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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다시 찾아온 평화 (54/114)


54화 다시 찾아온 평화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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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소아 일사병인데…….”

피로에 찌든 얼굴을 슥 문지르며 의사가 기계적으로 진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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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을 때 실외활동이 지나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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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선생님. 그럴 리가 없어요.”

반박하는 다정의 얼굴에 불안이 더해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다정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땡볕에 아이를 방치할 만큼 무지하지 않았다.

밖에서 한 시간쯤 놀면 꼭 그늘에서 쉬게 하고 물도 충분히 섭취하게 했다. 귤밭 체험 일정을 이른 아침에 잡은 것도 해가 강한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시우의 기분이 저조해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귤밭을 나섰다. 이후론 전망 좋은 디저트 카페를 돌며 조랑말을 구경하거나 드라이브를 한 게 고작이었다.

단언컨대 일사병이 올 만큼 무리를 한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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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다른 검사도 해 주세요, 네?”

피곤한 눈을 깜빡이던 의사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숙련된 의사의 진단을 믿지 못하겠다면 냉혹한 진실을 알려 주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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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말대로 고온에 오래 노출되지 않았는데 이런 증상이 있다면 복합적인 문제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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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적인…… 문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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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나 스트레스 같은 거요. 애들은 성인보다 예민해서 심리적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스트레스가 피로로 축적돼서 질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흔합니다. 피곤하면 감기에 잘 걸리는 거랑 같죠.”

꾸짖기로 작정한 듯 의사의 어조가 점점 날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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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 탈모란 말 들어 보셨죠? 그만큼 스트레스에 취약한 게 애들인데, 애들은 자기 머리가 왜 빠지는지 이유조차 설명을 못 해요. 어른들이 볼 땐 아플 이유가 없는데 병이 나는 거죠.”

예상도 못 했다는 듯 다정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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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은 비슷해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야 한다거나, 눈앞에서 부모가 다투는 걸 본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결과적으로 다 부모 영향이죠.”

눈앞의 남녀를 바라보는 눈길에 얼핏 한심하다는 기색이 스쳤다.

몇몇 장면들이 다정의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아이를 혹사하지 말라는 정혁의 잔소리도 떠올랐다.

시우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했던 일들도 수없이 그려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정은 울먹울먹해지려는 입술을 꾹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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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안 좋다거나 기운이 없다거나, 그런 식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계속 사인을 보냈을 겁니다. 애들은 아파도 지가 아픈 줄 잘 모르니까, 보호자가 그런 사인들을 눈여겨보셔야 해요.”

일렁일렁 차오른 눈물이 기어이 하얀 바닥을 점점이 물들였다. 굳은 얼굴을 슥 문지른 의사가 한결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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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이 정도면 안정됐어요. 일단 구토 때문에 탈수가 올 수도 있으니까, 수액만 다 맞히면 귀가하셔도 됩니다. 비타민 좀 먹이고, 물도 자주 먹이면 금방 괜찮아지니까 안심하세요.”

다른 검사는 필요 없다는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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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정은 돌아서는 의사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분명 평소와 달랐는데, 단순히 아이스바 사건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거라고만 짐작했다.

엄마 아파요. 시우 아파요. 줄곧 그 말을 하고 있었는데, 바보 같은 엄마는 토라지면 나쁜 어린이라고 꾸중만 했다. 그 생각을 하자 밀려드는 자책에 하염없이 눈물만 솟구쳤다.

한편 맥이 턱 풀린 정혁은 마른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숨을 골랐다. 시우를, 제 아들을 안고 응급실로 뛰쳐 든 순간의 감정이 벌써 희미했다.

어땠더라? 돌이켜 봐도 그때의 기분은 뭐라 설명할 길이 막막했다. 막연히 그 순간을 떠올리자 또다시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다정의 훌쩍거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커다란 손의 온기가 다정의 차가워진 손끝을 부드럽게 맞쥐어 왔다.

젖은 눈을 들어 올리자 정혁이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한시름 놓아 그러는 줄 알면서도 왜인지 웃는 얼굴이 얄미워서 다정은 삐쭉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뚝 떨어진다. 쏘아보든 울든 하나만 하지, 이 와중에도 유다정은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정혁의 한숨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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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 줄까?”

세차게 도리질 치는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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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유다정이 나 좀 안아 주라.”

큼직한 손이 다정의 뒷머리를 살포시 감싸 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 안긴 그의 어깨가 축축했다. 역하고 시큼한 냄새도 진동했다.

그 순간 목구멍을 메우던 뜨거운 설움이 결국 역류하고야 말았다.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목을 놓아 울어 버렸다.

여전히 엄마 노릇이 서툰 스스로가 한심했고, 그것밖에 안 되는 엄마라 시우에게 미안해서. 또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이 차정혁이라서.

안도가 되었다. 제 심정을 완벽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북받친 감정이 엉엉 요란한 소리가 되어 고요한 응급실 복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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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볼록하게 떠오른 커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심술을 부리듯 따갑게 밀려드는 햇살의 기세도 은은하게 누그러졌다.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며 잠에서 깬 정혁은 손을 들어 눈가를 짚었다. 찬찬히 숨을 고르며 들이치는 햇살에 적응도 할 겸 무겁게 가라앉았던 의식이 떠오르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던 무게감이 도르르 구르더니 옆구리 쪽으로 퉁 떨어진다.

어린 목소리가 에휴, 하고 탄식을 뱉는다. 그러고는 끙차, 하고 추임새를 넣더니 다시 등반하듯 기어올라 가슴을 누른다.

정혁의 입가에 나른한 웃음이 번졌다.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면 될 것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주인 깨우려는 똥강아지처럼 간지럽게 간을 본다.

찌푸려 뜬 한쪽 눈을 아래로 내리자 가슴팍에서 버둥거리는 형체가 잡혔다. 눈이 마주치자 어? 소리를 내더니 깨울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듯 무구한 얼굴로 시치미를 뗀다.

못마땅하게 눈가를 씰룩이며 또랑또랑한 눈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자니 멋쩍어진 유시우가 배시시 웃어 버린다.

이걸 잡아먹을 수도 없고.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탄식이 정혁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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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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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에!”

대답은 씩씩하게 잘도 한다.

햇살에 핀 솜털이 복숭아처럼 말갛고 생기 도는 뺨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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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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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가슴에 엎어져 꾸뻑 숙인 이마가 정혁의 가슴을 콩 찧고 번쩍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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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근데 엄마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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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자. 깨우지 마.”

정혁이 나른하게 대꾸하며 시우의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새벽 내내 시우 곁을 지키던 다정은 어느 시점에선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실신 지경으로 침대에 기대 잠든 걸 다른 방으로 옮겨 놓고 교대한 게 동이 틀 무렵이었다.

팔을 접어 머리를 받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른 손으로 시우의 등을 토닥이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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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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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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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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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응! 시우 아팠어요!”

어렴풋이 기억은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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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유시우 많이 아팠어.”

확인시켜 주자 자그마한 얼굴에 걱정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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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어…… 시우 아프면 엄마가 걱정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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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엄마가 걱정 많이 했어.”

가늘게 뜬 눈을 맞추자 오물거리던 시우의 입술이 씩씩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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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시우 인제 하나도 안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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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네.”

원래 애들은 이렇게 회복력이 좋은가. 다 죽어 가더니, 언제요? 하는 듯이 아주 쌩쌩했다.

정혁은 그저 웃었다. 가슴이 들썩이자 유시우도 벌렁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때 별안간 꾸르르륵! 하고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우렁찬 소리에 정혁이 눈이 크게 떠진다. 맞댄 작은 몸에서 울린 진동이 믿기지 않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눈길을 내리자 유시우가 휘둥그레진 눈을 빤히 맞춘다. 제 배에서 난 소리에 저도 놀란 눈치였다. 다섯 살도 민망한 걸 아는지 또 배시시 웃어 버린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흘렀다. 정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침대를 벗어났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도 자식 배에서 밥 달란 소리가 들리니까 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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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엉금엉금 기어 와 안기는 시우를 안아 들었다.

엄청난 소리를 울렸던 배를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간질이자 꺄륵 소리를 내며 자지러진다.

평소에도 어느 정도 빵빵하던 배가 그새 홀쭉해져 있었다. 그렇게 게웠으니, 허기가 질 만도 했다.

푸석한 얼굴을 쓸어올리고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신호음이 끊기길 기다리는 동안 유시우의 머리에 코를 비볐다.

닦아 주기만 한 탓에 어젯밤의 여운처럼 시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났다. 그조차도 좋아서 웃음이 났다.

이윽고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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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좀 가져다줘요. 전복죽으로. 애가 먹을 거니까 잘게 다져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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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바다, 바다!”

작은 고사리손이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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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너무 예쁘다 그치?”

다정은 시우의 손을 잡고 물가로 향했다. 얕게 밀려드는 파도가 발등을 덮었다. 휩쓸린 모래 알갱이가 발가락 틈을 간지럽히자 시우가 돌고래 소리를 내며 폴짝거렸다.

구명조끼를 꼼꼼히 착용하고 스노클 안경까지 씌워 준 뒤 시우를 얕은 물에 내려놓았다. 출렁 물살이 일자 놀라 움츠러들더니 번쩍 고개를 젖히고는 민망한 듯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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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멸치다아! 멸치!”

반짝이는 물살을 빤히 보던 시우가 손가락으로 수면을 가리켰다. 천진한 눈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헤엄치는 치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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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여기서만 노는 거야. 멀리 가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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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겁을 먹고 움츠러들 때가 언제라고 시우는 금방 얕은 물가를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물가와 가까운 파라솔 아래에서 다정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발을 동동 구르게 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서는 이렇게 허탈한 웃음을 짓게 했다.

다시금 되찾은 평화를 만끽하듯 다정은 바다 내음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작위적인 비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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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꺅! 준호 씨잉! 나 잡아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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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면 소원 들어줘야 합니다!”

준호가 모래를 박차고 튀어 나가자 화들짝 놀란 솔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엉성한 뜀박질이었다. 저게 일부러 잡히자고 저러는 게 아닌가 싶다.

홍준호는 알까 모르겠다. 솔이가 고등학생 때까지 배구부였다는 사실을. 듣기론 100미터를 10.3초에 돌파했다던데.

여하튼 수영복 차림의 남녀는 벌써 1년쯤 사귄 커플처럼 해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난리 블루스였다.

머지않아 솔이는 의도한 대로 홍준호에게 가뿐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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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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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악! 꺅! 준호 씨 장난꾸러기!”

솔이의 충격적이고도 경악스러운 실체를 목격한 다정은 고개를 잘잘 저었다. 다정이 아는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때려잡던 그 애는 아마 다른 애일 거다.

저 미친 금사빠가 이해되지 않는 걸 보면 우정의 깊이가 턱없이 모자란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닷새 만에 실연의 아픔을 극복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까.

상념에 잠긴 그때 어디선가 촤르륵 물살 흩뿌리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눈길을 들자 저만치 수면 위로 누군가의 상반신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피조물이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태양 빛에 달아오른 피부는 습윤한 윤기를 가득 머금은 채 매끄럽게 반짝거렸고, 뭍을 향해 내딛는 긴 다리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흡사 CF에서나 볼 법한 장면에 다정의 입이 스릅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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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대며 제게로 향하는 남자를 발견하고 다정은 주책없이 벌어진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

쫄딱 젖은 개처럼 마른 모래를 적시며 파라솔 아래로 온 정혁이 수건을 덮어썼다. 그리고 뜬금없이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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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정도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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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반문하자 정혁의 눈길이 멀찌감치로 향했다. 햇살에 살짝 찌푸린 눈이 향한 곳은 나 잡아 봐라, 가 한창인 남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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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우면 말해.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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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울 게 그렇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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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네, 세상 끝까지 잡으러 갈 자신 있는데.”

피식거리던 남자가 팔꿈치를 대고 뒤로 비스듬히 몸을 기대자 오밀조밀한 복근이 훤히 드러났다.

다정은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황급히 시우에게 눈길을 되돌렸다.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니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감각을 파고들었다.

물빛도 좋고 하늘빛도 좋고, 바닷바람의 냄새도 좋았다. 모든 것들이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하물며 바람결에 실려 온 그의 목소리마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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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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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요. 외국 온 것 같고 너무 좋아서요. 이런 얘기 우습겠지만, 그때 스페인이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거든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길이 다정의 얼굴에 잠시 머물다가 이윽고 먼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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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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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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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어디로 갈지.”

지금 느끼는 평화가 와장창 깨져 나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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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도 좋고 몰디브도 좋고. 유시우랑 같이 지중해 한 바퀴 돌아도 좋고.”

그는 사뭇 진지했다. 다정의 눈이 습관처럼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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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차정혁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어딘지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정혁이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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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나랑 단둘이 가고 싶겠지. 그래도 한 달이나 내 아들 없인 못 살아. 어쩔 수 없이 끼워 주는 거니까 그건 유다정이 양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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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말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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