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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시우는 아빠 있어 (58/114)


58화 시우는 아빠 있어
2023.02.19.


차정혁의 삶은 순탄했다. 딱히 즐겁진 않았지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기에 고달픈 것 또한 없었다.

모른 척하려 했다. 욕심이 났지만,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그편이 모두에게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유시우. 그 아이만큼은 평범하게 웃고 즐거워하며 사랑이 많은 아이로 자라길 바랐으니까.

물론 그것들을 포기하면 물질적으로 많은 걸 누릴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정혁의 계산법으론 타산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감추려고 했다. 유시우가 자신처럼 도구나 인형으로 살아가며 버거운 책임을 짊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그런데 제 마음을 저도 어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유다정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들어가서 고집 센 울보에 바보 같은 여자를 꼭 안아 줄 거다.

그로 인해 더 비좁아진 울타리 안에서 유시우는 반쪽이 아닌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게 될 테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원하는 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세상 모든 귀한 것들은 허락될지언정, 모순되게도 그 소박한 꿈 하나만큼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손자의 사사로운 행복 따위를 유념하기에 박 회장의 가치는 더 크고 원대한 것들로 채워져 있으니까.

명한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손자의 결혼은 더 쓸모 있고 가치 있게 이용되어야만 했다.

자신의 기준에 하잘것없는 여자에게 그 기회를 무용하게 날려 버릴 박 회장이 아니었다.

현아와의 파혼을 선언한 순간 시련은 예견되어 있었다. 박 회장을 포기시키려면 뭐가 필요할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결혼이었다.

감히 누가 제 법적 아내와 아이에게 손을 댈까. 제아무리 박 회장이라도. 그래서 결혼이 시급했다.

그런데 뭐?


“비…….”

단어 하나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자 솔이가 확인 사살을 한다.


“비혼주의요. 비혼 몰라요? 결혼 안 한다고요. 평생 혼자 늙어 죽는 게 걔 소원이에요.”

길게 한숨을 내쉰 솔이가 턱을 괴고 푸념을 이었다.


“이해해요. 기집애가 꽉 막혀서 답답한 구석이 있긴 하죠.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자기 신념을 주절주절 떠벌리는 게 구질구질하다나 뭐라나.”

정혁은 여전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앞뒤가 들어맞질 않는다.


“비혼주의자가 아이를…….”

“비혼주의니까 아이만 낳죠.”

“분명 권도준하고 결혼한다고…….”

“그건 시우 아버님 떼어 놓으려고 연극 한 거예요. 물론 도준 오빠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지만요.”

정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린 것 같은 얼굴로 고심했다.

모든 문제는 늘 예상 가능한 범주에 있었다. 그런데 유다정은 언제나 그 예상을 뛰어넘었다.

얼이 나간 그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던 솔이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번졌다.


“난 시우 아버님 편이에요. 파이팅.”

 

 

* * *

천천히 좁은 길목을 빠져나간 차는 로터리 구조의 느티나무 옆 공터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끈 다정의 눈길이 저 멀리 파란 대문 집으로 향하다가 느티나무 아래로 움직였다.

평상 위에서 소일거리를 하던 아주머니들이 목을 빼고 낯선 외지 차량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차에서 내린 다정은 걸음을 빨리해 느티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안녕들 하셨어요.”

허리 굽혀 인사하자 하나같이 엇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아주머니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잉? 대추나무집 딸내미 아녀?”

정작 집엔 대추나무가 없었지만, 지붕 색깔이 대추색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다정을 대추나무집 딸이라고 불렀다.


“그려, 맞네! 맞어. 대추나무집 딸. 다정이 아녀.”

평상 아래로 내려선 아주머니 두엇이 다정의 손을 잡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건강하셨죠?”

“그려. 엄니 보러 온 겨?”

“네, 엄마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적당히 웃음을 띤 채 다시 허리를 꾸뻑 숙이는데, 손등을 도닥이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워쩌까나. 그려, 인자 갠차는 겨?”

“네? 뭐가……?”

다정이 어리둥절해 반문하자 아주머니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녀, 얼른 엄니나 들여다봐.”

“네. 그럼 수고하세요.”

눈빛을 주고받는 아주머니들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지만, 다정은 더 묻지 않고 익숙한 양 고추밭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좌우로 늘어선 고추나무에 실한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 위로는 잘 여문 고추처럼 빨갛게 물든 고추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다정은 살금살금 풀밭을 헤집고 나아갔다. 사람 손이 닿지 않아 방치된 고랑마다 잡초가 무성했다.

일손도 부족한데 정애가 허리 병까지 도졌으니, 억센 것들이 이때다 싶어 뿌리를 내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추밭을 질러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진 녹슨 철제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저만치 대청마루에 누워 있는 정애의 뒷모습이 보였다.

에어컨도 없는 집에 선풍기 바람이라도 쐴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딱딱한 바닥에 드러누운 꼴을 보자 또 속이 뒤집혔다.


“엄마!”

냉큼 달려 마루에 걸터앉은 다정이 정애의 초라한 어깨를 쓸어내렸다.


“엄마 나 왔어. 얼마나 안 좋은 거야? 많이 아파요?”

끙 앓는 소리를 낸 정애가 간신히 몸을 돌려 눕히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워쩌케 온 겨?”

“엄마 걷지도 못한다고 단비슈퍼 아줌마가 솔이 엄마한테 전화했대.”

“망할 여편네. 주둥이를 확.”

“이러고 있지 말고 나랑 병원부터 가.”

“갠차녀. 바쁜데 뭐 하러.”

통증이 심한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정애는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다정은 울화가 치밀었다.


“나 하나도 안 바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을 안 해? 엄마가 이러면 나 욕 먹이는 거밖에 더 돼?”

마음과 달리 원망의 말이 쏟아졌다. 이러다가 또 싸움으로 번질 걸 알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 정애는 평소와 달랐다. 한바탕 대거리를 쏟아도 시원찮을 상황에 정애는 딸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힘겨운 숨만 쌕쌕 고르고 있었다.

그때 주름진 눈시울에서 불현듯 큼직한 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 장면에 다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고 말았다.

정애가 울고 있었다. 쇠심줄처럼 질기고 강하다 믿었던 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평생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이라 어안이 벙벙한 동시에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이럴까 싶어 다정은 애가 타들어 갔다.


“엄마, 많이 안 좋아요? 119라도 부를까?”

“흡.”

조용히 눈물을 떨구던 정애가 울음까지 토했을 때 다정은 가만히 호흡을 멎어 버렸다.

한참을 흐느끼던 정애가 불쑥 역정을 쏟아 냈다.


“이것아 왜 말을 안 혀써!”

“……뭐, 뭘?”

“남식이 그 쳐 죽일 노옴!”

응축된 것들이 터져 나오듯 울분 어린 고함이 내질러졌다. 다정은 하얗게 기가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어, 엄마가 어떻게.”

“니 어릴 때부터 그랬다믄서!”

“…….”

다정은 그제야 느티나무 아래 모여있던 아주머니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우 할머니 좀 들여다보라며 전화를 주었던 숙희가 하려다 만 말도 같은 내용이었을 거다.

남식이가 제 누이한테 몹쓸 짓을 해서 쇠고랑을 찼다더라.

서남식과 어릴 때부터 마을 친구로 지내던 누군가가 그의 상황을 알고 고향 집에 있는 부모에게 말을 옮겼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이 작은 시골 마을을 삽시간에 뒤덮었다.

한동안 저들끼리 뒤에서 수군대는 얘기를 정애만 알지 못했다. 엊그제야 비로소 그 일을 알았을 때 정애는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일을 당혀 노쿠 왜 애미한테 말을 안 혀어! 애미를 바보 맹추로 맹그니까 조은 겨?”

정애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지난 세월이 이렇게 무상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 모진 세월을 견뎠나. 저 하나 참고 견디면 어미로서 할 도리는 다하는 거라고 믿었다.

모든 게 다 자신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그런 어미가 어떻게 자식을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구도 원한 적 없는 일방적 희생으로 딸애에게 마음의 짐을 강요해 놓고 뻔뻔하게 보상을 바랐다.

어미가 뿌듯해할 삶. 그렇게 살아 보답하기만을 바랐지, 정작 딸애의 상처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식한 어미가 너무 고단하고 힘들어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 긴 세월 무심했던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비통하고 또 비통해서 가슴이 미어졌다.


“내 새끼 불쌍해서 워쩌. 내가 죽어야지이! 애미라는 년이 새끼가 무슨 짓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이 죽일 녀어언!”

오열하는 정애를 막막하게 바라보며 다정은 소리 없이 눈물만 떨구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손톱이 다 닳아빠진 정애의 무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을 듯이 할퀴었다. 다정은 더 견디지 못하고 정애의 손목을 잡아 멈추었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엄마 이럴까 봐! 엄마 가슴 찢어질까 봐아! 엄마 죽을까 봐! 그래서 말 못 해써어엉!”

“아이고 내새끼이이!”

가여운 딸을 힘껏 부둥켜안은 정애의 오열이 더욱 거세졌다.


“엄마아 울지 마아! 내가 미안해에엥! 내가 다 잘못해써엉!”

모녀의 서러운 눈물 바람이 한적한 시골 마을을 뒤덮었다.

* * *

준비 땅!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뛰쳐나왔다.

친구들과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는 양 시우는 힘차게 복도를 내달렸다. 현관을 박차고 나왔을 때 한껏 신이 난 목소리가 소리쳤다.


“경준아, 안녕! 수원이도 안녕! 내일 또 만나!”

앗! 손을 흔들며 뒷걸음치던 시우가 누군가와 충돌했다. 꿍 엉덩방아를 찧고 돌아보자 새침데기 예림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어…… 예림아.”

시우는 냉큼 예림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예림이는 씩씩한 어린이. 씩씩한 어린이는 넘어져도 안 우는 거야.”

친구를 달래 준 시우가 고개를 숙여 예림이의 무릎에 호를 해 줬다. 울긋불긋 얼굴이 벌게진 예림이가 그런 시우를 퍽 밀어 넘어뜨렸다.


“저리 가! 우리 엄마가 아빠 없는 애랑 놀지 말랬단 말이야!”

“…….”

주저앉은 시우는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빠 없는 애.

다섯 살 머리로도 지금 상황에 맥락을 크게 벗어난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시우는 다시금 씩씩하게 일어나 흙먼지가 묻은 엉덩이를 털었다.


“아닌데. 예림아. 시우 아빠 있는데!”

또박또박 말해 주었지만 정작 예림이는 관심 없다는 듯 뺨만 씰룩였다. 그때 누군가가 시우의 어깨를 사납게 잡아챘다.


“얘! 너 우리 예림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깐깐한 인상에 목소리가 앙칼진 여자는 예림이의 엄마, 그러니까 영신모직의 며느리였다.


“예림아 괜찮아?”

제 딸의 뺨을 감싸고 다독이던 예림 엄마가 시우를 팩 노려보았다. 예의 바른 시우는 꾸뻑 배꼽 인사를 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해. 저리 가.”

예림 엄마가 가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 어리둥절했지만, 시우는 다시 한번 예림이를 보았다.


“있잖아. 예림아. 근데…… 시우는 아빠 있어.”

그 말을 다시 해 주고 싶었다. 예림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얘. 그래서 네 아빠 어딨는데?”

예림 엄마이자 영신모직 며느리가 불쑥 끼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놀리듯이 던지는 한마디에 눈을 깜빡이던 시우의 입이 짹 벌어졌다.


“하늘나라!”

시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빠도 아빠니까 시우는 아빠가 있었다.


“얘! 그게 아빠 없는 거야.”

어느새 합세한 하나테크 사모가 쏘아붙였다.


“아니, 애 엄마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미혼모 자식이라고 소문 다 났는데, 웃겨 증말.”

푸름건설 딸도 거들었다.


“여름 방학 끝나면 안 볼 줄 알았더니, 참 끈질겨. 애초에 우리 같은 상류층하고 어울릴 수준이 아니라는 걸 통 모르네.”

영신모직 며느리가 빠지면 서운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평민 주제에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굴러들어와서는 물을 흐리는지. 나 참.”

 

 
시우는 혼란스러운 듯 입술을 감쳐물었다.

키 큰 어른들이 아이를 에워싸고 보여 주는 행태와 상황이 정확히 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옷자락을 쥐고 꼼지락거리던 시우가 멋쩍은 눈길을 이리저리 돌렸다.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아직인 모양이다.

상처받은 무구한 눈동자는 결국 갈 곳을 잃고 작은 운동화 발로 떨어졌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운동화 발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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