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 애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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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그 애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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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그 애는 안 돼
2023.02.16.
난데없이 들이닥친 여자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니들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럴 리가요. 오현아 원장님이신 거 잘 압니다.”
정작 본인이 원하는 대답은 차정혁 전무의 약혼 예정자, 혹은 결혼 상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응대하는 비서진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재벌가의 결합이 무산되었으니,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라.」라는 발 빠른 지시가 내려온 지 수 일째였다.
퍽! 돌발적으로 날아든 명품 핸드백이 데스크를 내리쳤다.
“니들 거짓말이면 다 가만 안 둬!”
여자의 사나운 협박에 비서진들은 긴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해십니다. 전무님께서는 휴가 중이신 게 맞습니다. 돌아오시면 다녀가셨다는 말씀 전하겠습니다.”
침착하게 응대하는 비서들을 하나하나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뒤 현아는 시근대는 발길을 돌려세웠다.
졸지에 약혼자의 행방조차 모르는 우스운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 비웃음이 도도한 구둣발을 옭아매듯 따라붙었다.
현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치욕스러움에 눈가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분기가 솟구쳐 호흡은 가빴다.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한 정혁이 휴가를 핑계로 돌연 잠적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수수방관만 하는 박 회장이 원망스러웠다.
선영은 또 어떻고. 결혼이 깨지면 죽어 버리겠다며 협박까지 했지만, 선영조차도 당장은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우리 제수씨 아냐?”
별안간 울리는 목소리가 현아의 성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능글거리는 말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길도 주지 않고 가던 걸음을 마저 옮긴 현아는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고서야 침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그동안 너 보고 싶어서 오빠 죽는 줄 알았어.”
개 버릇 남 못 준다.
명한유통 지승훈 상무.
여직원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은 지가 언제라고 이렇게 얼굴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보통 뻔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또 다른 여직원과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나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더랬다.
온갖 지저분한 추문의 중심에 서 있는 스캔들 제조기. 치마만 둘렀다 하면 치근대고 보는 변태 호색한.
현아에게 지승훈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긴 웬일이야? 혹시 차 전무 만나러 왔어? 차 전무 휴가 갔는데 몰라?”
자존심이 상해 현아는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노려보았다. 안 들어도 짐작된다는 듯 승훈이 피식피식 실소를 흘렸다.
“우리 현아 많이 컸네. 약혼녀 버리고 혼자 휴가 간 놈을 다 봐주고. 옛날에 나한테도 좀 그래 보지 그랬어? 나한텐 그렇게 독하게 굴더니만, 칫.”
승훈이 예전 이야기를 넌지시 들추자 현아가 발작하듯 반응했다.
“미쳤어?! 여기 회사야! 옛날 얘긴 왜 꺼내?!”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승훈의 입매가 샐쭉하게 비틀렸다.
“아아, 섭섭하네. 좋은 정보 좀 주려고 했는데, 이러면 나도 말해 주기 싫은데.”
“뭐? 좋은 정보……?”
솔깃한 현아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 * *
넓은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 앞으로 울타리처럼 드리워진 대형 열대 수목이 울창한 숲을 방불케 했다.
흩어진 햇살의 파편들이 고풍스러운 가구와 바닥을 물들여 한층 고즈넉한 느낌을 더했다.
귀에 붙인 휴대폰에서 쉴 새 없이 말이 연결되었다. 그다지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응, 몰라, 봐서 등. 간헐적으로 대꾸 정도는 하고 있지만, 거의 감기다시피 한 눈꺼풀은 통화에 전혀 전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종종 눈꺼풀이 밀려 올라갈 때면 눈길은 대각선 자리로 향했다. 박 회장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경제 잡지의 한 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혁은 다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벌써 수분째. 수다쟁이 민 실장이 슬슬 귀찮아지려고 했다. 고작 나흘 휴가에 보고할 내용이 끊이질 않았다.
일방적이고 지루한 수다를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나, 슬슬 귀찮은 내색을 해 볼까 생각하던 차에 현아의 이름이 들려왔다.
“졸려, 끊어.”
나른한 투로 자른 그는 미련 없이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전무실 쓰레기통을 교체했다는 보고보다 더 하찮은 사안이므로.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고 팔을 접어 관자놀이를 괴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눈길은 시침을 뚝 떼고 있는 노인을 주시했다.
유다정과 공항에서 대판 싸우고 결판도 내지 못한 채 레지던스로 돌아와 봤더니, 노인의 하수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바로 잡아들이지 않은 걸 보면 일을 시끄럽게 만들긴 싫었나 보다.
집요한 눈길이 들러붙자 잡지에 꽂혀 있던 박 회장의 시선이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인자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래, 여행 가서 잘 쉬었고?”
“할머니.”
“오냐.”
박 회장의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어여뻐하는 손주를 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졸개들을 보내 손자를 잡아 오란 지시를 내린 것치곤 몹시 이중적이었다.
“할머니 다 알지?”
“무얼?”
박 회장이 의아하게 눈을 키우더니 의뭉스럽게 반문한다. 정혁은 코웃음을 흘렸다.
“노인네, 시치미는.”
그제야 박 회장이 속내를 들킨 양 싱겁게 웃는다. 마침내 그녀가 돋보기안경마저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뭔가를 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가만히 있어도 알음알음 들려오더구나. 네 녀석이 워낙 유난을 안 떨었니.”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역시 너그러웠다.
“현아랑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허공을 주시하던 정혁의 눈길이 돌아섰다. 기대를 품어 보지만 의심도 거두지 않았다.
“진심이야?”
“현아가 싫으면 열이든 백이든 네 녀석 마음에 드는 아이로 골라 주마. 그러니까 그 애는 안 된다. 아가, 할미 말 알지?”
그럼 그렇지.
“되고 안 되고는 내 마음이고.”
다시 심드렁하게 굳은 정혁의 고개가 허공으로 향했다.
박 회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갖고 싶다던 것도 할미가 가져오마. 네가 꼭 말하지 않아도 차씨 집안 종손이니 당연히 찾아와야 하는 거고.”
그 대목에서 정혁의 눈매가 예민하게 올라섰다. 기분과 달리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할머니.”
“오냐.”
“나 낳았다는 그 여자 말이야.”
“여기서 그 천박한 것 얘기를 왜 입에 올려!”
생모를 언급하자 점잖기만 하던 음성이 매섭게 날을 세운다. 정혁은 개의치 않고 중얼중얼 뒷말을 이었다.
“나 여섯 살 땐가? 그 여자가 찾아와서 나 내놓으라고 난리 쳤잖아, 왜.”
알고 있다. 그 여자가 원한 건 아들이 아니었다는 걸. 부자 할머니를 둔 아들을 핑계로 몇 푼 뜯어낼 요량이었지.
“근데 끝까지 안 주더라. 왜지?”
정혁이 삐딱했던 고개를 바로 세우고 사뭇 궁금하단 듯이 박 회장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날 많이 좋아했나? 그래서 주기 싫었나?”
“암, 좋아하고말고.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알면서 왜 묻냐는 듯이 박 회장이 픽, 하고 언짢은 웃음을 흘렸다.
몹시 어릴 때라 정혁에겐 한 번으로 기억되는 모양이지만, 성자가 어린 아들을 구실 삼아 밀고 들어오려던 적이 비단 그때뿐이었을까.
잊을 만하면 주기적으로 나타나 제 새끼를 내놓으라며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통에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쫓아 버리려 해도 대문에 들러붙어 어찌나 악다구니를 쓰는지. 그땐 박 회장도 한창 젊은 축에 속했는데, 20대 중반인 성자야 오죽 기운이 팔팔할까.
못 배우고 되바라졌대도 그럭저럭 어미 노릇을 했더라면 아들이 남기고 간 짐보따리쯤으로 여기고 거두어 손자놈 어미 노릇을 하게 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형편없는 물건은 어미 자격을 운운하는 것도 입이 아팠다. 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제대로 된 어미라도 손자를 내줄 생각이 없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치장하고 사내들과 노닥거리는 게 다니 원. 그런 어미 밑에서 뭘 보고 자라라고 금쪽같은 손자를 내줄까.
물론 성자가 진짜 원하는 것도 그건 아니었다.
“할머니.”
정혁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유다정도 유시우 많이 좋아해.”
색이 진해진 동공에 소슬한 빛이 어렸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허튼짓하면 할머니라도 재미없어.”
* * *
유치원 개학 첫날.
유치원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시우의 두 발이 통통 튀어 올랐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날 생각에 기분이 들떠 보였다.
“우리 시우, 친구들 만나서 좋겠네.”
“네에! 경준이랑 수원이랑, 또…… 보람이랑 서연이랑! 다 시우 친구예요!”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시우의 손에 티라노사우르스 모형 장난감이 꼭 쥐여 있었다.
한창 호랑이 타령을 하더니, 공룡 박물관에 다녀온 이후 시우의 관심사는 다시 공룡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시우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온 다정은 식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스케치북과 스케치 연필, 색연필 따위도 함께 늘어놓았다. 휴가다 뭐다 그동안 미뤄 뒀던 일을 시작해 볼 참이었다.
홍 회장은 기한에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지만, 계약금까지 받은 마당에 농땡이를 부리는 건 염치가 없었다. 일단 다음 주까지 디자인 스케치를 뽑고 조율을 거친 뒤 설계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다정은 지형 사진들을 노트북 화면에 하나하나 띄워 보았다. 홍 회장과 주택이 들어설 부지에 갔던 날 직접 찍어 온 사진이었다.
다녀온 뒤 검색해 보니 주변으로 고급 타운 하우스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당장은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지만, 머지않아 부촌으로 거듭날 동네였다.
그렇다 보니 고민이 깊어졌다. 고급스러운 주택단지 틈에서 돋보이려면 뭔가 더 특별한 차별성을 가져야만 했다.
다정은 오리처럼 입을 쭉 내밀고 인중에 끼운 연필을 씰룩이며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길 잠시 연필을 쥔 손이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선을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선이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벽이 생겨나고, 지붕이 드리워졌다. 담장이 세워지고 창문이 만들어지고, 예쁜 화단과 조경수도 심어졌다.
미완성의 스케치를 보며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지웠다가, 또 선을 그려 나가길 반복했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몰두할 때였다. 잠들어 있던 휴대폰이 드르르 몸을 떨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숙희였다.
『시우 애미야. 시우 할머니한테 전화해 봤니?』
“아뇨, 좀 됐어요…….”
2주 전에 제주도에 함께 가자고 전화했던 게 정애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왜요? 엄마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안 되겠다. 시우 할머니 좀 들여다봐라.』
“무슨 일인데 그래?”
다정이 걱정스레 채근하자 숙희의 음성이 약간 흥분되게 울렸다.
『아 글쎄, 방금 단비슈퍼 여편네한테 전화가 왔지 뭐야.』
단비슈퍼는 청주 마을 초입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터를 옮긴 지 제법 되었지만, 숙희는 예전 이웃들과 이따금 전화 통화를 하며 교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여편네가 그러는데, 네 엄마 다 죽어 간다더라.』
다정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엄마가요……? 어, 어디가 어떻게요?”
『허리 병이 도져서 거동도 못 한다던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뭔가 말 못 할 내용이 숨어 있는지, 숙희는 말을 하려다 말고 탄식을 쏟았다.
『아휴, 몰라. 일단 네 엄마 병원부터 모시고 가.』
“알겠어요. 바로 모셔 올게요. 네, 걱정 마세요.”
통화를 마친 다정은 급히 차 키를 움켜쥐었다.
* * *
『자세히는 모르겠어. 허리 병이 도졌나 봐. 걷지를 못하신대.』
애가 타는지 다정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솔이가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느네 엄마 진짜 왜 그러시니? 아프면 아프다고 자식들한테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하여간 고집도 대단하시지.”
차마 반박의 여지가 없던지 휴대폰 너머에선 긴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너무 걱정 마. 아줌마 허리 병 하루 이틀도 아니고. 조심히 잘 모시고 와.”
『응, 그래서 말인데. 이따가 시우 좀 데리러 가 줘.』
“시우 걱정은 말고, 넌 운전이나 조심해.”
통화를 마친 솔이의 눈길이 맞은편에 심기 불편한 남자에게 향했다.
“미안해요. 어디까지 말했죠?”
눈가를 구긴 정혁은 한숨을 뱉었다. 불과 1분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존심 상하는 대목을 또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끓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저라 꾸역꾸역 말을 토했다.
“책임지랬더니, 싫다길래. 그럼 내가 책임진다니까, 그것도 싫다고…….”
“아! 맞다 맞다.”
맥락을 떠올린 솔이가 말을 차고 들며 곧바로 대화를 연결했다.
“당연히 싫다고 했겠죠. 다정이 비혼주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