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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엄마만 몰라 (59/114)


59화 엄마만 몰라
2023.02.23.



“도착했습니다.”

민 실장의 말에 지그시 감겼던 정혁의 눈꺼풀이 올라섰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그는 잠시 차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누구 담배 가진 거 있나.”

무료한 목소리였다.


“담배…… 아.”

무의식중에 민 실장이 가슴팍과 주머니를 더듬지만, 비흡연자에게 담배가 있을 리 없다.

그 와중에 뜬금없다는 생각은 든다. 지금껏 차 전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모름지기 유능한 비서란 ‘NO’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전무님이 찾으시니 방법을 고심하던 그의 눈이 쪼르르 운전석으로 향한다.

수행 비서인 김 비서가 대기 중에 종종 외부에서 담배를 피우던 걸 목격한 적이 있었다.

뻔히 아는데 시침을 떼고 앉았기에 김 비서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빨리 내놓으라 눈짓하자 김 비서가 죽상을 짓는다.

운전이 일인 남자는 냄새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법인데, 아랑곳없이 흡연 사실을 발설한 민 실장이 원망스러웠다.


“전무님, 여기 있습니다.”

담배 한 개비가 뒷자리로 전해졌다. 그걸 받아들고 차에서 내린 정혁은 차 문에 기대어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물었다.

냉큼 뒤따라 내린 민 실장이 라이터 불을 칙칙 켜서 내밀자 차 전무가 팍 인상을 구긴다.


“미쳤어요?”

“네?”

“유치원이잖아.”

정혁은 이곳이 제 아들이 있는 유치원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걸 아는 사람이 담배를 찾나. 민 실장은 멋쩍게 코를 훌쩍하곤 라이터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필터가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그냥 기분만 내려는 거다. 이거라도 안 하면 속이 잿더미가 되어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아서.

폐암으로 죽은 아들처럼 손자도 제 명을 다하지 못할까 봐 박 회장이 질색을 했다.

그래서 어려 잠시 습관을 들였던 걸 완전히 끊은 게 5년 전이었다.

실제로 마지막으로 피웠던 담배가 유다정이 사라졌던 그 아침의 한 개비라는 것까지 기억했다.

그딴 여자 때문에 몇 달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고, 허무하게 피워올리는 매캐한 한숨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증명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 뒤론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5년 만에 담배 생각이 나게 하는 걸 보면 역시 유다정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정혁은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럴 줄 몰랐지. 저 같은 남자가 청혼하는데 거절할 리 없잖아.

그 교만과 자만이 유다정의 신념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또 패배감을 안겨 준다 이거지. 나쁜 여자. 잠도 자고 애도 낳아 놓고 결혼은 안 해?


“하, 참…….”

으깨진 필터 틈으로 못마땅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여자가 어쩌지 못하고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유시우를 데려간다. 그 한마디면 되는데…….

근데 그러기 싫었다. 멍청한 나무꾼 새끼처럼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으니까.


 

* * *

정혁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들이 나올 시간이었다.

시우를 픽업하러 가야 한다는 솔이의 말에 마땅히 제 일인 것처럼 유치원으로 달려왔다.

입에 문 담배를 잡아 빼자 입술 점막에 들러붙어 있던 필터가 쩍 기분 나쁜 감촉을 남기고 떨어졌다.

왁자지껄한 새끼 짐승들이 내지르는 괴성을 들으며 저벅저벅 계단을 올랐다.


“하늘나라!”

마지막 한 계단을 남겨놓고 있을 때 그의 귀에 동심의 언어가 들려왔다.

우뚝 멈춰 시선을 들자 저 멀리 밤톨 같은 뒤통수가 보였다. 절 닮아 그런가, 뒤통수도 잘생겼다.

입가를 부드럽게 늘이며 마저 남은 계단을 오르려는데, 뒤섞여 흘러나오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다시 발끝이 멈춰 섰다.


“얘! 그게 아빠 없는 거야.”

해괴한 말이 들려왔다. 정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아니, 애 엄마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미혼모 자식이라고 소문 다 났는데, 웃겨 증말.”

정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길이 마녀들에게 에워싸여 겁을 먹은 강아지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아이의 처량한 등으로 향했다.


“여름 방학 끝나면 안 볼 줄 알았더니, 참 끈질겨. 애초에 우리 같은 상류층하고 어울릴 수준이 아니라는 걸 통 모르네.”

“평민 주제에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굴러들어와서는 물을 흐리는지. 나 참.”

멀쩡하던 담배가 긴 손가락 틈에서 파삭 부러져 반토막이 날 때까지 마녀들의 개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들을 귀에 담으며 정혁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내밀고 나아갔다. 우뚝 멈춰 대각선 아래로 무심한 눈길을 내렸다. 동그랗고 자그마한 정수리가 시무룩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덮자 옷자락을 쥐고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젖혔다.

눈이 마주쳐서 정혁은 엷게 웃었다. 평소라면 저도 방긋 웃어 주며 안녕하세요! 하고 씩씩하게 인사했을 아이다.

그런데 기분이 영 꽝인지, 가엽게 일렁이는 커다란 눈은 다시 운동화 발로 쪼르르 떨어지고 만다.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의 등장에 여자들의 입이 합 다물렸다.

방금 아이 하나를 에워싸고 마녀처럼 굴던 여자들이 맞나 싶을 만큼 태세를 전환한 여자들의 입가에 상냥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여자들은 저들끼리 옥신각신이었다. 결국 옆구리를 찔린 영신모직 며느리가 나섰다.


“어머나, 세상에! 혹시 명한그룹 박 회장님…….”

“맞아요. 금쪽같은 손자.”

대꾸가 녹음기처럼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눈길은 여전히 시무룩한 정수리를 향한 채였다. 신경 쓰이는 건 오직 이 아이의 기분뿐이라는 듯.

여자의 입가에 작위적인 미소가 한껏 그려졌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오 원장님하고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도…….”

“그건 틀렸고.”

“아…….”

어리둥절하던 여자들은 뭔가 있겠거니 눈알만 굴리고 더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이쪽은 푸름건설 따님이시고 이쪽은 하나테크 사모님이세요. 그리고 영신모직 안 회장님이 우리 예림이 할아버지시고요.”

마녀1이 뭐라도 되는 양 자신의 딸 예림이를 앞세웠다. 새침한 여자아이에게 슬쩍 눈길을 준 정혁이 고개를 들어 마녀1의 얼굴을 보았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가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민 실장이 냉큼 바투 다가선다.


“뭐 하는 집구석들이에요?”

순수하고 정직한 질문에 민 실장은 잠시 여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그의 귀에 몇 마디를 소곤거리고 떨어졌다.

정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라며, 말꼬리를 늘이던 그의 시선이 영신모직 며느리에게 향했다.


“원단장사 하는 집구석에.”

태평한 눈길이 이번엔 푸름건설 딸에게로 옮겨갔다.


“거긴 노가다.”

연이어 흘러간 눈길이 멈춰 선 곳은 하나테크 사모의 얼굴이었다.


“그 집구석은 오락실…… 이라는 건데.”

단순하게 정의를 내리자, 당황을 감추지 못하던 영신모직 며느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집구석들인가 하고.”

저급한 표현에 여자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식피식 조소를 흘리는 그의 눈길이 마녀들의 얼굴을 무심하게 훑다가 여자들이 앞세운 꼬마 셋을 연달아 훑었다.


“얘네 아빠들은 전세기 있어요? 세계 10대 도시에 빌딩 한 채씩은 가지고 있으려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여자들은 눈만 깜빡였다.


“아, 그건 너무 분수에 안 맞나? 그럼 몰타에 요트 한 척씩은 갖고 있고?”

정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도 없어요? 그럼 레이크 루이스에 별장 정도는 있겠지. 설마 그것도 없으려고.”

여자들의 반응을 주시하던 그의 커다란 손이 시무룩하게 떨군 시우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얘네 아빤 그거 다 있어. 어때? 쨉도 안 되지?”

당황한 여자들의 눈이 아이에게 옮겨갔다.


“아니, 있는 척들 하길래 나도 해 봤지.”

“네?”

여자가 반문했지만, 정혁은 무시하고 시우를 팔에 안았다. 새 부리 같은 자그마한 입이 ‘나 울적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친놈. 이 와중에도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눈썹을 덮은 연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마가 드러나자 아이라도 훤한 인물이 빛이 났다.

나 좀 보란 듯이 빤히 쳐다보자 시우의 눈길이 올라섰다. 눈이 마주쳐서 웃었더니, 작은 팔이 목덜미를 끌어안고 팩 토라지듯 고개를 묻는다.

작은 심장이 빠르게 콩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혁은 힘 빠진 뒤통수를 가만히 감싸고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하듯이.

박 회장의 금쪽같은 손자가 아빠 없는 아이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안는다.

친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의 연관성을 짐작하지 못한 여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빛만 교환했다.

낮은 어조가 말했다.


“민 실장.”

“네, 전무님.”

정혁이 여자들의 얼굴을 뜯어보듯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여기 있는 집구석들 조사해서 보고하세요. 특히, 내 집구석하고 관계된 건 더 면밀하게.”

“알겠습니다.”

이쯤 되자 여자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뭔가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렸다는 걸.

이번에도 등이 떠밀린 사람은 영신모직 며느리였다.


“저기, 전무님. 저희가 언짢게 해 드린 거라도…….”

돌아서던 정혁의 발끝이 원위치했다.


“말귀를 통 못 알아먹네. 돌대가리들만 모였나.”

중얼중얼 씹어 뱉는 그의 눈길이 여자들의 얼굴을 사납게 훑었다.


“당신네 자식들 얘 발끝도 못 미칠 천민 새끼들이라고.”

 

* * *



“어머, 꼬마야 너 너무 귀엽다.”

피자를 내려놓던 여종업원이 녹아내리는 눈으로 하트를 발사했다. 자주 듣는 얘기에도 매번 부끄러워하던 시우는 오늘따라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시우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팔꿈치를 접어 관자놀이를 괸 정혁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시우.”

“어…… 네에.”

휙 돌아본 눈이 시무룩했다. 긴 손가락이 퉁퉁 부은 뺨을 톡 건드렸다.


“코 빠트리고 있을 거 없어. 네가 인생 짧아서 그렇지,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 아저씨, 있잖아요…….”

운을 떼고 한참을 망설이던 시우가 오물거리던 입술을 열었다.


“시우는, 시우는 아빠 있어요!”

그 사실을 끝내 관철시키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먹빛으로 일렁이는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보자 이상한 감정이 울컥 치받았다.

왜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막막해하는 동안 작은 입이 쉬지 않고 또박또박 강조해 말했다.


“시우! 아빠 있는데, 어…… 예림이네 엄마가.”

“알아. 유시우 아빠 있어.”

정혁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 등으로 시우의 뺨을 문질렀다.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지, 일렁이는 눈동자에 대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천진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저씨 아빠 알아요?”

“알아.”

선선히 대답하자 신기하다는 듯이 보던 눈이 더 커다래진다.


“어, 진짜요?”

“진짜.”

“아빠…… 멋있어요?”

“글쎄, 그건 엄마한테 물어보는 게 정확할걸.”

“어…… 엄마는, 엄마는 아빠 되게 멋있댔는데. 근데 시우는 몰라서…… 한 번도 못 봤어요.”

반짝 생기가 도는 것 같더니, 또 시무룩하게 입이 나온다.

저라는 존재가 있으니, 분명 아빠도 있을 텐데, 사진 한 장 본 적이 없으니 혼란할 만도 했다.

정혁은 무거운 한숨을 몇 번 끊어 뱉은 뒤 입을 열었다.


“엄마 말이 맞을 거야. 유시우 아빠는, 뭐랄까. 일단 완벽해.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어. 키도 크고 잘생겨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엄청났다니까. 다들 수작을 못 부려 안달이었는데, 유시우 아빠는 용맹하게 다 물리쳤어.”

자아도취가 심각하더니 갑자기 길게 한숨을 쉰다.


“한마디로 땡잡은 건데, 그걸 네 엄마만 몰라.”

정혁은 새삼 무력한 기분을 느끼며 아들 앞에서 주절주절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눈길을 돌렸을 때 유시우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뒷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그시 눈을 맞추고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암튼 엄청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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