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 잡아 봐라
(55/114)
55화 나 잡아 봐라
(55/114)
55화 나 잡아 봐라
2023.02.09.
한가로운 오후 2시.
정혁은 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의식을 깨웠다. 소파에 앉았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선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젖힌 고개를 바로 세우자 테라스 밖으로 펼쳐진 먼바다의 전경이 눈에 담겼다. 피로에 찌들어 느리게 깜빡이는 눈은 그렇게 한동안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동 없이 바라보았다.
여행 와서 이렇게 피곤할 일인가. 뭘 했다고 진이 다 빠졌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뭐가 이렇게 허전하지? 뭔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뭘까를 생각하며 가만히 멍을 때리던 정혁의 눈이 불쑥 커다래졌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안도하듯 픽 웃고 만다. 유시우는 그의 곁에 웅크려 잘 자고 있었다.
오전 내내 미친 강아지처럼 수영장에서 첨벙거리더니, 점심을 먹고 나서는 곧장 이 상태였다.
정혁은 평화로운 눈길로 잠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쿠션에 눌린 찹쌀떡 같은 뺨이 귀엽다. 새 부리처럼 앙증맞게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맑은 액체도…….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지 싶다. 침을 흘리는 게 귀여운 걸 보면. 이래서 고슴도치 어쩌고 하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
여하튼. 외출하지 않고 호텔 붙박이로 시간을 보낸 데는 다 사정이 있었다. 시우가 앓아 애를 졸이게 하더니 이번엔 유다정이 말썽이었다. 병이 난 건 아니고 단순한 과로와 수면 부족이었다.
아침나절 병든 닭처럼 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비실비실 까라지기에 그냥 자라고 방에 가둬 버렸다.
덕분에 느긋하고 한가롭게 호텔에서 낮잠을 자는 여유를 부리긴 했는데, 돌아가면서 이러는 건 정말 반칙이다.
그 바람에 정혁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애도 봐야 하고 애 엄마도 챙겨야 하고,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의 비애란 이런 걸까. 처자식 달린 가장들의 어깨가 왜 무겁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시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다정은 마지막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잘 자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언제 깼는지 소파 등받이 위로 다람쥐 같은 게 쏙 고개를 내민다.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소파로 다가가 다람쥐 같은 유시우를 안아 들었다.
곧장 다이닝룸으로 들어가 식탁 앞에 시우를 내려놓고 물을 한 잔 따랐다. 비타민제를 타서 내밀자 앙증맞은 두 손이 유리컵을 꼭 움켜쥔다.
물과 비타민 섭취를 신경 쓰라는 의사의 권고를 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시우가 비타민과 수분을 섭취하는 동안 정혁은 간신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조각 케이크를 꺼내 포크로 작게 떠 내밀자 시우의 입이 벙긋 벌어진다.
일련의 과정들이 대화 한마디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일상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른한 오후 3시.
방문객이 문을 두드린다. 정혁은 때마침 옷을 갈아입힌 시우를 안고 통로를 걸었다.
현관문을 열자 영혼의 동반자처럼 커플룩을 갖춰 입은 남녀가 나란히 서 있다. 신혼부부처럼 아주 행복해 죽겠는 얼굴들이다. 여기도 정상은 아니지 싶다.
“잘 쉬었냐? 다정 씨는 좀 어때?”
준호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네 알 바 아니라는 듯 정혁의 눈길은 곧장 솔이에게 향했다.
“배솔이 씨,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시우 반은 제가 키웠다고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인 솔이가 시우에게 팔을 뻗었다.
“우리 시우, 이모랑 공룡 박물관 갈까?”
“어?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귀를 쫑긋한 시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솔이의 손을 잡고 돌아선 시우가 허리를 꾸뻑 숙였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유시우 내일 봐.”
손을 흔들어 주자 유시우도 팔랑팔랑 마주 손을 흔든다.
문틀에 기대선 정혁은 세 사람을 태운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잠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 * *
다정이 눈을 뜬 건 어스름 땅거미가 내려앉은 뒤였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물에 잠긴 양 무겁던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나른하게 목덜미를 주무르던 다정은 느릿하게 침대를 내려갔다. 쉴 만큼 쉬고 나자 아들 걱정이 앞섰다.
“시우야……?”
거실로 나갔지만 시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룸서비스 된 음식들로 휘황찬란하게 채워진 테이블만 눈에 들어왔다.
“깼어?”
등 뒤를 울리는 목소리를 알아챔과 동시에 부드럽게 허리를 감아온 팔이 다정을 돌려세웠다.
당황할 겨를도 없이 마주 선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그대로 있다가는 입이라도 맞출 것만 같아 다정은 퍼뜩 그의 가슴을 짚어 간격을 유지했다.
“……시, 시우는요?”
“배솔이 씨랑 공룡 박물관에.”
“공룡…… 이 시간까지요?”
다정이 목을 빼고 테라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밖이 어둑한 게 돌아왔어도 벌써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정혁은 아랑곳없이 다정을 소파 테이블 쪽으로 떠밀었다.
“저녁까지 먹이고 오려나 보지.”
거짓말이다. 유시우는 오늘 밤 이모의 숙소에서 잘 예정이었다.
“먹어.”
그가 말하며 다정을 소파에 주저앉혔다. 테이블에 요란하게 차려진 것들을 보며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유다정 배고플까 봐.”
3구 촛대와 꽃바구니는 기본, 생크림 케이크와 치즈. 갖가지 핑거푸드와 와인. 식사용으로 보이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해산물 요리 등등.
취향대로 골라 먹으라고 다양하게도 주문했다. 다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종일 잠만 자서 그런가. 막상 음식들을 보자 식욕이 돋긴 했다.
“생각은 해 봤어?”
봉골레 파스타를 한입 물고 우물거리던 다정이 눈을 홉떴다.
“뭘요?”
“신혼여행지.”
어제 해변에서 신소리 말라며 면박을 주었는데 참 끈질기기도 했다. 다정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재빨리 핥았다.
“또 그 소리예요? 신혼여행은 무슨.”
농담을 들은 양 다정이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자 정혁이 곧장 수긍했다.
“그래 그럼. 일단 그건 패스하고 가을쯤 해.”
“가을쯤? 뭘요?”
“뭐긴. 우리 결혼식이지.”
다정은 어리둥절한 눈만 끔뻑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깜빡이가 없는 불량품 같았다.
“내가 왜 차정혁 씨랑 결혼을 해요? 차정혁 씨는 오현아 원장이랑 결혼할 거잖아요.”
“그거 깼어.”
다정은 잠시간 머릿속이 멍해지고 말았다. 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하던 입이 겨우 말을 만들어 냈다.
“……서, 설마 나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왜 아니야?”
태연하게 받아친 정혁이 작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 다정에게 내밀었다. 당황한 눈이 코앞까지 다가온 고기를 빤히 보다가 재빨리 그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아, 아뇨! 차정혁 씨 그러지 말고 오현아 원장이랑 결혼해요.”
그 대목쯤 되자 평온하기만 하던 정혁의 얼굴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외면받은 고기를 내려놓은 그가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우리 오늘 4일째야. 근데 다른 여자랑 결혼하란 말이 나와? 너랑 할 거야. 결혼.”
“그게 무슨 억지예요? 오늘부터 1일도 차정혁 씨 혼자 우기는 거고, 결혼 깬 것도 멋대로 결정한 거고, 신혼여행 어쩌고 하는 것도 다 혼자 생각한 거잖아요. 난 전혀 동의한 적 없어요.”
“그래서 내 청혼 거절한다고?”
정혁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다정은 어이가 없어서 찌푸린 얼굴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청혼이요? 무슨 청혼을 반지도 없이 해요?”
“반지가 왜 필요해? 내 얼굴이 다이아몬든데.”
“어머머?”
기막힌 자신감에 말문이 다 막혔다. 문제라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란 거다. 다이아몬드 줄까? 차정혁 줄까? 하고 물으면 조금 고민이 될 것 같긴 했다.
“반지 주면 해?”
“아, 아뇨! 그냥 일반적이지 않단 말이잖아요.”
다정은 바삐 손사래를 쳤다. 당황스럽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결국 식사는 중단되었고, 다정은 타는 속을 달래려 와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자전거 바퀴에서 바람 빠지듯 다정은 연신 피식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눈은 반쯤 풀어진 채였다.
“차암……. 내가 그 말도 해떵가여?”
지그시 내리깐 눈길을 다정에게 고정한 채 정혁이 물었다.
“무슨 말?”
“여기…… 너무 조타는 마알…….”
“했어. 지금 거까지 아홉 번 말했어.”
어느새 소파에 몸을 붙이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엉? 아호뻐언? 오? 징짜?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뺨을 감싸 쥔 다정이 긴 한숨을 뱉자 묵힌 포도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정혁의 눈꺼풀이 느리게 덮였다가 다시 떠올랐다. 상체는 한참 전부터 다정에게 30도쯤 기울어진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니 붉어진 뺨과 콧잔등 위로 드문드문 뿌려진 주근깨가 발랄한 느낌을 주었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정의 뺨에 지그시 입을 맞췄다. 충동보다 본능에 가까웠다.
“하응, 하지 마여.”
“가만히 있길래 해도 되는 줄 알았지.”
다정이 칭얼거리는 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그러자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린 다정이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렸다.
해롱해롱 풀린 눈이 그의 얼굴을 골몰하게 들여다본다.
“어? 우리 시우 되게 달마따아.”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양 헤실헤실 웃는다. 반쯤 돌아간 혀는 어떻게 안 되는지, 혀 짧은 소리를 곧잘 낸다.
“말은 바로 해. 유시우가 날 닮은 거지.”
“아, 맞다. 그래찌잉. 아흐, 너무 싱기해엥.”
“뭐가?”
물으며 그의 입술이 또다시 다정의 코끝에 쪽 닿았다 떨어졌다. 이번엔 재채기를 할 것처럼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 차덩혁 씨가 우리 시우 아빠자나. 어뜨케 이케 잘생긴 사람이 시우 아빠지? 응? 그래서 싱기해에.”
다정이 부끄러운 듯 헤헤 웃는다. 이럴 땐 유시우 얼굴이 언뜻 스쳤다. 다채로운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던 정혁의 입술 끝이 지그시 깨물렸다.
강아지풀이 취했다. 취하니까 너무 좋다. 무방비해서.
정혁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때다 싶어 계획적으로 노리던 입술을 단번에 머금고 길게 입을 맞췄다.
달큼한 숨결이 뒤섞였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다정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른 채 입술을 빼앗겼다.
말랑하게 비벼지다가 떨어진 입술이 다정의 귓가로 미끄러져 간지럽게 속살거렸다.
“잘생겼으니까 결혼해.”
“어엉? 겨러언?”
놀란 눈을 하더니 풉, 웃기만 한다. 정혁의 입술이 다시 다가갔다. 쪽, 쪼듯이 한 번. 쪽, 또 한 번 입을 맞추자 유다정이 어깨를 흔들며 앙탈을 부렸다.
“아이참, 자꾸 그러면 화낸다아!”
“가만히 있길래 유다정도 좋은 줄 알았지.”
치이, 소리를 내며 갑자기 숙연해진 유다정이 화제를 바꾼다.
“이짜나요. 말은 안 했는데, 여기 되게 좋아요. 히히.”
“안 하긴, 벌써 열 번짼데.”
“이르케 조은데 처음이야앙. 시우가 조아하니까 대따 조쿠, 그래서 차덩혁 씨한테 대따 고맙구. 히히.”
“평생 이런 데서 살게 해 줄게. 결혼해.”
“흐응, 시룬데…… 근데 차덩혁 씨가 나랑 시우랑 이케 잘해 주니까, 그건 또 나쁘지 아는데에…….”
“결혼하면 아침저녁으로 예뻐해 줄게. 그러니까 해. 응?”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흐응, 시러엉.”
달콤한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듯 다정이 힘겹게 도리질을 치더니 별안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고개를 수그린다.
하느작하느작 조는 모양새로 흔들리더니 수그린 고개가 번쩍 들렸다. 순하던 눈매가 삐쭉했다.
“야! 차덩혁! 딸끅.”
“…….”
야, 차정혁? 강아지풀처럼 나긋나긋하더니 갑자기 태세 전환이다. 정혁은 여과 없이 한숨을 토했다.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귀여운 짓만 골라 잘도 했다. 그래도 쉬운 놈은 되지 말자 싶어 무게를 잡았다.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타일렀다.
“쓰읍. 또 까분다. 오빠한테.”
“어엉? 오빠아? 오빠아앙?”
다정이 흥흥 콧방귀를 뀐다. 귀엽다.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이려고 해서 정혁은 입술 끝에 꾹 힘을 주었다.
“까불지 말고 오빠 해 봐.”
좋게 꼬드기자 하칫거리던 다정이 갑자기 엉금엉금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위풍당당하게 소리친다.
“야! 차덩혁! 너 그러다가 누나한테 아주 호오오온나! 혼구녕이 나야 덩신을 차리디, 짜샤.”
위협적으로 주먹까지 추어 든다.
예상 밖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혁은 고민스럽게 턱을 문질렀다.
아무래도 이건 강아지풀의 주사 같았다.
주먹을 내밀며 으름을 놓던 유다정이 갑자기 키득키득 웃는다. 그러고는 야호, 하듯 모아쥔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나 자바봐―라아!”
꺄륵꺄륵 소리를 내며 유다정이 거실을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정혁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하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래도 일단은…… 잡고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