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예쁘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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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예쁘기도 하지
2023.02.26.
이맘때쯤 남자아이에게 아빠가 가진 의미는 특별하고 남다른 게 분명했다. 아빠가 멋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이렇게나 뿌듯해하는 걸 보면.
“진짜? 진짜 진짜 아빠 멋있어요?”
“그래, 진짜. 그러니까 어디 가서 기죽을 필요 없어.”
눈을 깜빡이던 시우가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다물다가 다시 벙긋 벌렸다.
“근데! 엄마는 아빠보다 시우가 더 잘생겼댔어요.”
정혁의 눈썹 한쪽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대화가 논점을 벗어났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건 엄마가 거짓말한 거야. 유시우 아빠가 유시우보다 잘생긴 건 명백한 사실이야.”
아들이라도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가라앉았던 시우의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돌았다.
“어, 그럼…… 시우도 커서 아빠처럼 될래요!”
해맑은 얼굴을 보는 정혁의 호흡이 조금 느려졌다.
제 아들이 말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아빠처럼 될래요, 라고.
지금 차오르는 감정이 뭔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뭉클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불현듯 어릴 적 까마득한 기억까지 소환되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구석엔 책이 가득 담긴 상자가 쌓여 있고, 한쪽 벽엔 개켜 놓은 이불이 담벼락처럼 서 있던, 아버지와 지내던 그 좁고 남루하던 단칸방의 기억이.
이부자리를 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았지만, 세상 어느 곳보다 포근하고 아늑했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어린 기억이라 가물가물해도 한 장면만은 뇌리에 선명했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끄적이며 고뇌하던 아버지의 너른 등.
봄이 오면 아버지는 볕이 좋은 날을 골라 겨우내 먼지 쌓인 책을 평상 위에 널어두는 작업을 했다.
어린 정혁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 커다란 상자를 호기롭게 끌어안지만, 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될 일이라는 건 당시에도 알았던 것 같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크게 웃었던 것 같은데, 웃는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특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건 더 커서. 지금은 이 정도만 해.’
그러곤 얄팍한 시집 한 권을 안겨 주었다.
두 손으로 시집을 꼭 움켜쥔 정혁은 무거운 상자를 번쩍 들어 내가는 아버지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며 말했다.
‘혁이가 빨리 클게.’
빨리 커서 아빠처럼 힘이 세질게.
그때 아버지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까. 그렇게 일찍 헤어질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은 말을 해 줄걸.
제 세상에 아버지가 전부였다는 말도. 혁이도 커서 아버지처럼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는 말도.
정혁은 다시 한번 울고 싶은 감정을 눌러 삼키며 시우의 연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그럴 거야. 유시우는 아빠보다 더 멋진 어른으로 클 거야.”
확신이 깃든 어조에 유시우가 방싯 웃는다. 자그마한 유치를 활짝 드러내고 웃는 모양이 예뻐서 볼록한 뺨을 꼬집으며 정혁도 웃었다.
“오늘 있었던 일 엄마한테 말하지 마.”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거짓말 아니고 비밀.”
“음…….”
입술을 감쳐물고 그게 왜 비밀이냐며 순진무구한 눈을 깜빡인다.
“엄마 알면 속상해. 엄마 속상한 거 싫어.”
“어…… 엄마 속상하면, 시우도 싫은데. 그러면 시우도 속상하고…….”
“그래, 그러니까 비밀로 해.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유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반 토막도 되지 않는 작은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에 어설프게 감겨 왔다.
정혁은 허탈한 실소를 지었다. 유치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일. 이딴 건 유다정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이제 먹어.”
앞접시에 덜어놓은 피자를 눈짓하자 앙증맞은 두 손이 제 얼굴만큼 큰 피자를 쥐고 끄트머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엄지를 뻗어 오물대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문지르며 웃었더니, 뺨이 볼록해진 유시우도 배시시 웃는다.
씩씩해서 좋았다. 다행이다. 타고난 천성이 제 엄마라서.
* * *
불그스름한 적외선 램프 아래 비친 정애의 표정이 노곤했다. 곁을 지키던 다정은 엄마의 몸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침을 보며 여과 없이 한숨을 토했다.
“엄마, 제발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멀쩡한 자식 두고 아픈 걸 왜 참고 있어.”
“아, 개안타 안 혀!”
통증이 조금 나아졌는지, 편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정애는 역정을 부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잖아.”
“거시기 엑쑤렌지 뭔지 다 찍었는디, 여긴 뭐 땀시 온 겨.”
“당장 아플 땐 침이 좋다고 몇 번을 말해?”
“하여간 돈이 썩어 나지.”
애틋한 모녀의 정을 확인한 지가 언제라고 침을 맞는 내내 모녀는 계속 투덕거렸다.
치료를 마치고 나온 정애는 한결 상태가 나아져 있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하더니, 침을 맞고 나자 걷는 게 제법 수월해 보였다.
“터미널에 내려다 주고 니는 가 보거라.”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정애가 대뜸 말했다. 다정은 기가 찼다.
“계속 병원 다녀야 하는데, 터미널은 무슨 터미널.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고추밭에 나가봐야 허는디…….”
이 와중에 고추밭 타령이다. 정애의 근심 어린 탄식을 듣자니, 다정은 복장이 터졌다. 한풀 누그러졌던 성미가 발동했다.
“몸이 이 지경이 돼서 무슨 고추 타령이야. 제발 고집 좀 그만 부려! 엄마가 이러면 내가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망할 년. 니 땜시 내 속은 문드러졌니라!”
병원을 두 군데나 들를 동안 고분고분 따라오면서도 정애는 한 마디도 지질 않았다.
차내 공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한동안 차창을 내다보던 정애가 갑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약은 언제 주는 겨?”
무겁게 정면을 응시하던 다정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관절에 좋은 약을 한 재 지었는데, 벌써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내일 집으로 보내 주기로 했어.”
시큰둥한 정애를 힐끔거리던 다정이 몸을 기울여 어깨를 퉁 부딪쳤다.
“엄마. 딸이 병원도 데리고 오고 보약도 지어 주니까 되게 좋지?”
애교스러운 물음에 정애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피 소리를 냈다. 좋은 티를 애써 감추는 정애를 보며 다정은 소리 없이 입가만 씰룩여 웃었다.
* * *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빠빠이!”
“유시우도 잘 있어.”
시우에게 인사를 한 뒤 정혁은 카페 앞으로 마중을 나온 솔이와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차에 오르자 냉큼 뒤따라 조수석에 올라탄 민 실장이 뒷자리로 테블릿 PC를 내밀었다.
“말씀하신 겁니다.”
테블릿 PC를 받아든 정혁은 정리된 내용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그사이 민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영신모직은 명한 어패럴에 원단 납품과 하도급 생산을 17년째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비중이 작았는데, 지금은 명한 쪽 일이 전체 경영 비중의 80%나 됩니다.”
한마디로 명한이 먹여 살린다는 소리다. 고개를 갸웃한 정혁이 의문을 제기했다.
“제작 단가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뭐가 남지?”
“그냥 유지만 하는 수준입니다. 안 그래도 단가 문제로 중국이나 동남아 쪽 OEM으로 돌리자는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인데, 회장님께서 그대로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정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 만했다.
박 회장은 사업적으로 신의가 두터운 데다가, 국내 기업과의 상생을 중요시했다. 그러니 굴지의 기업 총수들이 노인 앞에서 절절매는 걸 테다.
푸름건설과 하나테크도 다르지 않았다. 뒤져 보면 어떤 식으로든 명한과 연결고리가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민 실장이 조심스레 결단을 촉구했다. 차 전무가 ‘집구석들’에 대해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린 순간 어떻게든 응징이 있을 거라 예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몰상식한 여자들이 아이를 몰아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차 전무의 얼굴을 봤을 때 뒷덜미가 다 서늘했었다.
“글쎄, 어떡할까. 내가 이렇게 치사한 사람은 아닌데, 내 아들 일이다 보니 기분이 뭐랄까…….”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떠올리자,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그가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하자 민 실장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 말씀이십니까?”
“맞네. 그거네.”
정혁이 명쾌하다는 듯 민 실장과 눈을 맞췄다.
“민 실장님. 요즘 마음에 쏙 들어요.”
제 기분을 한마디로 정리한 게 만족스러워 내뱉는 공대와 칭찬에 민 실장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도 아이가 있는데, 왜 모르겠습니까.”
팔꿈치를 세운 정혁은 관자놀이를 괴고 고심했다.
“따끔히 경고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공사 구분 못 하고 아줌마들을 직접 상대하는 건 좀 모양 빠지잖아. 안 그래요?”
“그럼 어떻게……?”
“적임자가 있긴 한데…….”
관자놀이를 짚고 지그시 내리깔았던 눈길이 올라섰다.
“오늘 일, 윤 비서한테 넌지시 좀 흘려 보죠. 노인네 귀에 들어가게.”
* * *
“어린이 여러분! 이번 시간은 축구 교실 시간이에요. 각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혼자 갈아입기 힘든 친구들은 선생님한테 도와달라고 말해 주세요.”
“네에!”
아이들이 씩씩하게 합창하며 각자의 캐비닛으로 달려갔다.
시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뭐든 혼자서도 잘하는 시우지만, 아직 단추를 채우고 끄르는 게 어설퍼 경준이나 수원이 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체육복 티셔츠를 머리에 끼워 넣는데, 친구들이 먼저 교실을 뛰쳐나갔다. 다급해진 시우는 티셔츠에 팔을 다 끼워 넣다 말고 후딱 친구들을 뒤쫓았다.
“기다려어!”
소리치며 와다다 달려 나가던 시우의 두 다리가 갑자기 복도 중간에서 끼익 멈춰 섰다.
시우는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머리가 백발인 할머니가 저를 빤히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던 시우는 처음 보는 할머니를 향해 냉큼 허리부터 숙였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인사에 노인의 웃음 어린 눈가 주름이 더 짙어졌다.
“아가, 할미가 다리가 아파 그런데, 저기까지 데려다주련?”
느리게 손을 뻗은 노인이 복도 끝에 있는 벤치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시우의 천진한 눈이 큼지막한 보석 반지가 끼워진 노인의 손으로 향했다. 나이에 비해 곱고 새하얀 손은 반짝이는 보석과 무척 잘 어울렸다.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현관 쪽으로 눈길을 돌린 시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어…… 네. 할머니.”
고운 손을 맞쥔 시우는 조심조심 노인을 부축했다.
다섯 살 꼬마가 무슨 부축을 하겠냐 마는, 어린 게 인사성도 밝고 공경심도 그득해서는 하는 행실이 기특하고 어여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할머니. 그러면…… 안녕히 계세요.”
노인을 벤치에 앉혀 준 시우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노인이 돌아서는 시우를 붙잡았다.
“아가, 뭐가 그리 급해. 이리 좀 앉아 보련?”
보석 반지가 끼워진 손이 벤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입술을 물고 오물거리던 시우는 또 망설였지만, 어쩌지 못하고 노인의 옆자리에 폴짝 엉덩이를 걸쳤다.
“아가, 이름이 뭐니?”
“유시우! 입니다.”
시우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예쁘기도 하지.”
인자한 미소를 띤 박 회장은 다시 한번 시우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서류로 이미 확인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영락없을 제 집안 핏줄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뾰족한 인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지만, 좀처럼 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겨우 울분을 삼킨 현아는 억지 미소를 띤 채 나아갔다.
“어머, 할머니!”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박 회장의 눈길이 움직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내린 박 회장은 무심히 대꾸했다.
“그냥 어린 것들 구경 좀 했다.”
찰나 현아의 사나운 눈길이 시우의 말간 얼굴로 날아들었다.
어린 것들 구경이 아니라 증손자를 보러 온 거겠지.
“아가, 그만 가 보련.”
시우의 등을 떠밀며 박 회장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벤치를 폴짝 내려온 시우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운동장을 향해 달려갔다.
“할머니, 오실 거면 오신다고 말씀이나 하시지 그러셨어요. 놀랐잖아요.”
현아가 애교스럽게 주의를 끌지만, 박 회장의 눈길은 아이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박 회장이 눈길을 돌렸다. 언제 인자하게 굴었냐는 양 노인의 눈매가 매섭게 날을 세웠다.
“주제 파악부터 시킬 테니, 불러라.”
“불러요? 누굴요……?”
* * *
원장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가 무거웠다.
철썩! 매서운 마찰음이 울림과 동시에 현아는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뺨을 감싸 쥔 영신모직 며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의 사나운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간 뺨이 화끈거리는 열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할 틈도 없이 두 번의 마찰음이 이어졌다.
짜악! 또 짜악!
푸름건설 딸과 하나테크 사모의 눈앞에도 연달아 불이 번쩍 튀어 올랐다.
살벌한 마찰음이 울릴 때마다 눈을 질끈 감은 현아의 어깨가 흠칫흠칫 들썩였다.
연이어 세 번이나 뺨을 후려치면서도 작고 빼빼 마른 노인은 거친 숨소리 한번 내뱉지 않았다.
“이런 천박하고 상스러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