


“모자란 것들. 니깟 것들이 감히 내 집안 어린 걸 건드려? 낫살이나 처먹고 자식 키운다는 것들이 하나 같이 이리 못 배워 먹어서야. 다들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주랴!”

좀처럼 화를 삭이지 못하고 버럭거리던 박 회장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 상무! 정 대표!”

“옙! 회장님.”

“네, 회장님.”

그녀의 호명에 나란히 서 있던 두 남자가 냅다 튀어나왔다.

한 사람은 젊고 또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박 회장을 대하는 깍듯한 태도만은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


“상만이 너! 안사람 단속을 어찌 하는 게야?! 몇 해 전에 네 어머니 세상 뜨고 네 아버지까지 몸져누우니까 무서운 게 없는 게야?!”

“송구합니다, 회장님. 바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 건사가 소홀했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휠체어 없인 이동도 힘들다는 영신모직 안 회장을 대신해 불려 온 그의 장남이 허리 굽혀 사죄했다.

그 모습에 영신모직 맏며느리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졌다.


“여보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여자가! 그 입 다물지 못해!”

안 상무가 칭얼거리는 아내에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정 대표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이 모양이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굽실대는 아버지의 모습에 푸름건설 고명딸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노여움을 가라앉힌 박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섭섭할 것 없어. 먼저 떠난 자네 어머니, 그리고 자네 안사람 대신해서 내가 집안 어른 행세 좀 했다 생각해!”

“아무렴요, 회장님.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요.”

정 대표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안 이사도 냉큼 허리 굽혀 동조했다.


“맞습니다. 회장님이 아니셨다면, 지금의 영신모직은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네들이 그리 생각하면 다행이고. 내 두 번 말 안 해. 입단속들 철저히 시켜!”

그 와중에 관심조차 받지 못한 하나테크 대표 부부가 슬며시 눈을 맞췄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신생 기업 따위, 이들 부류에 끼지도 못할 잔챙이 취급이라 은근히 소외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 회장의 잡도리가 대충 끝나갈 무렵, 허옇게 질린 현아의 안색도 조금씩 제 색을 되돌렸다.

현아는 주먹을 꼭 그러쥐며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 놓은 한 장의 서류를 떠올렸다.

파쇄기에 갈려 국수 가락처럼 너덜너덜해진 걸 테이프로 일일이 붙여 원상 복구한 유전자 검사지.

승훈이 처음 그것을 내밀었을 때 현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감히 제 유치원에서 사생아를 보내 놓고 눈앞에서 자신을 기만했겠다.

용서할 수 없다.

* * *



“꼴도 보기 싫으니, 냉큼 사라져!”

박 회장의 호통과 함께 상황도 종료가 되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쪽에서 칭얼거리는 소리와 흐느낌, 호통과 탄식이 교차 되더니 그 소음들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 아이랑 관련된 기록 좀 가지고 오너라.”

현아와 둘만 남겨진 박 회장이 넌지시 아이에 관한 기록을 요구했다.

현아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 뻔뻔한 노인은 자신의 손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랬다. 박 회장은 이런 일로 동요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손자한테 혼외 자식 하나 딸린 게 뭐 대수일까. 손자 인물에 가진 게 그 정도면 처녀 장가를 열 번인 들 못 보낼까.

어찌 됐건, 손자가 현아와의 결혼을 엎은 건 아이 때문이었다. 그럼 애를 데려오면 그만. 차씨 집안 종손이니 마땅히 그래야 하고.

내키지 않았지만, 현아는 박 회장이 요구하는 기록물을 갖다 바쳤다.

박 회장은 시우의 생활기록과 건강기록, 그 밖의 수업 평가나 심리상담 내용을 쭉 훑었다.

손자를 닮았으니 허우대는 보기 좋게 자랄 테고, 외국어에도 재능을 보인다니 어느 정도 머리도 제 아비 쪽이렷다.

기록을 꼼꼼히 살펴본 박 회장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그 모습에 울컥한 현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속내를 내보였다.


“할머니 아이 기록은 왜 보시는 거예요? 설마 절 이렇게 버리시려고요?”

서류로 향해 있던 박 회장의 눈길이 올라섰다.


“내가 이러는 게 널 내치려는 건지, 도우려는 건지 네가 어찌 알아?”

“그 말씀은…….”

경직된 현아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띠가 드리워졌다.


“일단 애는 내 집에서 거둘 거다. 네가 자신 있다면 말리진 않으마. 자신 있냐?”

엄마 노릇을 할 수 있겠냐는 뜻이다. 현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어, 엄마랑 상의해 볼게요.”

“모자란 것. 네 애미가 죽으라면 죽을 테냐?”

박 회장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라고 현아가 손자며느리로 썩 마음에 차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혼사는 사업과 직결되며, 신뢰는 무너트리지 말아야 한다.

신의와 신뢰를 목숨처럼 여기는 박 회장이었다. 그것들을 지켜 왔기에 지금의 명한그룹도 존재할 수 있는 거였다.

순전히 오철중 회장과의 신의에 발목이 잡혀 손자며느리로 허락했지만, 제 발로 걷어차 주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 * *



“우리 시우가 할머니 약 드세요, 하고 말해 볼까?”

“어!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가 작은 쟁반을 조심조심 넘겨받았다. 쏟기라도 할까 거실로 향하는 두 발이 살금살금 기다시피 했다.


“어…… 할머니!”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정애가 눈길을 돌렸다.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바짝 긴장한 고사리손이 쟁반을 내밀었다.


“할머니 약 드세요!”

“치, 여시 같기는.”

기특한 손자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긴 정애는 부스럭대는 약봉지를 입으로 털어 넣었다.

허리 지지대를 하고 꼼짝없이 소파를 지키던 정애는 발밑에 앉아 꼼지락대는 시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평소 정을 주지 않아 어려울 게 뻔한 데도, 시우는 넓은 자릴 마다하고 하필 할머니 발치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어린 게 설마 그 생각까지 하겠냐만, 그 모습이 마치 할머니 적적할까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정애의 눈빛에 흐뭇함이 어렸다.

말을 안 해 그렇지, 보면 볼수록 참 예쁘기도 했다. 제 딸 속에서 나와 그런가. 장마당 어디를 가도 이렇게 예쁜 아가는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 티라노사우르스 알아요?”

뜬금없는 물음에 꿍하던 정애의 눈이 조금 커졌다.


“티라? 티라가 뭐여?”

“할머니 티라노사우르스 몰라요?”

“할미는 몰러. 그게 뭐여?”

“공룡! 공룡인데! 음…….”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하던 시우가 벌떡 일어나 거실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중한 장난감이 담긴 보물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뭔가를 한아름 가지고 돌아온 시우가 정애 앞에 공룡 모형을 우르를 쏟아 놓았다.


“이거! 이게 티라노사우르스! 이건 알로사우르스! 이건 프테라노돈!”

정애는 눈썹을 으쓱했다. 무슨 애가 거북이 등딱지같이 생긴 걸 가지고 좋다고 만지작거린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가 겨우 알 것 같은 거 하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알어. 새잖여.”

날개 달린 게 딱 봐도 새다. 그러자 시우가 실망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닌데. 이건 프테라노돈!”

“돈이고 뭐고 우야둥둥 새잖여.”

“새 아닌데! 공룡! 할머니 바보!”

답답한 시우가 고사리손을 말아쥐고 가슴을 퍽퍽 때린다.


“써글! 찜 쪄 먹지도 못하는 걸 워따 쓴댜? 내 삐려!”

프테라노돈을 팩 패대기친 정애는 다섯 살 손자를 상대로 역정을 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시우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 *

종일 차를 타고 이곳저곳 병원을 옮겨 다니느라 곤했던지, 정애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티라노사우르스가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공룡 강습을 하느라 시우도 지쳐 잠이 들었다.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홀가분하게 자기 시간이 주어진 다정은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식탁 앞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치자, 그리다 만 초라한 스케치가 눈에 들어왔다.

한숨이 샌다. 직장도 안 다니고 집에만 있는데, 스케치 하나 제대로 완성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다정은 심기일전의 자세로 연필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 안에 초안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된 적이 있던가.

야밤에 식탁 위에 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몸을 떨었다. 깜짝 놀란 다정은 잽싸게 휴대폰을 낚아챘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망설이던 다정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유시우는?』

공항에서 다투고 헤어진 뒤 며칠 만에 통화를 하며 그가 대뜸 던진 첫마디였다.

다정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서운한 것 같기도 했다.


“시우…… 자요.”

부루퉁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 뒤로 잠시 침묵이 따랐다.

뒤룩 눈을 굴린 다정은 혹시 끊어졌나 싶어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화면을 보았다. 그사이 그의 목소리가 먼 울림처럼 이어졌다.


『지금 올라가.』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어딜? 아니, 왜요?”

『왜는. 너 보고 싶으니까 그러지.』

이제는 이런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리지도 않았다. 대신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다.

혹시 기다렸던가.

다정은 갑자기 부끄러운 기분이 밀려들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올라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아, 안 돼요! 오지 마요.”

『왜? 할 말 있어.』

“전화로 해요. 올라오는 건 절대 안 돼요.”

다정은 극구 만류했다. 시우만 있다면 문제 될 게 없지만, 엄마까지 있는 집에 이 남자를 들어오게 할 순 없었다.


『올라간다.』

하여간 청개구리 같다.


“안 된다고요! 조,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내가 내려갈게요.”

통보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다정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황급히 풀어헤치고 다급히 욕실 거울로 달려갔다.

* * *



“무, 무무, 무슨, 일이에요. 이, 밤에……?”

전화를 끊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차에 올라탄 여자는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헉헉거렸다.

정혁의 시큰둥한 눈길이 수상하리만치 숨이 가뿐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머리는 젖어 있고 화장기 없는 촉촉한 뺨은 붉었다. 빌어먹을. 싱그럽게도 붉었다.

그 뺨을 감싸 쥔 건 충동적이었다. 다짜고짜 입술을 밀어붙인 것 역시 그랬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움찔한 다정의 몸이 한순간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지만, 뭔가를 해 볼 겨를도 없이 달고 시원한 숨이 밀려 들어왔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다가 또 한 번 깊게 밀려 들어왔다.

질척하게 휘감기는 감촉에 한순간 머릿속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다정의 팔이 그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이 와중에도 거부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스친다.

도파민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감각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중독 같았다.

적어도 제게 순결을 빼앗겼다 주장할 거면 이렇게 잘하지나 말던가.

또 한 번 아랫입술을 쭙 물었다가 놓아준 그가 살짝 틈을 벌렸다. 혼미한 정신을 되돌리기도 전에 색스럽게 젖은 입술이 속삭였다.


“유다정.”

“…….”

“너랑 결혼하고 싶어.”

또 결혼. 발작하듯 반응해야 하는데, 다정은 그저 황홀하게 풀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싫지.”

“싫다기보다…….”

“그럼 하자, 연애. 결혼 빼고 일단 그거부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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