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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좋은 아빠 (53/114)


53화 좋은 아빠
2023.02.02.



“제주도로 가셨답니다.”

윤 비서의 보고가 컴컴한 서재에 낮게 깔리자 박 회장의 눈길이 의아하게 올라섰다.


“제주도?”

“제주도 L 호텔에 체크인한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박 회장은 돋보기안경을 벗고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사춘기 사내놈처럼 출근도 거르고 잠적해 애를 태우더니, 설마 제주도에 가 있을 줄은 몰랐다.

대양을 건너 먼 이국땅이 아닌 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녀석의 소재를 알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혼자 갔다던?”

“아닙니다…….”

윤 비서의 눈길이 노인의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철로 향했다. 누군가의 인적사항이 담긴 보고서 위로 몇 장의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와 아이 엄마가 동행했답니다.”

그다지 놀랄 만한 보고는 아니었다. 박 회장은 다시금 돋보기안경에 눈을 끼워 맞춘 뒤 아이의 사진을 주워 들었다.

해맑게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 딱 손자 놈 어릴 때를 빼다 박았다. 어려도 잘난 인물은 감추지 못했다. 크면 제 아비만큼 훤할 테다. 손자 놈이 그랬던 것처럼.


“유시우…….”

아이의 이름을 부드럽게 발음하는 노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손자가 병이 날 만큼 갖고 싶다던 게 뭔지.

* * *

청귤 따기 체험 및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펜트하우스가 아닌 호텔 본동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하자는 정혁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그에게 미안한 하루였던지라 다정은 그의 제안을 쉽게 수락했다.

평소 그런 아이가 아닌데 오늘따라 시우가 어찌나 보채고 칭얼거리는지, 온종일 시달린 그를 생각하면 미안해서라도 거절할 염치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정혁은 카시트의 안전띠를 풀고 시우를 꺼내 안았다. 이제는 제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유시우를 안고 어딘가 뾰로통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반대편으로 팩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시우는 기분이 통 나아지지 않았다는 표가 여실했다.

정혁은 긴 한숨을 끊어 뱉었다. 아이스바를 백 개 사 준대도 싫다, 귤밭을 통째로 사 준대도 싫다, 도무지 아이 기분을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몰라 종일 가시방석이었다.

시우가 계속 저조해 있자 보다 못한 다정이 약하게 나무랐다.


“유시우.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계속 토라져 있으면 나쁜 어린이.”

“흐으응…….”

꾸중하자 칭얼거리며 작은 팔로 정혁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계속 토라져 있고 싶은데, 또 불리할 때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이 커다란 아저씨뿐이라는 걸 영악한 다섯 살 꼬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혁과 눈을 맞춘 다정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해 주자는 의미였다.

천성이 씩씩한 아이라 저녁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기분이 한결 좋아져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확신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딘가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눈에 잡혔다.


“너……?”

“어머. 다정아 이제 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다정을 반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솔이였다.

지난번 다정이 선물한 원피스를 입고 아찔한 킬힐까지 신고 있자니 늘씬한 게 모델이 따로 없었다.

모처럼 곱게 단장한 솔이는 어떤 남자와 식사 중이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같이 오자고 할 땐 가게 핑계를 대면서 싫다고 하더니, 남자랑 단둘이 제주도에?


“너 가게 때문에 못 온다면서?”

“어. 근데 항공권이다 숙소다, 공항에서 리무진 픽업까지 해 주고 가게 알바까지 공수해 주는데, 안 올 이유가 없더라.”

같은 시각, 「Cafe, Sol.」

딸랑. 도어벨 소리가 들리자 힘찬 인사말이 울려 퍼졌다.


“어서 오십시오! 카페 솔입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친절한 마인드와 신속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민 실장은 오늘도 임원을 꿈꾼다.

다시 제주도.


“처음 뵙겠습니다. 홍준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솔이와 함께 있던 남자가 다정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었다. 서글서글하고 선한 인상의 호남형 남자는 풍채가 좋고 키도 컸다.


 


“네? 네……! 안녕하세요. 유다정이에요.”

다정은 얼렁뚱땅 그가 내민 악수에 응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남자가 뒤이어 정혁의 어깨를 스스럼없이 툭 때렸다.


“오랜만이다, 정혁아. 너한테 소개팅을 주선 받는 날이 다 오고, 좀 놀랐다.”

다정의 어리둥절한 눈이 목석처럼 곁을 지키는 남자에게 향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자 무심히 눈을 맞추던 정혁의 입술이 귓가로 다가와 속삭였다.


“은혜 갚는다고 했잖아.”

 

* * *

고상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안에 남녀의 화기애애한 웃음이 넘실거렸다.


“준호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저는 아버지 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김치공장 하시거든요.”

준호의 말에 솔이가 반가운 듯 손뼉을 부딪쳤다.


“어머나, 저희 엄마도 반찬가게 하시는데.”

“이런.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봅니다. 하하하하!”

제주도산 흑우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다정은 헛숨을 뱉었다. 김치공장과 반찬가게. 인연이란 말을 갖다 붙일 데가 그렇게 없을까.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다정의 귀는 소개팅 중인 남녀를 향해 확성기처럼 커다래져 있었다.

윤두중에게 대차게 뒤통수를 까이고 상처를 받은 게 불과 사흘 전이었다. 또 한심한 놈팡이한테 걸려 솔이가 마음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러웠다.

물론 다정의 걱정과 달리 솔이는 실연의 아픔 따위 이미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어휴, 저 금사빠.

정지화면처럼 굳어 있는 다정의 귀에 별안간 쨍, 하는 소리가 잡혔다. 넋을 놓고 있자 정혁의 나이프가 다정의 접시를 때려 주의를 불러들인 것이다.

고개를 들자 가만히 눈을 맞추던 그의 눈길이 옆 테이블을 스치고 되돌아왔다.


“먹어.”

남 일에 오지랖 끊으란 투다. 머쓱해진 다정은 작게 썬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대각선 자리에 앉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은혜 갚은 까치를 자처하며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당사자는 정작 두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오직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써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미끈하게 쫙 갈라진 팔근육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고작 고기를 써는 데 써먹기엔 지나치게 아까운 팔근육을 이용해 그는 고기를 저미다시피 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조리되어 있었지만 아이 입에 덩어리 고기가 질겼던지, 시우가 몇 번인가 씹던 고기를 뱉은 까닭이었다.

정혁이 새 모이만큼 잘게 저며진 고기를 내밀며 아,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우의 입이 벙긋 벌어진다.

작은 입에 고기를 물려 주고 나면 그의 눈길은 한참이나 시우에게 머물렀다.

오물거리는 입술과 씰룩이는 뺨의 움직임이 느려지면 다시 고기를 물려 주는 식이다. 그 모습이 꼭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아빠 새 같았다.

종일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이 빠졌을 만도 한데 제 입에 넣을 새도 없이 아기 새 먹이듯 참 살뜰하기도 했다.

차정혁은 좋은 아빠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좋은 아빠였다. 그런 결론과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그때 소개팅 중인 남녀의 대화가 다시 귀에 잡혔다.


“솔이 씨는 제 이상형에 가깝습니다. 바비인형처럼 아름다우신 데다가, 마음씨도 선녀처럼 곱다고 들었습니다.”

“주노 씨도 차함.”

기집애가 혓바닥이 반 토막이 났나.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솔이를 보며 다정은 벌레 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준호라는 남자는 제법 근사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키만 보면 정혁보다 조금 작았지만, 전체적으로 듬직해서 체격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싱글벙글 웃는 상이라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까지 겸비했다.

그런데 입에 발린 말을 잘도 지껄이는 게 은근히 바람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자리 잡았다.

부지런히 아기 새를 먹이는 남자에게 다정이 상체를 기울였다.


“차정혁 씨. 저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솔이 마음 여리단 말이에요.”

소곤대는 말에 정혁의 눈길이 옆 테이블을 스치고 돌아왔다. 무심한 눈이 두어 번 깜빡인다.


“글쎄, 사람 모르지. 유다정도 5년 전에 세상 순진한 얼굴로 나 꼬셨잖아.”

“……내, 내가 언제요!”

어버버 소리를 내며 다정이 정색했다.


“아니라고?”

“아니거든요! 먼저 꼬신 건 차정혁 씨잖아요.”

“그런가?”

픽 웃으며 그는 다시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기 시작했다. 다정은 확 달아오른 뺨에 다급히 손부채를 부쳤다.

그런데 가만. 홍준호? 어디서 봤더라? 분명 초면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중에 솔이 씨 닮은 딸을 낳으면 정말 예쁠 것 같습니다.”

“어머 어머, 몰라요오.”

다정은 기가 막혀서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정혁에게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람 좀 선수 같아요. 소개팅에서 무슨 딸 낳는단 소리를 해요?”

“그게 뭐? 유다정은 소개팅도 안 했는데 아들이 다섯 살이잖아.”

“…….”

뭔가 말을 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기분이라 다정은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엇, 솔이 씨. 여기 뭐가 묻었습니다.”

“네? 뭐가요?”

준호의 손이 솔이의 귓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예쁨이 묻었네요. 하하하!”

“아잉, 주노호 씨잉!”

다정은 썩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장면이 불편한 건 저뿐만이 아닐 거다.

이번만큼은 차정혁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 같아 찌푸린 눈을 옆으로 빙 돌렸다. 그랬더니 정혁의 눈길은 벌써부터 다정을 향하고 있었다.

저걸 보고도 할 말이 없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듯이 눈을 키우자 그의 입이 덤덤하게 열렸다.


“유다정도 많이 묻었어.”

 

* * *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다정은 트렁크에서 청귤이 담긴 상자를 꺼내 날랐다. 그러는 동안 정혁은 당연하단 듯이 시우를 꺼내 안았다.

다정을 뒤따르며 시우를 요리조리 살피던 정혁의 걸음이 문득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씩씩하게 한 끼를 뚝딱 해치운다 싶어 걱정을 놓았더니 시우는 다시 푹 가라앉아 있었다.


“유시우?”

“…….”

그에게 맥없이 안긴 시우는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저 힘없이 뜨인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정혁이 시우의 목덜미에 귓가를 붙였다.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번엔 축 눌어진 손을 쥐어 제 입술에 가만히 대보았다.

다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정혁이 객실로 들어서며 다정을 불렀다.


“유다정, 유시우 이상해.”

“이상해요? 뭐가요?”

“유시우 뜨거워.”

놀란 얼굴이 된 다정은 얼른 청귤 상자를 내려놓고 달려와 시우를 넘겨 안았다.

소파에 앉아 이마와 목덜미를 짚자 열감이 느껴졌다. 체온계를 찾아와 측정하자 37.4˚C. 미열이었다.

시우는 통 기운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만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정은 눅눅하게 식은땀이 밴 시우의 이마를 쓸었다.


“우리 시우, 어디가 아픈지 엄마한테 말해 볼까?”

“흐응…… 엄마, 코…….”

도리질 친 시우가 다정의 품을 파고들며 칭얼거렸다.


“우리 강아지. 힘들었나 봐. 엄마랑 코하자.”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어 시우를 일찍 눕혔다. 선선하게 해 주고 이마에 해열 패치를 붙여 준 뒤 토닥토닥해 주자 시우는 금세 잠이 들었다.

다시 체온을 측정했다. 36.8˚C.

해열제도 먹였으니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였다.


 

* * *

자정을 조금 앞둔 시각.

하얗게 질려 응급실로 뛰쳐 든 정혁은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흔들리지 않게 시우의 머리를 가슴에 꼭 감싸 안고 아무나 들으라고 소리쳤다.


“여기! 애가 아픕니다! 빨리요!”

그러는 동안에도 시우는 의식이 혼미한 채 계속 구토를 쏟았다. 호흡은 가쁘고 땀과 토사물에 젖어 엉긴 몸이 척척했다.


“애가 아프다고요!”

“보호자분. 이쪽이요! 이쪽에 눕혀 주세요!”

버럭 내지른 고함에 허둥지둥 달려온 간호사가 응급처치용 베드를 가리켰다.


“보호자분은 잠깐 저쪽에서 기다려 주세요.”

아이를 눕히자마자 달려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기본 검사를 진행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재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우가 구토를 쏟기 시작했다. 서서히 열이 떨어지기에 안심했더니, 잠깐 사이 몸이 절절 끓었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우는 계속 구토를 했다. 먹은 것은 이미 다 게웠고, 더 나올 것도 없자 아예 노란 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 어떡해…….”

저만치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다정의 눈시울이 금세 축축해졌다. 그런 다정의 손끝을 누군가가 꼭 쥐어 왔다. 불안한 듯 그녀의 손을 절박하게 움켜쥔 채 손끝은 파리하게 떨고 있었다.

한쪽 어깨는 토사물로 흠뻑 적신 채, 핏기가 달아난 얼굴로.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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