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어제부터 1일 (52/114)


52화 어제부터 1일
2023.01.29.


주말을 맞아 영화관은 북새통이었다.

종종 가족이나 친구와 동행한 이들도 보였지만, 매표소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데이트를 나온 남녀가 대다수였다.

정겨운 연인들 틈에서 수경이 침묵하는 사이 도준의 눈길은 매표소 안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이유야 어쨌든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어색한 공기만 감돌았다.

도준은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지은 죄가 있어 선뜻 제안을 수락하긴 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수경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열 번의 데이트.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제 마음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데.

다만 눈앞에 있는 이 발랄한 아가씨의 노력을 무시할 수만도 없어 최선의 성의를 보이자고 마음을 먹었다.

가벼운 헛기침 끝에 도준이 목소리를 꺼냈다.


“팝콘…… 드시겠습니까?”

“전 영화 볼 때 잘 안 먹어요.”

“네에…….”

“그래도 첫 데이트니까 달달하게 캐러멜 맛으로 살까요?”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아이처럼 수경이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도준의 입가에도 엷은 웃음이 어렸다.

상영관에 입장한 도준은 재빨리 음료를 내려놓고 수경의 좌석 시트를 당겨 주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어서 도준도 자신의 좌석에 착석했다. 그 과정에 두 사람의 팔이 스쳤다. 살갗을 맞댄 채 슥 훑어내렸다는 게 정확했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놀란 달팽이 더듬이처럼 확 오그라들었다.


“……실례했습니다.”

사과하자 수경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녀와 닿았던 팔꿈치를 감싸며 도준은 조용히 심호흡했다.

뜨거운 체온과 스쳤던 매끄럽고 시원했던 피부의 감촉을 상기하자 기이하게도 뒷덜미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잔잔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되돌아 나온 매표소 안에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다.

도준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영화는 봤는데,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눈치였다.

평소 성격이라면 이렇게 숨 막히는 상황을 좀체 견디지 못했겠지만, 수경은 그가 리드할 수 있도록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불편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땠습니까? 여성 관객들 평점이 좋아서 예매했는데…….”

나름의 배려에 수경은 털털하게 말했다.


“사실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아……. 그렇군요.”

도준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의는 보였되 점수를 잃을 기회이니 다행이다 싶으면서 또 한편으론 미안해지고 말았다.


“전 화끈한 게 좋아요. 마빌 광 팬이거든요.”

수경이 중얼거리자 도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빌요? 저도 환장합니다.”

“어머! 정말요?”

“네. 누가 제일 원픽입니까?”

“제 원픽은 히어로가 아니라 악당인데…….”

불현듯 커진 도준의 눈이 수경의 눈을 빤히 직시했다.


“다크 블랙!”

“다크 블랙.”

동시에 악당을 외친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켜켜이 쌓아 올린 견고한 벽이 단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전 어릴 때부터 좀 특별했어요. 또래 애들이 인형 놀이할 때 막대기 들고 칼싸움하고 다녔으니까요.”

“정말입니까? 그렇게 왈가닥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언니들이 지금 저 보면 그래요. 이수경 사람 됐다고.”

수경은 솔직한 면면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에 도준은 약간의 자기반성이 되었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여자라 액션이나 히어로물 같은 장르는 허황하고 경박하다 여길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이만큼이나 솔직하고 털털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공통점까지 발견하고 나자 수경이 다시 보이기까지 했다. 하긴, 덮어 놓고 경계만 하느라 그녀에 대해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성으로야 멀리해야겠지만 인간적인 부분까지 선을 그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경계심이 한껏 누그러들었다.


“수경 씨 같이 저녁 할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설마 이태리 국수 먹자고 할 건 아니죠?”

“아…….”

도준은 속마음을 들킨 양 잠시 당황했다. 첫 데이트에 파스타는 거의 국룰이라 그러자고 할 참이었다.


“나 얕보지 말아요. 완전 토종 한국 사람이니까.”

“그럼…….”

두 사람이 다시 눈을 맞췄다.


“삼겹살?”

“삼겹살!”

이번에도 동시에 뱉은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제주 전통 가옥 앞에 늘어뜨린 현수막을 응시하는 눈길이 시큰둥했다.

「청귤 따기 체험! 입장료 어른 2만 원(어린이 1만 원) 90분 동안 맘껏 따세요!」

정혁은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기에 쫓아와 봤더니 도착지가 귤밭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제주까지 와서 이걸 꼭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졸린 얼굴을 하고도 엄마의 극성에 어쩌지 못하고 따라온 유시우를 보면 탄식은 더욱 깊어졌다.

으쌰 추임새를 넣은 다정이 노랗고 커다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웠다. 그런 다정의 뒤를 정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따라붙는다.


“유다정. 지금 8시밖에 안 됐어. 이럴 거면 여행은 왜 왔어?”

“호텔에만 있을 거면 제주도까지 뭐 하러 와요?”

다정은 그의 투정을 일축하고 시우와 함께 귤밭으로 나아갔다.


“시우야. 여기서 따는 귤 다 우리 거래요. 누가 누가 많이 따나 엄마랑 내기할까?”

“어……. 귤 아닌데?”

덜 익어 새파란 귤을 보며 시우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귤은 귤인데 시우가 좋아하는 노란 귤 되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해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말에 시우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잠시.


“시우야, 거기 큰 거 한번 따 볼까?”

“어…….”

작은 사다리 위에 애를 올려 두고 웃는 얼굴로 귤을 따라고 강요한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정혁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돈을 받고 해도 모자랄 판에 돈을 줘 가면서까지 이런 노동을 사서 하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다.


“와! 엄청 크다. 이건 엄마가 따야지. 우리 시우는 저거 따 볼까?”

“…….”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유시우가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개는 호기심에 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도 없고 힘만 드니 흥미가 사그라들 만도 했다.

반명 유다정은 90분 동안 딴 귤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에 아주 의욕이 넘쳤다.


“시우야! 여기도 큰 거 있다. 이거 따자.”

“어…… 큰 거?”

힐끔 엄마 눈치를 보던 시우의 어깨가 크게 들썩인다. 어린 게 한숨까지 내쉬는 모습에 정혁의 짜증이 폭발했다.


“애 좀 혹사하지 마.”

한 소리 지껄이자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사라뇨? 이게 다 체험이고 공부예요. 그치 시우야?”

아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만 시우는 커다란 눈만 데굴 굴렸다. 옳다구나 정혁이 코웃음을 친다.


“거봐. 유시우 엄청 피곤해. 남자를 그렇게 몰라? 물장구치고 뛰어노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은 이딴 거 하나도 재미없어.”

시우의 눈동자가 더 크게 굴렀다. 귀찮고 따분한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엄마에게 사실을 인지시켜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큼지막한 손이 시우의 정수리 위로 톡 내려앉았다.


“유시우.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당당하게 말해도 돼. 다섯 살이면 자기주장도 하고 그럴 나이야.”

“음…….”

시우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마치 그의 말에 동조라도 하는 양 묵비권을 행사하는 아들의 모습에 다정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승기를 잡은 정혁의 입바른 소리는 계속되었다.


“여행을 왔으면 맛있는 거 먹고 놀아야지 왜 노동을 해?”

“여행을 왔으면 하나라도 더 보고 체험해야죠!”

“하고 싶으면 유다정이나 해. 왜 애한테 노동을 시켜? 이거 유시우가 노동착취로 고소할 수 있어.”

“어머머?”

다정이 황당하게 눈을 치떴다. 기세등등 빤히 노려보던 정혁의 눈길이 시우에게 향했다.


“유시우. 변호사 필요하면 말해. R&U 로펌 변호사로 선임해 줄게. 국내에서 승률 제일 좋은 로펌이야. 무조건 유시우가 이겨.”

“하! 기가 막혀서.”

다정의 눈이 뾰족해졌다.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던 정혁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안 그래도 더운데 스파크가 튈 지경이었다.

그 틈에서 도르르 눈을 굴리는 시우는 한숨이 깊었다. 여행관조차 다른 남녀의 불꽃 튀는 신경전에 어린 시우는 등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게 누가 따라오래요? 그렇게 호텔 붙박이가 좋으면 차정혁 씨는 호텔에 있지 따라오긴 왜 따라와서 잔소리예요?”

“그럼 안 따라와? 어제부터 우리 1일인데.”

다정의 놀란 눈이 퍼뜩 시우의 얼굴로 떨어졌다가 원위치했다.


“1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여섯 번이나 말했잖아. 그러니까 우리 오늘 2일째야.”

다정은 펄쩍 뛰었다.


“난 동의한 적 없어요. 그걸 왜 차정혁 씨 마음대로 정해요?”

“아무 말 안 하길래 유다정도 좋은 줄 알았지.”

하칫거리던 다정의 눈이 괜히 허공을 맴돌았다.

험상궂던 기류가 낯간지럽게 돌변하자 어디서 주워 썼는지 모를 선캡 아래로 드러난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듣기 싫어요! 방해하지 말고 차정혁 씨 볼일 보러 가세요.”

“내 볼일이 유다정 따라다니는 거야. 우리 2일째니까.”

한 마디도 지지 않자 곱지 않은 눈길이 정혁의 얼굴로 날아와 꽂힌다.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본능적으로 이쯤에서 한발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아는지라 정혁은 눈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미움을 사는 건 옳지 않았다. 오늘 2일째니까.


“그만 쏘아보고 가서 유다정 좋아하는 귤이나 실컷 따. 유시우는 두고.”

듣고 보니 정혁의 지적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정이 보기에도 시우는 귤 따기 체험에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뜨거운 볕에 발갛게 익은 뺨이 안쓰러워 하는 수 없이 체험장에서 판매하는 청귤 아이스바를 사서 시우에게 안겨 주었다.


“시우는 이거 먹고 놀고 있어요. 엄마 귤 많이 따 올게요.”

“네에!”

흐뭇하게 웃기도 잠시 다정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섰다. 퍽 마음이 상했는지 얄미운 남자를 쌀쌀맞게 흘겨보더니 귤밭을 향해 팩 돌아서서 가 버린다.

다정은 악바리처럼 청귤 따기에 매진했다. 한 상자씩 가득 채워 엄마한테도 보내고 솔이네도 보내려면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줄어든 노동력만큼 더 악착같이 귤을 따 모으는 여자를 보며 정혁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체험비로 귤을 사고 말지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꽉 막힌 여자가 답답해서 한숨을 쉬다가 좁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유시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이스바를 찹찹대느라 앙증맞은 입이 바쁘기도 하다.


“유시우.”

“네에!”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엄마의 강제 노동착취로부터 구해 줬으니 자신을 향한 호감도가 상승했을 게 분명했다.


“한 입만.”

“…….”

입맛을 쩝 다신 시우의 눈이 뒤룩 구른다. 지난번엔 인심이 좋아서 죽일 뻔하더니, 이번엔 제법 경계하는 눈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우가 아이스바를 내밀었다. 내켜 하는 것 같진 않은데 어쨌든 흡족한 결과라 정혁은 기분 좋게 아이스바를 한입 깨물었다.

그 순간, 단단하던 얼음덩어리가 빙산처럼 쩍 갈라지고 시우의 커다란 눈동자도 흠칫 들썩인다.

잠시 정적.

맑고 커다란 눈동자가 충격에 굳은 채 흙바닥 위로 굴러떨어진 조각난 얼음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손에 들린 허전한 막대기로 향하더니 다시 당황 어린 정혁의 얼굴로 옮겨왔다. 투명한 먹빛 눈동자가 불길한 징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지만 앙다문 채 비죽거리던 입술은 기어이 뿌앵,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삽시간에 창백해진 정혁의 눈길이 퍼뜩 귤밭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귤 삼매경에 빠졌던 다정이 화들짝 놀라 방향을 트는 장면이 눈에 잡힌다.

제법 먼 거리인데 제 아들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수준이 거의 동물적이었다.

정혁은 멎은 숨을 천천히 토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의 감각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시우야? 우리 시우 왜 그래요?”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달려온 엄마 품에 파묻혀 시우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했다.


“흐아아아앙! 어므아아하, 아즈씨아앙!”

유다정의 눈길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차정혁 씨! 왜 애 걸 뺏어 먹고 그래요?”

누가 엄마 아니랄까 봐 유다정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신기하게 알아먹었다.

안 그런 척 애쓰지만, 정혁의 얼굴에 낭패감이 짙었다. 그래도 오해는 풀자 싶어 항변했다.


“뺏어 먹은 거 아니야. 유시우가 준 거야.”

“제발 나잇값 좀 해요.”

따끔한 질타가 억울했지만, 세상 잃은 것처럼 우는 유시우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시우, 울지 마. 백 개 사 줄게. 원하면 귤밭 통째로 사 줄게.”

“흐아아아아앙!”

달래 보지만 시우의 설움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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