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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사랑 맞아 (56/114)


56화 사랑 맞아
2023.02.12.


커튼을 투과해 밀려든 햇살에 공간이 아늑하게 물들었다.

지지배배 울어대는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의 지저귐, 소형 분수 안에서 졸졸 흐르는 맑고 청량한 물소리.

그 밖에 자연과 일상에 내포된 모든 변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의식을 잔잔히 일깨웠다.

기지개를 쭉 켜는 다정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모처럼 맞이한 산뜻한 아침의 나른한 정취가 퍽 좋았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깼어?”

세상 모든 근심과 동떨어진 듯 편안히 감겼던 눈꺼풀이 반짝 올라섰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호텔 방의 천장과 샹들리에를 느리게 훑다가 도르르 옆으로 굴렀다.

머리를 괸 남자가 나른한 눈길로 바라보며 미끈한 광채를 흘린다. 심지어 까치집을 지은 머리 꼴을 하고도 지나치게 눈부셨다.

요염하게 웃는 게 어째선지 배부른 맹수처럼 포만감에 젖은 얼굴이었다.


“잘 잤어?”

속삭이며 다정의 둥근 어깨에 친근하게 입을 맞추기까지 한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긴 했지만, 다정은 이미 뇌의 기능과 호흡이 정지된 상태였다.

차정혁과 한 침대에서 눈을 뜬 거로도 모자라 몸에 걸친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 그저 개탄스러웠다.

몸에 감긴 거라곤 얇은 이불과 제 정강이에 얽혀 있는 남자의 길고 묵직한 다리가 전부였다.

그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폐미를 발산하는 누드모델처럼 원초적인 자태를 뽐내는 남자를 가려 주는 거라곤 골반 근처까지 끌어올린 이불이 다였다. 그조차도 언제 벗겨질지 몰라 위태위태했다.
 

 
다정은 슬그머니 이불을 당겨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차, 차정혁 씨…… 왜, 왜, 여기 있어요? 나한테, 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목소리에 의혹이 담겼다. 짐작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닌데, 설마 그건 아닐 거라며 애써 무시했다.

그쯤 되자 정혁의 눈썹이 삐뚜름해진다.

매번 깨기 전에 내빼길래, 새벽 일찍 일어나 지키고 있었더니 이번엔 대놓고 발뺌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정혁의 얼굴이 금세 몽글몽글 풀어졌다.

무슨 짓을 했느냐는 질문을 듣고 보니, 몹시 좋았던 기억뿐이라 표정 관리가 영 쉽지 않았다.


“잡아 보라고 하길래.”

“하……길래요?”

“잡았지.”

“자, 잡아서……요?”

“혼내 준다길래.”

“혼을……?”

“혼났고.”

그 말을 끝으로 정혁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번져 갔다. 믿지 못하겠지만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긴 팔다리가 촉수처럼 뻗어 와 다정을 휘감아 당겼다. 커다란 남자가 순한 양처럼 엉겨 붙으며 예민한 귓바퀴에 매끄러운 콧날을 문질렀다.


“기억 안 난다고 하기만 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이를 바득 갈며 으르기까지 한다. 그 순간 뒤죽박죽 엉킨 장면들이 다정의 뇌리를 스쳤다.


‘나 자바봐-라아!’

칠렐레팔렐레 날뛰던 자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탄탄한 두 팔에 억류당한 채 부리부리 눈을 치떴다.


‘아쭈, 지금 나 자바써어?’

남자가 기막힌 듯 헛웃음을 흘린다.


‘그래, 잡았어. 어쩔래?’


‘어쩌기인! 호―온내 주꼬야! 야, 차덩혁 주둥이 대!’

셔츠 깃을 잡아당기자 남자가 휙 끌려온다. 덩달아 뒤꿈치가 들린다. 그렇게 그만 차정혁을…….

이후로는 상상에 맡겨야 할 만큼 화끈한 장면들이 흘러갔다.

천장을 향해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다정은 급격히 부끄러워진 주둥이를 살며시 감쳐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이 기억이 진짜일 리 없어…….

도리질 치며 현실을 부정해 보지만, 입술을 비집고 흐르는 건 탄식뿐이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기억나지? 너무, 하아…….”


뒷말을 잇는 대신 그는 더운 숨결만 불어 냈다. 다정은 슬그머니 그를 등진 채 절규가 터질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난 짐승인가. 정녕 욕망에 이렇게나 쉽게 허물어지는 인간이었던가.

이 남자와 엮이고부터 의도치 않게 자아 성찰의 기회가 잦아졌다. 자책과 후회를 곱씹을 때 포근한 체취를 풍기며 다가온 체온이 등에 찰싹 들러붙었다.


“유다정”

이름을 부르며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어리광스러운 속살거림을 뱉었다.


“나 또 혼나고 싶어…… 혼내 줘. 응?”

 

* * *

김포국제공항.

다사다난했던 여행도 마침내 끝이 났다.

시우의 손을 잡고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다정의 발걸음이 바빴다. 모자의 뒤를 따라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밀고 나오던 정혁의 눈이 가늘어진다.

얘기 좀 하자는데 저렇게나 내빼기 바쁘다.


“유다정.”

불러 보지만 다정은 들은 체도 않고 도망치듯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정혁의 눈살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유다정!!”

버럭 내지른 고함이 쩌렁쩌렁했다. 덕분에 북적대던 공항에 잠시간 정적이 내깔렸다.

종종대며 앞서 걷던 다정의 발도 우뚝 멈춰 섰다. 팩 돌아선 그녀가 창피하게 무슨 짓이냐며 눈으로 쏘아붙인다.

심드렁하게 마주하던 정혁은 다시금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네 짐은 네가 챙기란 듯이 좌우로 쥐고 있던 트렁크를 다정 쪽으로 슥 굴렸다.

다정이 굴러가는 트렁크를 잡느라 허둥거리는 사이 정혁은 시우를 안아 들었다. 마침내 억눌러 왔던 성미를 발휘해 그가 골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예요? 시우 줘요!”

다정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급히 팔을 뻗지만, 무시하고 돌아선 그는 뒤따르던 일행에게 다가갔다. 이번 여행의 최대 수혜자인 준호와 솔이였다.

얼렁뚱땅 시우를 넘겨받은 준호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연이어 정혁의 커다란 두 손이 머리를 감싸듯 시우의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가 차단되자 시우의 커다란 눈이 의아하게 깜빡인다.


“내 아들, 안전하게 데려다 놔.”

한 치의 실수라도 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이 ‘내 아들’이란 한 마디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어? 어어. 그래, 알았어.”

고개를 주억거린 준호는 시우를 더 소중히 보듬어 안았다. 그제야 귀를 감싼 손이 시우의 머리를 짧게 쓰다듬고 떨어졌다.

애 보는 데서 다투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유시우는 먼저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지금부터 유다정이랑 싸울 거니까.


“배솔이 씨, 먼저 가시죠.”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무겁게 착 까라지는 것만 봐도 대충 분위기가 짐작되었다.

시근대는 여자와 굳은 남자를 번갈아 보던 솔이가 방싯 웃으며 준호의 팔을 잡았다.


“준호 씨. 우리 카페 궁금하다고 했죠? 지금 시간 돼요?”

“당연하죠. 제 오늘은 전부 솔이 씨 겁니다.”

정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정말 눈꼴이 시어 못 봐 주겠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이쪽은 암수가 이리 정겨운데, 유다정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다소 험악하게 흐르던 상황을 종결짓듯 솔이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시우야. 엄마 이따 만나요, 해야지.”

“엄마, 안녕! 이따가 만나요! 아저씨 빠빠이!”

시우가 씩씩하게 손을 흔든다. 나란히 선 두 남녀는 작위적인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해맑은 아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쫍, 쪼로롭.

의기소침하게 웅크린 다정은 얼마 남지 않은 음료를 바닥까지 빨아 마셨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제 앞에 놓인 잔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 남자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유리잔 표면으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테이블 위에 흥건하게 고여 들었다.

빨대를 자근자근 씹어 대던 다정은 힐끔 시선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제게는 유한 사람이라 만만하게 굴었어도, 본질적으로 그가 쉬운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오랜만에 무겁게 굳은 위압 어린 얼굴을 마주하려니, 긴장으로 계속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얘기 좀 하자는 말을 무시하고 내뺀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무슨, 신혼여행은 무슨, 이라며 픽픽 코웃음 치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그렇게 야만적인 밤을 보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다 떠나 욕망에 취약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죽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다정이 눈동자만 들어 다시 그를 흘끔 보았다. 그는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이미 결혼 얘기가 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심기를 굳건히 해야 했다.

어젯밤 일로 여지를 줬다고 어떻게든 결판을 내려 할 테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면 유다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마침내 무거운 음성이 침묵을 가르고 으르듯이 묻는다. 철저히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다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며, 몇 번을 말해요? 어젠 실수였다고 했잖아요.”

“어젠이 아니라 어제도겠지. 무슨 실수를 그렇게 밥 먹듯이 해?”

“네! 어제도! 어제도 실수였어요. 됐어요?!”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레 버럭거린다. 정혁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안 됐어. 책임져.”

“어머? 어디까지나 쌍방인데, 왜 내가 책임을 져요?”

시시비비를 따지는 말에 정혁은 사뭇 진지하게 응수했다.


“그럼 내가 책임질게. 결혼해.”

새침하게 팔짱을 낀 다정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시우도 내가 책임져. 1+1이니까.”

“얘기가 왜 또 그렇게 튀어요? 관둬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너 매번 이렇게 먹튀하면 진짜 고소한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의 눈썹이 사납게 곧추섰다.


“그건 심신미약 상태에서……. 하! 됐어요. 고소를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어쨌든 난 할 말 다 했어요.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갈게요.”

“아직 안 끝났어.”

정혁이 나직하게 으르지만 다정은 못 들은 척 돌아섰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 빼고 두어 걸음이나 걸었을까.


“남의 순결을 빼앗아 놓고 나 몰라라 하면 다야!!”

등 뒤에서 내질러지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다정의 어깨가 경악으로 솟구쳤다.

싸한 적막이 감돌았다. 오픈형 카페라 공항 내부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금세 집중되었다.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 물색없는 입을 꿰매 버릴 수도 없고.

방향을 틀어 되돌아간 다정이 발을 쿵 굴렀다.


“미쳐! 창피하게 정말 왜 그래요?!”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던 정혁이 스윽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자 살짝 위축된 다정의 눈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남들 눈은 창피하고 내 순결은 개나 줘라, 이거야?”

그가 공격적으로 몰아세웠다. 다정은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순결? 지금 순결이랬어요?”

“순결이랬어. 왜? 뭐?”

다정의 입술이 짓물렸다. 뻔뻔해도 유분수다. 순결이란 말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물론 다정은 구태의연하고 편협하며 궁상맞은 여자들과 달랐기에, 눈앞에 이 치사한 남자처럼 자신의 선택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경험 부족에 뭘 몰라도, 이 남자에게 순결하다 주장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설마 제가 처음이려고. 말도 안 되지.


“차정혁 씨는 양심도 없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순결? 하!”

“사랑하는 여자랑은 처음이니까 순결 맞아.”

다정의 숨이 토막 났다. 동시에 외계인이라도 본 양 몸을 휙 움츠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귀를 의심하며 다정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지, 지금 뭐라고……. 사랑……요?”

“그래, 사랑. 그게 뭐?”

극심한 소름이 다정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심지어 너무 진심처럼 들려서 두드러기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것과 모순되게 심장 박동은 눈치도 없이 빨라졌다. 급격히 곤란해진 호흡 역시 그랬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던 다정이 작게 꿍얼거렸다.


“사, 사랑은 무슨…….”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으니까, 사랑 맞아.”

단순한 논리를 들이대며 차정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 정녕코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다정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듣기 싫어요. 어쨌든 어제 일은 실수였으니까, 없던 일로 해요.”

“뭘 맨날 없던 일로 하재. 없던 일로 하자면 없던 게 돼?”

“이봐요, 차정혁 씨!”

허리춤에 손을 얹은 정혁이 한 걸음 불쑥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깔아뭉개듯 바투 다가온 눈빛이 불만으로 이글거렸다.


“없던 일로 하고 싶으면 유시우도 다시 작게 만들어서 내놔. 그럼 없던 일로 해 주고.”

“…….”

하다 하다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정혁은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쳤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란 듯이.

그 얼굴이 정말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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